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02.
예전에 일본의 한 경제연구소가 21세기를 ‘재료의 시대’라고 불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재료가 중요한 것 맞지만 무대에서 AI(인공지능)나 ICT(정보통신기술), IBT(정보생명기술) 같은 주인공을 뒷받침하는 조연 또는 배경이라고 생각해온 필자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그런데 21세기가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재료의 등장은 일상의 풍경을 바꿀 수 있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인류의 당면 과제인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과 환경을 바꾸는 재료의 힘
▲ 오늘날 스마트폰과 TV에 쓰이는 OLED는 이리듐화합물로 비싸고 청색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미국 LA 캘리포니아대 화학과 마크 톰슨 교수팀은 최근 값싼 구리화합물로 안정하고 효율이 높은 청색 OLED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 마크 톰슨 제공
조명이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LED(발광다이오드)조명의 시대가 열린 건 1993년 일본 니치아화학공업의 연구원 나카무라 슈지가 질화갈륨으로 청색LED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적색LED와 녹색LED는 벌써 개발됐지만 청색이 없어 백색광을 낼 수 없었는데 새로운 재료의 등장으로 돌파구가 열린 것이다.
LED는 형광등과 백열전구에 비해 효율이 높아 조명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대폭 줄였을 뿐 아니라(효율이 낮은 백열전구는 아예 퇴출됐다) 수명이 길어 환경친화적이다. 물론 전기료 부담이 줄어들면서 지나친 인공조명(빛공해)이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LED가 상용화된 지 불과 10여년 만에 일상의 조명 풍경이 바뀌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물론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무덤덤하지만).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는 디스플레이 전이의 과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여전히 LCD(액정디스플레이)가 주류이지만 OLED 디스플레이가 스마트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TV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가을 큰 맘 먹고 OLED TV를 샀는데 색감이 풍부해(채도가 높고 명암비가 크다) 요즘 TV 보는 시간이 늘었다. 액정이라는 재료의 성능을 아무리 개선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화질의 한계를 OLED라는 새로운 재료가 등장함으로써 가볍게 뛰어넘은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보던 LCD TV가 100일 만 더 버텼어도 필자가 두 배 값을 주고 OLED TV를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 2월 8일 학술지 ‘사이언스’에 구리 화합물로 만든 OLED 개발 논문이 실린 배경 때문이다. 현재 사용되는 OLED는 이리듐 화합물이 재료인데 이게 문제가 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간 생산량이 수 톤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한 금속인 이리듐은 굉장히 비쌀 뿐 아니라(OLED 수요로 지난해 금을 추월했다) 청색OLED 화합물이 불안정해 적색이나 녹색에 비해 수명이 훨씬 짧다는 것이다. OLED TV를 몇 년 보면 화면의 색상이 서서히 노르끼리하게 바뀐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TV의 통상적인 수명보다 뒤에 나타나니까 제품화됐겠지만.
논문은 새로 개발한 구리 화합물 OLED가 기존의 불안정성 문제를 극복했고 이리듐에 필적하는 고휘도이기 때문에 이리듐 OLED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구자들은 특허도 냈다고 한다. 싸고 수명이 긴 구리 화합물로 만든 OLED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돼 가격이 뚝 떨어지면 LCD는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냉매는 이산화탄소보다 2000배 센 온실가스
▲ 열전효과를 이용한 냉각장치로 파란 원 위에 음료를 두면 끝까지 시원하게 마실 수 있다. 열전냉각은 비싸고 효율이 낮아 특수한 용도로만 쓰이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학술지 ‘네이처’ 3월 28일자에는 냉장고와 에어컨에 쓰이는 냉매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개발했다는 논문이 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액체와 기체의 상전이 과정에서 열을 주고받는 걸 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연한 결정이라는 특이한 고체에 압력을 변화시켜 냉매 역할을 하게 했다. 무척 낯선 개념임에도 꽤 흥미롭다.
냉매 하면 남극 오존층에 구멍을 낸 염화불화탄소(CFC)로 불리는 프레온이 떠오른다. 1987년 각국이 몬트리올 의정서에 서명한 이후 프레온 사용이 급감했지만 이를 대체한 냉매도 여전히 문제가 많다.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강력한 온실기체이기 때문이다. 냉매 1kg은 이산화탄소 2t에 해당하는데 이는 자동차를 하루 24시간 6개월 동안 몰 때 나오는 양이다. 또 냉매를 쓰는 냉각기술은 작은 크기에는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냉매를 쓰지 않는 냉각 시스템 개발이 시급하다.
▲ 냉장고와 에어컨에 쓰이는 냉매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가 개발됐다. 새로운 재료가 일상과 환경을 바꾸는 것은 물론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사실 냉매 대신 고체를 쓰는 냉각 시스템은 이미 상용화돼 있다. 이 고체는 열전효과를 내는 재료다. 19세기에 발견된 ‘열전효과(thermoelectric effect)’는 두 금속이 맞닿은 부분의 온도가 다를 때 전류가 흐르거나 거꾸로 전류를 흘릴 때 온도차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앞의 현상의 이용하면 폐열에서 전기를 만들 수 있고 뒤의 현상을 이용하면 고체 냉각장치를 만들 수 있다(온도가 떨어지는 금속이 주변의 열을 흡수하므로).
n형과 p형 반도체를 써서 장치를 만들면 열전효과가 더 커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용화의 길이 열렸고 오늘날 몇몇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 냉매 시스템에 비해 비싸고 효율이 낮아 널리 쓰이지는 못하고 있다.
또 다른 고체 냉각 시스템으로 최근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게 칼로릭 재료을 이용한 방식이다. ‘칼로릭 재료(caloric material)’란 외부에서 자기장이나 전기장, 압력 같은 장(field)의 변화를 줄 때 엔트로피가 크게 변하는 상 변이가 일어나면서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화합물이다. 엔트로피(S)는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외부에서 장을 걸면 칼로릭 재료의 무질서도가 작아지면서 온도가 올라가고 열을 방출하면서 원래 온도로 돌아간다. 그 뒤 걸린 장을 풀면 무질서도가 커지면서 온도가 내려가고 주위의 열을 흡수하면서 원래 온도로 돌아간다. 지금까지는 주로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반응하는 칼로릭 재료를 연구했다. 그러나 큰 온도차를 내기 어렵고 반복하면 효율이 금방 떨어져 아직 갈 길이 멀다.
주변 열을 흡수하는 유연한 결정
▲ NPG 결정구조. 네오펜틸글리콜 분자로 이뤄진 유연한 결정의 단위 구조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갈색이 탄소원자, 빨간색이 산소원자다. / ‘네이처’ 제공
중국과학원 금속연구소를 비롯한 다국적 공동연구팀은 유연한 결정이 압력의 변화에 따라 주변과 많은 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뛰어난 칼로릭 재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정은 원자나 이온, 분자가 공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는 고체다. 예를 들어 소금은 나트륨이온과 염소이온이 3차원 바둑판의 교차점에 교대로 자리한 결정이고 설탕은 자당분자가 일정한 방향과 간격으로 배치된 결정이다.
‘유연한 결정(plastic crystal)’이란 분자가 서로 느슨하게 묶여 있는 결정으로 분자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만 개별 분자의 방향은 제멋대로다. 비유하자면 설탕 같은 전형적인 결정은 구성원들이 같은 쪽은 바라보며 좁은 간격으로 있는 훈련 상태이고 유연한 결정은 넓은 간격으로 퍼져 자리는 지키면서 편하게 쉬는 상태다.
보통 결정은 단단해서 누르면 어느 선까지 버티다 깨지지만 유연한 결정은 누르면 쑥 들어갔다가 힘을 빼면 다시 원래로 돌아온다. 어찌 보면 고체(결정)와 액체 사이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유연한 결정을 누를 때, 외부에서 압력을 가할 때 단순히 수축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방향이 제멋대로인 분자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무질서도인 엔트로피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만일 엔트로피의 변화가 아주 크다면 유연한 결정으로 냉각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여러 유연한 결정들을 대상으로 압력의 변화에 따른 엔트로피 변화를 측정했는데 네오펜틸글리콜(NPG)이라는, 탄소원자 5개로 이뤄진 분자로 만든 유연한 결정이 상온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1기압에서 수백 기압으로 압력을 높이면 엔트로피가 최대 390J/㎏K까지 떨어지는데 이는 약 50도의 냉각 효과를 볼 수 있는 값이다. 냉장고나 에어컨에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NPG 분자로 만든 유연한 결정을 쓴 냉각장치를 상용화하기는 어렵다. 녹는점이 높지 않고 결정이 약해 압력을 넣고 빼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뭉개지기 때문이다. 유연한 결정이 고체 냉각 시스템에 쓰일 수 있음을 보인 게 이번 연구의 성과라는 말이다. 이런 물성을 개선한 유연한 결정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한 세대 뒤 가정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의 냉장고와 에어컨이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특성을 보이는 재료가 등장할지 기대가 된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