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여름방학 하는 날이었습니다. 1교시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방학하는 날이라, 수업 분위기가 좀 어수선했어요. 종 치기 10분 전쯤에 수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자유 시간을 주었죠. 의자에 잠시 앉았는데 무료하더라고요.
그래서 분단 사이를 오가면서 아이들이 뭘 하며 노나 보았습니다.
어이쿠, 이런! 여학생 한 녀석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는 겁니다.
노려보는 나의 눈과 녀석의 겁먹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제 겨우 고 1짜리가 매니큐어라니….
혼내주려던 마음을 서둘러 버렸습니다. 방학 날 아닙니까.
“선생님도 좀 칠해줄래?” 왼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예~?” 아이는 정말 놀랐습니다.
“나도 손가락 하나만 칠해달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아이에게 맡긴 채 말을 걸었습니다.
“근데, 이런 거 왜 바르고 싶어?” “예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교복에 어울리나?”
“안 어울리죠. 방학이니까 그냥….”
“그래, 그렇지, 개학날은 어떻게 하고 올 건데?”
“깨끗하게 지우게 올게요.”
“좋았어, 난 안 지우고 올 거다.”
개학했습니다. 그 아이 반에 수업 들어갔습니다.
‘매니큐어 사건’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인사도 받기 전에 여학생 한 애가 저를 부릅니다.
부르는 아이를 바라봤죠.
녀석은 손가락 열 개를 쫙 펴서 들어 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매니큐어 싹 지웠고요, 손톱도 깎았어요.”
녀석은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 남았는데.”
“정말이요?”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여 주며 함께 웃었습니다.
오십 다 된 중늙은이의 손가락에 매니큐어가 초승달로 떠있습니다.’
몇 해 전 여름, 교실에서 경험한 일을 내 블로그에 적었었는데, 다시 옮겨왔다.
체벌금지로 말미암은 교권 침해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교사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 아이들이 몰래 춤을 추는 동영상도 화제다.
신문만 보면, 학교에는 싹수없고 막돼먹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조롱당하는
가여운 선생님들만 있는 것 같다. 학교가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된 원인을 체벌금지에서 찾는다. 내가 몸담은 교육환경 속에서 보면, 아니다.
논리적으로 틀렸다. 체벌금지로 애들이 엉망이 됐다면,
그 이전에는 엄청나게 체벌을 해서 아이들이 순종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가 않다. 학교에서의 체벌은 일상사가 아니다.
교사는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체벌을 행사했다.
일부 아이들이 교사를 놀리는 행위가 지금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필자가 중학교 다니던 70년대에도 어느 반이 먼저 선생님을 울리는지 시합을 벌였고,
선생님 신발에 개구리를 넣었다. 신혼여행 다녀온 선생님에게는 첫날밤 이야기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교사 권위가 하늘과 땅만큼 달라서 아이들 장난에 담긴 함의 역시 다르기는 할 것이다.
아이들은 늘 아이들이다. “요즘 아이들 문제야, 철이 없어”라는 어른들의 넋두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금언’이다.
예쁜 아이들 많이, 덜 예쁜 아이 조금이 모여 이룬 집합체가 교실이고 학교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늘어났지만,
그 아이들의 본바탕은 여전히 맑다고 믿고 싶다.
교실에서 매니큐어 바르는 여학생을 체벌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매니큐어를 모두 지우라고 명령했거나. 회초리를 들었다면,
그 아이는 엇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체벌 금지에 적극 찬성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체벌 금지에 대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한다. 불가피하게 체벌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학교는 개인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인권을 위해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 옳다는 분에게,
학생이 인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권리 주장에 앞서 의무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배려와 염치를 익혀야 한다.
잘하면 칭찬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 교사들은 이제 자문해 볼 시기가 되었다.
체벌 금지 때문에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인가? 나는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나는 아이들을 얼마나 진실 되게 대하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는가?
(한국 교직원신문, 가슴으로 크는 아이들,저자, 이경수 경기 김포 양곡고 교사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