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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밥상의 기본 반찬은 김치와 깍두기다. 전통 음식인 만큼 옛날부터 조상님들이 먹었을 것 같지만 요즘처럼 먹음직스런 깍두기는 역사가 의외로 짧을 수 있다.
무로 만든 김치 종류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맛깔스럽게 양념한 깍두기는 근대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깍두기라는 명칭부터가 20세기 이후에야 보인다. 1920년대 중반부터 김장철에 각종 신문 잡지에 배추김치와 깍두기 담그는 법이 실린다. 가장 이른 기록은 1923년 11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깍두기의 명칭을 통일하고 담는 법을 표준화하자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전에는 깍두기라는 이름 이외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담그는 법도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깍두기 비슷한 무김치는 조선 말기 요리서인 《시의전서》에 나온다. 젓무라는 김치로, 무를 네모지게 썰어 젓갈에 담근다고 했으니 지금의 깍두기와 모양 및 담그는 법이 비슷하다. 《시의전서》 역시 19세기 말의 책으로 지금 전해지는 것은 1919년에 쓰인 필사본이다.
깍두기는 역사가 분명하지 않으니 어떻게 생겨난 음식인지 그 기원에 대한 추측도 다양하다.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설이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허드레 음식에서 발전했다는 견해도 있는 반면 궁중에서 발달한 김치가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 김치는 주로 무로 담갔다. 배추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똑같은 무로 담근 김치라도 양반은 동치미, 나박김치 등 모양새를 갖춰서 먹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못생긴 무를 소금물이나 장에 담갔다가 밥 먹을 때 꺼내어 썰어 먹었다. 특별히 담그는 법이나 별도로 이름조차 지을 필요가 없는 그냥 무짠지였을 뿐이다.
‘깍두기’라는 명칭이 1920년 전후해서야 간신히 보이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전에는 짠지처럼 소금물이나 장에다 담근 무를 꺼내어 썰어 먹었을 뿐 특별히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끼니때 밥을 넘기기 위해 대충 먹던 반찬이라서 양반들의 기록에 깍두기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무김치가 양반집 조리 문화와 결합해 현재의 깍두기로 발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김치가 반가의 밥상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미적인 요소가 강조돼 정육면체의 반듯한 깍두기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다 20세기 초반인 1920년대에 일반 가정에서도 김장을 담그게 되면서 각종 젓갈과 고춧가루, 다양하고 풍부한 양념을 사용해 깍두기를 담근 것이 발전하면서 깍두기가 서울의 대표적인 무김치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궁중 음식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정조 임금의 둘째딸 숙선옹주가 아버지 정조를 위해 만들어 바친 무김치가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다.
정조의 사위 되는 홍현주의 부인이 임금에게 여러 음식을 만들어 올렸는데 이때 처음으로 깍두기를 만들었으며 무김치를 작게 송송 썰어 올린 것이 깍두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는 홍현주의 부인이 바로 숙선옹주로 순조의 누이동생이다.
《시의전서》에는 정조의 아내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가 가끔 순조에게 음식을 만들어 보내곤 했는데 순조는 시장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보낸 음식은 반드시 조금씩 맛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숙선옹주 또한 어머니 솜씨를 닮았다면 음식을 잘 만들었을 테고, 그래서 아버지인 정조에게 가끔씩 음식을 만들어 올렸을 수 있다.
또 《국조보감》에는 정조가 어렸을 때 밥은 적게 먹고 아침저녁으로 무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면 숙선옹주가 무를 좋아하는 정조를 위해 무를 송송 썰어 깍두기라는 새로운 김치를 만들어 올렸을 수도 있다. 순조도 누이동생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순조는 누이동생을 각별히 아껴 옹주가 입궁한다는 말을 들으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입궁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시집간 공주나 사대부 부인들이 궁중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왕실 어른들을 대접했다. 숙선옹주가 이때 음식 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
별생각 없이 먹는 깍두기지만 따져보면 그 속에서 별별 역사를 다 찾을 수 있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