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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질기게 ......
어떻게?
러시아에서는
지휘하러 가는 도시마다 고려인들을만나는지 ?
러시아 어느 도시를 가나 고려인이 없는 곳이 없다.
러시아에서 처음 지휘자로 일한 곳이 2001년 ~ 2004년까지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페라 극장이다.
2001년 겨울 니즈니 노브고로드 극장에서 오페라 "춘희"를 지휘할 때였다.
오페라 마지막 막이 시작하기전에 조명이 나를 비추기에
아하 !
"이 극장에서는 오페라의 마지막 막이 시작하기전에 다시 한 번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나보다" 하고 돌아서서 인사를하고 돌아섰는데도
계속 조명을 끄지않고 나에게 비추기에 뒤를 돌아보니 "나와 비슷하게생긴 동양여인이"
꽃을 한아름 들고 객석 중앙으로 걸어서 나에게 오고있었다.
아니 ! 이곳에도 나와 닮은 사람이 살고 있네?
충격을 받을만큼 뜻밖이었고 반가웠다.
마치고 극장장이 고려인들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당신이 온다고 고려인들이 만찬을 준비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러시아 사람들은 고려인들을 한국사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당시 나는 러시아말을 못했고 그들은 한국말을 못했기에, 통역이 영어로 소통시키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이후 나는 러시아 말을 배웠고, 고려인 협회 회장이었던 라리사는 나의 주선으로 한국말을 배워서 지금은 한국에서 일하고있다.
2004년 부터 5년간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카잔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했다.
카잔은 몽고가 러시아를 지배할때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고 러시아내에서 특이하게 이슬람공화국이다.
카잔역시 고려인이 많이 살았는데, 나는 음악회때마다 고려인들을 초대하여 러시아 주류사회에 고려인들을 소개했었다.
식당에서 또는 시장에서 장사하던 고려인들은 삶에 쫒겨 살다가 모처럼 예쁜옷을 입고 음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음악회를 통하여 그들은 러시아 주류사회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2006년부터 3년간 스탈인그라드 심포니의 수석객원 지휘자를 겸하여서 매년 10회가량 지휘하러 갔었는데
그곳에는 평상시에는 고려인이 2만명가량 살다가, 농번기에는 2만5천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다.
시간이 날때는 멀리 시골까지가서 농사를 짖는 고려인들을 만나보기도하였다.
농부들 중에는 거의 1만킬로미터 떨어진 동쪽은 물론이고 북한에서 탈출한 농부들도 몰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장에서 채소와 반찬을 파는 고려인들 또 택시를 탈때마다 수시로 만나는 고려인까지 참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스탈린그라드 고려인협회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던 리따는 나의 초대로 한국에 공연하러 왔다가 지금은 한국남자와 잘 살고있다.
모스크바와 빼째르부르그 등 대도시는 물론이고 크라스노다르, 로스톱 등 가는곳 마다 음악회장에서 고려인들과 만났다.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 등 한국과 가까운 동쪽에서 살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이후에
고려인들은 만리길 타향에서 눈물겨운 역사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고려인들은 어딜가나 힘없는 소수민족으로 또 러시아사람들과 피부가 다름으로 보이지않는 차별을 받았을 것인데도
근면하고 성실하여서 어디서나 두각을 나타내었다고한다.
130여개의 인종이 모여산다는 러시아에서 정말 소수였던 고려인이 "노력영웅의 70%" 를 차지했다는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까 0.2 % 도 안되는 고려인이 최고로 성실하게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노력영웅의 70%를 차지한 것은 엄청난 것이다.
어찌보면 남의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서럽게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했기에 죽을힘을 다하여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요즘 많이 느끼는 것이 "정말 한국인들이 대단하다" 는 생각을 많이하게된다.
지금이야 한국기업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최고로 못사는 나라였다.
20년전만해도 유럽에서 한국이라고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었다.
일본, 중국 ? 하고 물어보기에 "한국" 이라고하면 / 어디지? 하고 되 묻는데
참 답답하고 어이가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완전히 달라졌다.
고려인들역시 1991년 러시아가 개방되기 전까지는 북한과 소통했고 10년 전까지도 북한과 남한을 동등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북한은 자꾸 소외되고 남한과 교류가 넓어지고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한국기업이 들어가게되었고 한국기업에 취업하기위하여, 한국어 열풍이 불만큼 한국어의 인기가 좋다고한다.
어제 8월15일 광복절이라고 행사를 한다면서 나를 고려인 센터로 초대했다.
저녁6시 10분전에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고 6시가 되자 행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말로 진행하는것을 보니 고려인들의 공용어가 러시아인것 같았다.
정면에는 한국태극기와 북한 인공기가 나란히 걸렷다.
한국에서는 반발을할지 모르나 고려인들에게는 남북이 모두 자신의 조국인것이다.
말을 모르면 지겨울정도로
로자 회장은 울란우데에서의 고려인역사를 오랫동안 설명했다.
1931년생인 최고령부터 최근에 이주한 나까지
울란우데에 거주하는 중요한 사람의 이력을 나열하면서 현재 어떤곳에서 일을 하는지를 소개했다.
안타까운 것은 1917년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날때 이곳에 700명 가량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고 또 공산혁명에도 참여했는데
혁명후에는 많은 고려인들을 죽이고 또 이주시켰다고한다.
고려인협회 회장인 이 로자(Lee Rosa)의 할 아버지는 블라고 베센스크(하바롭스크 근처)의 광산 책임자로 있었는데
모든 재산을 빼았고 감옥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과 딸은 5천Km 떨어진 에카째린부르그로 보냈다고한다.
할 아버지는 옥고를 치른후에 부인과 딸을 찾으려고 카작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몇만리를 헤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물어물어서 러시아 중동부의 에카째린 부르그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어렵게 만났다고한다.
우랄산맥근처의 에카째린 부르그는 러시아사람들만 살기에 어린 로자의 어머니는 한국사람이 그리웠다고한다.
로자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사연을 소개하면
당시 러시아는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 군대는 가지 않았지만 - 일을하면서 군인들처럼 봉사했다고한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친구가 로자엄마와 닮은 남자가 있다고 알려주었다고한다.
로자의 아버지역시 자신과 비슷한 아시아여자가 있다는 말에 두사람은 만났고 돌아볼것도 없이 사랑에 빠졌다고한다.
고려인들은 자녀들에게 "너는 고려사람이니 고려사람과 결혼해야한다" 는 말을 항상 주입시켰다고한다.
그래서 한국말도 모르는 로자도 어렵게 어렵게 고려인과 결혼을했다고한다.
동생역시 고려인과 결혼시키려고 하는데, 로자의 동생을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를 고려인이라고 소개하더란다.
그 남자는 예쁜 로자의 동생을 차지하려고 자신의 부모들도 다 고려인이라고 했단다.
나중에 결혼하고보니 한국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부리야트(몽골계) 사람이었다고한다.
로자와 동생은 러시아사람들 틈에서만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고려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는 몰랐다고한다.
어릴때는 그저 자기도 러시아사람처럼 생각했는데 어느날 부터 한국인의 정체성에대하여 생각하게되었단다.
로자의 자매들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지만 어릴때 듣던 부모님의 서툰 한국말이 그렇게 정겹게 들렸다고한다.
예전에 러시아남부 카프가즈지역을 갔더니 거기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원래 그곳은 고려인들이 갈곳이 아니었다고한다.
1937년 스탈인이 이주를 시킬때
고려인들은 짐이나 짐승을 실어나르는 화물기차를 타고 한달이상 이주했다고한다.
모든 기차의 바깥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숫자로 표시했고, 그칸은 숫자에 표시된 도시로 이동시켰다.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 고려인들은 이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않고 무의식적으로 숫자를 지워버렸다고한다.
그래서 일부 고려인들이 카작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지않고 남부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고한다.(사실확인은 못했음)
광복절 행사후에는 중요한 사람들 20분 가량이 식당에서 모였는데
울란우데에서 40년이상 의사로 일했던 빅토르 김의 형님도 참석하셨다.(빅토르김도 28년간 울란우데서 의사였다)
그분의 형님은 1963년 사할린에서 블라고 베센스크의대로 장학금을 받고 와서 졸업후 (1969년) 이곳으로 왔다고한다.
오고싶어서 온것이 아니라 당시는 대학을 마치면 의무적으로 몇년간은 공산당에서 보내는 곳으로가서 봉사해야했단다.
그런데 살다보니 정이들었고 가족이 생기고 손자까지 이루어 잘 살고있다고했다.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형제들이 한국의 어딘가에 계실것같고 만나보고싶은데 찾을 길이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분은 한국말을 잘 하셨다.
그래도 여기서는 한국말을 사용할 일이 없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냐고 물었더니
워낙 한국말을 사용해야한다고 교육을 철저히 받아서 어른이 되어서도 만나면 형제들끼리 한국말을 사용했단다.
그분이 어릴때 살던 사할린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았는데 가끔 고려인들이 일본말을 흉내내거나 사용했다고한다.
그럼 어른들이 지나가다가 꿀밤을 때리면서 "고려인이 고려말을 사용해야지 무슨 쪽빠리말을 사용하냐"면서 혼냈다고한다.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사용하는것을 "신앙처럼" 철저히 지켰다고한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작스탄에서 살았던 고려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 어느 마을에는 학교교사가 거의 고려인이었고 러시아말 외에 한국말을 의무적으로 가르쳤다고한다. -
고려인들은 가능하면 모여살면서 한국말을 사용했고 한국 풍습을 지켜나갔다고한다.
러시아내에서 정말 극소수에 불과한 고려인들 이었지만 그들은 그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다수 고려인들이 사용하는 억양과 사투리는 북한말투인데 유독 사할린에서 오신 고려인들은 경상도사투리였다.
일재시대때 부산등 경상도 사람들이 사할린으로 많이 징용으로 끌려갔다고한다.
스탈린그라드 시골에 가니까 9,000Km 떨어진 동쪽에서(블라디보스톡 윗쪽지역 우수리스크) 농사를 지으려고 농번기에만
스탈린그라드로 농사지르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남쪽이라 날씨가 조금 따스하고 농토가 좋아서 오이나 수박등이 가능하다고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않을 - 얼어붙은 땅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 농법을 고려인들은 실천하고 있었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오이나 야체를 러시아 사람들보다 한달먼저 출하함으로 몇배의 수익을 올리고있었다.
나역시 한국인의 피를 속일수 없는것 같다.
러시아사람들중에도 지휘자가 많고
또 극장측에서는 외국인인 나를위하여 집을 구해주어야하고 또 외국인이기에 엄청난 세금을 대신 내어주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인 나를 지휘자로 영입하였다.
고려인들역시 내가 이도시에 지휘자로 온것을 축하하면서 귀빈으로소개해 주었다.
광복절 행사를 축하해주기위하여 부리야트 주정부에서 나왔던 공무원도 나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인사를 건냈다.
앞으로 나를 통하여 부리야트 공화국 주정부 관계자들이 고려인들에게 좀더 잘 해주길 바라고있다.
나는 몇일사이에 울란우데의 여러음악학교와 대학부학장을 만났고 오늘은 필하모니 총감독과 주정부 예술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한국인인 나를 통하여 울란우데에는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겨날테고
또 나를 통하여 부리야트 공화국이 변화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미 어떻게하면 울란우데의 예술적인 수준을 바뀔수 있을지 파악했고 실천방안을 찾고있다.
정말 한국인은 대단하고 나 역시 한국이 자랑스럽다.
특히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은 모든일이 잘 될 때보다
위기가 닥칠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특이한 민족이다.
머지않아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중 하나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삶의 가치기준과 방식에 대하여는 좀더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행복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니까 ......
2013년 8월16일이 지나서
첫댓글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긍지가 느껴지는 소식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특히나 더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소식 감사합니다
지휘자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휴일에는 아주 음악에 빠져 삽니다. 그리고 울란우데에 가서 우리 동포들을 만나고 싶군요.
감동입니다. 이번 겨울에라도 달려 가고 싶군요.
반갑습니다.
여기는 한국의 가을같은 느낌입니다
겨울에 한번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제가 오시기전에 공연스케줄을 드릴테니 거기에 마추어서 오십시오.
사실 러시아는 겨울에 와야 제대로 느낄수 있습니다.
울란우데에서 짧은 만남이 아쉬웠습니다.....우리 전주시온성 의료봉사팀은 내년에도 울란우데에 가기를 고대하며 가게되면 꼭 시간내어 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