<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나눔의 고장 섬밭마을 -2
이모준 공은 조선시대 문학작품 중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1467~1555)의 12세 손이다. 이현보 역시 조선시대의 진정한 선비였다. 그는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민생을 소중히 여긴 목민관이었고 깊은 효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금 앞에서도 당찬 신하였다. 연산군 시절 사초가 빌미가 된 무오사화가 있은 지 불과 4년 뒤 새내기 사관이 된 이현보는 대간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임금의 말을 직접 듣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인사 담당 관리들이 궁중에서 직무를 보면 사관도 참석케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후손인 이모준 공은 조상의 유업인 적선(積善)과 애일(愛日), 효와 덕을 몸소 실천한 우리 해운대의 얼굴이다. 걸인들이 세운 송덕비에는 ‘자기를 미루어 타인의 어려움을 생각하신 공은 능히 선각하신 분이요, 힘써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서 개천과 도랑물을 감사히 생각하였다. 배고픈 이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어 언 몸을 풀어 주었다. 아들도 두고 손자도 두어 복록을 누리소서’라고 쓰여 있다. 영천 이씨 소윤공파의 청강제사에는 폭포사에 세워진 이공의 송덕비와 똑같은 모형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장산 폭포사 입구 오른쪽에 세워진 이공모준 송덕비
한글비문
영천 이씨 소윤공파 가계도를 설명하고 있는 종손
필자는 장산 절골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기 위해 장산을 가끔 오른다. 그러다 보면 해운대를 ‘나눔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해 준 이공의 송덕비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공 후손들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없어서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해운대의 뿌리를 찾겠다는 생각으로 지역신문에 기고를 하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익히 알고 지내던 해운대초등학교 동문 선배 집안이 이모준 공의 후손이었다.
이공의 송덕비가 최초로 세워졌던 섬밭마을 옆 마을인 미포마을 인동 장씨 남산파 문중 장상윤(해운대초등학교 7회, 좌동, 87세) 어르신이 이공의 자손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단초로 이근순(해초 17회, 우동, 82세), 이근택(해초 19회, 75세), 이근배(해초 24회, 우동) 자손과 친족 중의 한 분 이부돌(해초 31회, 좌동)의 소식을 알게 되면서 직계 후손을 만나게 되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