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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처럼 (전도서 3;1-8)
시간은 저 시냇물처럼 무심코, 무작정, 흘러가버린다.
누구도 같은 시냇물을 두 번 건널 수 없다. 내 다리에 부딪힌
시냇물은 이내, 그 주위를 돌아, 저 아래로 흘러 사라진다.
물은 용감하다.
순간을 살면서도 이 순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 수 있고, 가야만 가고, 그래서 가고 있는 바다로
스스로 간다.
바다로 가는 이유는 자기의 위치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에 도착하면, 다른 곳에게 몰려온 물과 하나가 되어 승천을
준비한다.
태양이 바다로 빛과 열을 보내,
물을 데워 가볍게 만들어 하늘로 올릴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사실 올라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기원전 10세기)의 어록으로 알려진 <전도서>에 이런 문구들이 있다.
<전도서>에는 기원전 5세기에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사용된
어휘들과, 아람어 단어들이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기원전
4세기경 쓰였을 것이다.
누군가 이스라엘인들은 나라를 잃고 고대 근동 전역에 흩어져
살면 자신들이 언젠가는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자신들의 전설적인 지혜의 왕 솔로몬의 입을 빌어
어록형식으로 이 책을 썼다.
인생은 인간이 처음에 계획한 대로 펼쳐지는 법이 없다.
인생의 봄은 가을과 겨울을 통과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거대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
전도자는 인생의 엄연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3장 1-8행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1.
ל ַכֹּ֖ל זְמָ֑ן וְעֵ֥ת לְכָל־חֵ֖פֶץ תַּ֥חַת הַשָּׁמָֽיִם׃ ס
모든 일엔, 하늘 아래 일어나는 인간의 모든 의지와 욕망엔,
그것들이 일어나는 이미 정해진 시간과 시절이 있습니다.
2 עֵ֥ת לָלֶ֖דֶת וְעֵ֣ת לָמ֑וּת עֵ֣ת לָטַ֔עַת וְעֵ֖ת לַעֲקֹ֥ור נָטֽוּעַ׃
날 시절이 있고 죽을 시절이 있으며,
심을 시절이 있고 심은 것을 뽑을 시절이 있습니다.
3. עֵ֤ת לַהֲרֹוג֙ וְעֵ֣ת לִרְפֹּ֔וא עֵ֥ת לִפְרֹ֖וץ וְעֵ֥ת לִבְנֹֽות׃
죽일 시절이 있고 치료 할 시절이 있으며
헐 시절이 있고 세울 시절이 있습니다.
4. עֵ֤ת לִבְכֹּות֙ וְעֵ֣ת לִשְׂחֹ֔וק עֵ֥ת סְפֹ֖וד וְעֵ֥ת רְקֹֽוד׃
울 시절이 있고 웃을 시절이 있으며,
슬퍼할 시절이 있고 춤을 출 시절이 있습니다.
5. עֵ֚ת לְהַשְׁלִ֣יךְ אֲבָנִ֔ים וְעֵ֖ת כְּנֹ֣וס אֲבָנִ֑ים עֵ֣ת לַחֲבֹ֔וק וְעֵ֖ת לִרְחֹ֥ק מֵחַבֵּֽק׃
돌들을 던져 버릴 시절이 있고 돌을 거둘 시절이 있으며
껴안을 시절이 있고 껴안는 것을 멀리 할 시절이 있습니다.
6. עֵ֤ת לְבַקֵּשׁ֙ וְעֵ֣ת לְאַבֵּ֔ד עֵ֥ת לִשְׁמֹ֖ור וְעֵ֥ת לְהַשְׁלִֽיךְ׃
찾을 시절이 있고 잃을 시절이 있으며
지킬 시절이 있고 버릴 시절이 있습니다.
7. עֵ֤ת לִקְרֹ֙ועַ֙ וְעֵ֣ת לִתְפֹּ֔ור עֵ֥ת לַחֲשֹׁ֖ות וְעֵ֥ת לְדַבֵּֽר׃
찢을 시절이 있고 꿰맬 시절이 있으며
침묵을 유지할 시절이 있고 말할 시절이 있습니다.
8.עֵ֤ת לֶֽאֱהֹב֙ וְעֵ֣ת לִשְׂנֹ֔א עֵ֥ת מִלְחָמָ֖ה וְעֵ֥ת שָׁלֹֽום׃ ס
사랑할 시절이 있고 미워할 시절이 있으며
전쟁할 시절이 있고 평화를 유지할 시절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맨 처음에는 두 종류의 시간을 언급한다.
한 종류의 시간은 ‘정해진 시간(히브리어, 쩌만)’이며,
다른 종류의 시간은 시냇물이 순간을 경험하는 순간,
즉 과거, 현재, 미래하는 틀을 초월한 지금이자 영원이 된 시간
(히, 예쓰), 즉 어떤 일이 그 시점에 발생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며 시절이다.
저자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두 번째 시간만을 사용한다.
하나님만이 ‘정해진 시간’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두 번째 시간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한 ‘지금’이다.
불교에서는 이 지금이면서 항상인 시간을 ‘시절인연時節因緣’
이라고 부른다.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인연은, 자연의 시간인
시절과 같이 반드시 온다.
어리석은 자는 시간을 현재-미래라는 허상 안에서 살지만
지혜로운 자는, 지금-항상 이라는 ‘시절’과 인연을 맺는다.
흘러간 시간은 언제나 순간이다.
우리가 살아온 순간을 돌아보면 누구나 이 진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순간을 산 것처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떠날
것이다.
순간을 시절인연으로 살 수 있는 두기지 마음가짐이 있다.
첫째는 오늘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덤으로 사는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정받은 환자에게,
하루는 기적이며 감사다.
우리가 하루를 덤으로 산다면, 부모, 형제, 자식, 친구들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어지고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그들에게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전화통화 목소리와 문자를
통해 전하는 마음이, 시절인연으로 사는 비결이다.
두 번째, 우주가, 신이, 사회가, 자연이, 혹은 자기 스스로
깨달은 고유한 임무이자 의무를 자신의 ‘분수’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잠은 일종의 죽음이다,
잠은 하루를 인생의 초보자로 살라는 자연의 섭리다.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가 의무가 되고,
그 의무를 자신 속한 공동체 개선을 위해,
조화롭고 친절하게 때로는 파격적으로 펼칠 때,
선물이 하나 도착한다. 품격品格이다.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기품이나 위엄이다.
우리가 그런 품격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대 로마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들을 항상 상상하고 그것을 미리 준비했다.
그는 이런 마음가짐을 라틴어로 ‘프레메디타치오 말로룸’이라고
말했다.
이 문구를 직역하면 ‘최악의 일들에 대한 예견(豫見)’이다.
이것은 비관적인 삶의 철학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부모, 자식, 친구들 마지막으로 본다는 심정으로
만날 때, 그 조우는 감동感動이 될 수 있다.
저 쓰러진 나뭇가지도,
저 바위 위에 나타났던 담비도,
내가 끌고 있는 반려견도 시절 인연들이다.
그러나 시간은 공간과 다릅니다. 시간은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가질 수도 없습니다.
공간은 돈을 주고 살 수가 있지만,
시간은 돈을 주고도 살 수가 없습니다.
공간은 한번 가지면 그대로 자기의 것이 될 수가 있지만
시간은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가며,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시간 안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그 시간을 볼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공평성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루 24시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공간은 많이 차지할 수도 있고 적게 차지할 수도 있지만
시간만큼은 아주 정확하고 공평하게 모두에게 24시간 나누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도, 부요한 자도 모두가 24시간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시간이 24시간 주어졌다고 하여 내 것처럼
생각하여 남에게 나누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거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 수가 있지만
시간만큼은 나누어줄 수가 없습니다.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시간, 24시간을 숨을 쉬는 온 인류에서
무상으로 공급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 시간을 인간이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안에서 한계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장사도 세월은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그 공간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늙어가는 것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늙어가는 것에서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나누어 줄 수도 없고,
저축할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고
소유이전등기도 할 수도,
사고 팔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시간입니다.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단지 시간은 그 때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솔직히 우리들에게 내일이 주어진다는 것은 아무도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은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위력은 무서운 것입니다.
누구나 그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생명이요 재산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영원을 향한 창문을 엽니다. 이 시간이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됩니다.
“공간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며
동질적이며, 또 이런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다 같고 특징이
없는 빈껍데기 같은 것이지만 성경은 시간의 다양한 특성들을
지각하고 있다.
똑같은 두 개의 시간은 없다. 모든 시간은 각각 유일무이하며
각 순간에 오직 하나의 독립적이며 무한히 귀중한 시간만이
주어지는 것이다.”
헬라어로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카이로스’이고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인간의 역사 속에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chronology'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흘러가는 시간, 수평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우리의 신앙성장과 관계된 주님의 섭리적
시간을 말합니다.
세상의 시간인 크로노스에는 끝이 없습니다.
목적 없이 계속해서 흘러만 갑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마지막과 완성이 있습니다.
태초라는 계획된 시간이 있었듯이
종말이라는 예정된 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바로 그 날이 시간의 끝으로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인 카이로스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의 그 시간은 카이로스의 완성이면서 영원한 시간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카이로스는 충만한 시간, 혹은 성경에서는 때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달리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있는 수평적인 시간이지만
카이로스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없습니다.
카이로스는 영원에 속한 시간,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 영원 속에 있는 시간, 카이로스가 우리 삶에 침투해 들어오는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그 시간이 모두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공간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지만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아름답고 풍성하고 충만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 시간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안식이라는 대 성전을 건축할 때
우리는 충만한 시간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시간의 건축은 시작이 되며
아름답게 믿음의 집이 꾸며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영원을 여는 창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폴 틸리히는 영원한 지금(eternal now)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살면서도 영원을 누리는 신비, 그것이 바로 메누하의 시간입니다.
메누하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안식의 주인인 주님과 만나서 생명의 교제를 하는 시간입니다.
무조건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충만함을 덧입는 시간,
거룩함으로 덧입는 시간이 바로 메누하 입니다.
영원이 순간을 침투해 들어오는 카이로스를 순간순간 누리는
것이 메누하입니다.
요사이 공간에만 머무는 신앙인들, 공간 확장에만 급급한 목회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얼마나 큰 성전을 지었느냐?
얼마나 많이 선교헌금을 보내느냐?
얼마나 많이 헌금이 나오느냐?
이런 것으로 교회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공간으로부터 나온
가치입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과 거룩한 대면을 가졌느냐고 물어보는 곳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순간, 거룩함 속으로, 거룩한 시간 안으로,
거룩한 영원 안으로 들어가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을
대면했는지에 대하여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지성소의 개념은 우리를 깊은 회개로 인도합니다.
공간 안에만 있는 자들은 마음이 공허합니다.
마음이 황량합니다. 가져도, 가져도 목마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육체적인 목마름과 함께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을 주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의 지성소에서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공간 안에서 계속 허기지고 목마를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시간의 지성소에서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6일의 공허함을
어디에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