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제일 사리불 존자와 마하구치라 존자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사리불 존자의 외삼촌이 바로 마하구치라 존자입니다.
단단한 각오로 공부하고자 손톱을 안깍고 길러서
긴 손톱, 즉 장조라는 별명이 붙은 분입니다. 그만큼 각오가 단단했다는 증거지요.
부처님 당시 때에는 서로 논쟁하는 전통이 내려왔던 모양입니다. 종파간에...
그래서 논쟁에 지면, 이긴 종파에 모두 귀속되는 그런 예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 모든 걸 아는 <일체지자>입니다.
과연 온 우주에 그 어떤 미세하고 작은 일까지 과연 다 알 수 있는가...
그 어떤 것도 모조리 다 알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나오는데, 뒷부분에 나옵니다.
여튼, 논쟁으로써 부처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아래의 내용엔 부처님께서 어떻게 중생들의 교만을 꺽어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깨달음으로 인도해주시는지에 대한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리불본말경(舍利弗本末經)에 설하듯이 사리불의 외삼촌인 마하구치라(摩訶俱?羅)가
그의 누이인 사리(舍利)와 토론을 하다가 졌다. 이에 구치라는 생각했다.
‘누이의 힘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지혜 있는 사람을 잉태했는데
엄마의 입을 통해서 하는 짓일 것이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러하니, 태어나서 자란 뒤엔 어떻게 감당하랴.’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교만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널리 논의해 보기 위해
출가하여 범지의 몸으로 남천축(南天竺)150)에 들어가서 경서를 읽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물었다.
“그대 범지는 무엇을 구하려는가? 그리고 어떤 경서를 배우는가?”
장조가 대답했다.
“열여덟 가지 대경(大經)151)을 모두 다 읽고자 한다.”
사람들이 말했다.
“그대의 수명이 다하더라도 한 가지도 알기 어렵겠거늘 하물며 어찌 다 알겠는가?”
이때 장조가 생각했다.
‘지난 날 교만을 부리다가 누이에게 졌는데
지금 또한 이 여러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는구나.’
이 두 가지 일 때문에 스스로 맹세했다.
“나는 맹세코 손톱을 깎지 않으리니, 반드시 열여덟 가지 경서를 다 읽으리라.”
사람들은 긴 손톱을 보고 그를 장조(長爪) 범지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사람은 갖가지 경서의 지혜의 힘으로써 종종의 옳은 법과 그른 법,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진실함과 진실치 않음,
있음과 없음 등을 따지고 판단하여 남의 논리를 타파했으니,
마치 큰 힘을 지닌 미친 코끼리가 부딪치고 차고 밟고 설치면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장조 범지가 토론의 힘으로 여러 논사들을 굴복시킨 뒤에
마가다국으로 돌아와 왕사성의 나라(那羅:날란다)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래 태어난 곳[本生處]으로 가서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 누이가 낳은 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그대 누님의 아들은 여덟 살에 모든 경서를 다 읽은 뒤에 열여섯 살이 되자
토론으로써 모든 사람을 이겼소.
그때 마침 석씨 종족의 도인(道人)으로 성이 구담(瞿曇)인 분이 있어, 그의 제자가 되었소.”
장조가 이 말을 듣자 교만한 생각을 내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 누이의 아들이 그토록 총명하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술책으로 속이고 꾀어서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았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향했다.
이때 사리불은 처음으로 계를 받은 지 보름째가 되었는데,
그는 부처님 곁에 서서 부채로 부처님을 부쳐드리고 있었다.
장조 범지는 부처님을 뵙자 문안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온갖 이론은 모두 깨뜨릴 수 있다. 온갖 말은 모두 무너뜨릴 수 있다.
온갖 집착은 모두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진실 된 모습이며,
어떤 것이 제일의제인가?
어떤 성품과 어떤 모습이라야 전도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이처럼 생각해 봐도 마치 대해 가운데에서 살피나
바닥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진실로 마음을 기울여
들어갈 만한 법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그는 어떠한 이론으로 누이의 아들을 제자로 삼았을까?’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부처님께 말했다.
“구담이시여, 나는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조야, 그대가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는데, 그렇다면 그 견해는 받아들이는가?”
부처님께서 물으신 뜻은 ‘그대가 이미 사견(邪見)의 독약을 마셨기에 지금 그 독기를 뿜어 말하기를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지만, 그렇다면 지금의 이러한 견해를 그대는 받아들이는가?’ 하신 것이다.
이때 장조 범지는 마치 좋은 말이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얼른 깨닫고 곧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같이 그 역시 이와 같았으니,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채찍의 그림자에 마음이 영입하게 되어 당장에 교만함을 버리고 뉘우치면서 고개를 숙여 이렇게 생각하였다.
‘부처님은 내게 두 개의 지는 문[負門]을 제시했다. 만일 내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면, 이 지는 문은 거칠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알고서 [스스로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니, 이제는 어찌하여 그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는가?] 하리라. 이는 망어를 눈앞에 드러냄이니 거칠게 지는 문으로, 여러 사람이 다 알게 된다. 두 번째 지는 문은 미세하니 나는 이것을 받아들여야겠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께 대답했다.
“구담이시여, 나는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이 견해 또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온갖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견해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니, 그렇다면 아무것도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서 범부와 다를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도도하게 교만을 부리는가?”
이에 장조 범지는 대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졌음을 알고는 곧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 앞에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졌건만 세존(世尊)께서는 나의 진 곳을 드러내시거나 시비도 따지지 않으시고 전혀 개의치도 않으신다.
부처님의 마음은 부드러우시고 으뜸가게 청정하시니, 온갖 말과 논의의 근거가 멸하고 크고 깊은 법을 얻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공경할 만하다. 마음이 청정하기가 으뜸이니,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어 삿된 소견을 끊어 주는 까닭이다.’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객진[塵]을 여의고 때를 여의어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의 눈이 맑아졌다.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라한을 얻었으며,
이 장조 범지는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으니, 큰 힘을 가진 아라한과를 얻었다.
만일 이 장조 범지가 반야바라밀의 기분(氣分)인 네 구절을 여의고 제일의제와 상응하는
법을 듣지 못했더라면 조그마한 믿음도 얻지 못했을 것이거늘 하물며 출가해서 도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큰 논사들과 예리한 근을 지닌 이들을 인도하시려는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경』을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