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사(鳳山祠) 연혁(沿革)
●서기(西紀)950년대(年代)인 고려(高麗) 광종(光宗)때 시조(始祖)
원수공(元帥公)의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여 봉축(奉祝)하였다고 구전(口傳)되고 있다,
●서기(西紀)1,570년 경오(庚午) (선조(宣祖)3년)에 진주봉곡촌(晉州鳳谷村) 봉란대(鳳卵臺) 동북(東北)쪽 대봉산(大鳳山) (현 비봉산(現 飛鳳山) 정맥(正脈)에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고 사호(祠號) 봉산사(鳳山祠) 재호(齋號) 봉강재(鳳降齋)라 했다,
●서기(西紀)1,714년 갑오(甲午) (숙종(肅宗)40년)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다시 중건(重建)하고 그 유지재산(維持財産) 으로 대봉산(大鳳山) 전역(全域)의 임야(林野)와 샘골 일대(一帶)의 토지(土地)를 매입(買入)하여 종중재산(宗中財産)으로 유치(留置)하였다,
●서기(西紀)1,802년 임술(壬戌) (순조(純祖)2年) 불행(不幸)히도 화재(火災)로 인(因)하여 사당(祠堂)은 소실(燒失)되고 재실(齋室)은 한말(韓末)에 관(官)의 서재(書齋)로 되었다가 왜정(倭政)때에 학교재단(學校財團)으로 몰수(沒收) 당(堂)하였다,
●서기(西紀)1,910년年 경술(庚戌) (왜정(倭政)1年) 봉강학교
(鳳降學校) 진주보통학교(晉州普通學校) 현 봉래초등학교鳳萊初等學校)로 사용(使用)되고 유지재산(維持財産)도 전부(全部) 국유화(國有化)되고 말았다,
●서기(西紀) 1,911년年) 신해년(辛亥年) (왜정(倭政)2년年) 다시 선대(先代) 어른들께서 봉란대(鳳卵臺) 동북(東北)쪽 현재(現在)
상봉동사무소(上鳳洞事務所)를 중심(中心)으로한 대지(垈地)를 마련하고
다시금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중건(重建)하여 사호(師號)는 그대로 봉산사 鳳山祠 라하고 재호(齋號)는 봉곡재(鳳谷齋)라 한다
그러나 왜정치하(倭政治下)에 압력(壓力)과 유지난(維持難)으로 건물(建物)은 폐퇴(廢頹)되고 대지(垈地)는 국유지(國有地)란 명목(名目)으로 몰수(沒收)되고 말았다,
●서기(西紀) 1,920년 경신(庚申) 춘(春) 종중(宗中)이 발의(發議)
하여 사당(祠堂)을 다시 건축(建築)하기로 하였으나 상봉동(上峰洞)에 소재(所在)한 전(前) 사당(祠堂) 집터가 국유지(國有地)로 된 것을 정상진씨(鄭相珍氏가 불하(拂下)받아 개인(個人)소유(所有)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 종중(宗中)이 다시 매입(買入)해 그위에
새로운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였다,
●서기(西紀) 1,921年 신유(辛酉) 왜정(倭政)12년年에 준공(竣工)하고
사호(師號)는 봉산사(鳳山祠)그대로 재호(齋號)는 봉양재(鳳陽齋)로 개칭(改稱) 하였다,
●서기(西紀)1,940年 경진(庚辰) (왜정(倭政)31년) 토지(土地)수용(收用)령(令)에 의(依)한 시가지(市街地) 구역정리상(區域整理上) 도로(道路) 교차점(交叉點)에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이 편입(編入)되어 부득이 철거(撤去)케 되어 이때 받은 보상금(補償金)으로
대봉산(大鳳山) 좌록(左麓)옛날 봉암(鳳岩)자리 위쪽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서기(西紀)1,962年 임인(壬寅) 전국(全國) 종원(宗員)) 헌성금(獻誠金)으로 대봉사(大鳳祠)를 건립(建立)하였다,
●서기(西紀)1,975년年 을유(乙酉) 1月 봉산사(鳳山祠) 유지위원회(維持委員會) (委員長 姜桂重)을 구성(構成)하고
사단법인(社團法人)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 숭모회`(崇慕會) (회장(會長) 문학박사(文學博士)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의
후원(後援)으로 봉산사(鳳山祠)를 재건(再建) 하기로 결의(決議)하였다,
●서기(西紀)1,976年 병진(丙辰) 5월29일 진주시(晉州市) 상봉서동(上鳳西洞) 879번지(番地)에 봉산사(鳳山祠) 재건(再建)
기공식(起工式)을 거행(擧行)하고 민족(民族) 문화재(文化財)로서 면모(面貌)를 갖추면서
사당(祠堂)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서재(書齋) 원수공(元帥公)의 사적비(事蹟碑)를 건립(建立)하였다,
●서기1,976년 11月18일 본전(本殿) 상량식(上梁式)을 거행(擧行)하였다
●서기1,979년 을미 3월 국가(國家) 진주시(晉州市)에 기부(寄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