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하권 4. 욕망과 두려움, 자기 중심적인 상태
문: 저는 다시 한번 즐거움과 고통, 욕망과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 가보고 싶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그에 대한 상상이라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그것은 유기체와 유기체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결여감 이라는 것은 느껴질 때에는 고통스럽고, 그런 일이 닥치지나 않을까 하고 상상하게 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필요가 충족될 때에 느껴지는 안도감이라든지, 불안감이 해소될 때에 기분이 고통을 끝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든지 환희, 행복 같은 긍정적인 이름을 붙여도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고통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각종 제도를 유지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저를 혼란케 하는 것은 생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나 순간 순간 변하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은 대게 파괴적이어서 즐거움의 대상과 수단, 그리고 심지어는 그 주체까지 상처를 입히거나 파괴해 버립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제 질문의 요점은 왜 즐거움이 파괴를 낳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그 파괴적인 성질에도 불구하고 왜 즐거움은 기대되는 것일까요?
저는 지금 자연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즐거움과 고통의 패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이 만들어 낸 즐거움입니다. 감각적이거나 또는 과식과 같은 아주 거친 즐거움에서부터 아주 섬세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말하는 겁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라 틀림없이 그 뿌리에는 뭔가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의 모든 행동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식으로 유용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놀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인간은 그 본질상 가장 놀이를 좋아하는 동물입니다. 놀이는 자기 탐구와 자기 개발의 필요를 충족시켜 줍니다. 그러나 놀이를 할 때조차 사람들이 자연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M: 간단히 말하면 자네는 지금 즐거움은 반대하지 않지만 그 대가로 치러야 할 통증과 고뇌는 싫다는 말이군.
문: 만약 진리 그 자체가 축복이라면 즐거움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것과 관련이 있을게 틀림없습니다.
M: 말의 논리를 따라가지 말아. 진리의 축복은 고통을 배제하지 않아. 그리고 지금 자네가 아는 것은 즐거움일 뿐이지 순수한 축복이 아니야. 그러니 즐거움이라는 것을 즐거움 자체의 차원에서 검토해 보자구.
만약 자네가 즐거움과 고통의 순간을 자신이 바라보게 되면 즐겁고 괴로운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거야. 즐거움이라는 것은 즐기는 사람과 즐겨지는 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
그리고 즐거움의 본질은 받아들이는데 있어. 상황이 어떻든 지간에 받아들일 수 있으면 즐거운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으면 고통스러운 거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원인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어.
아무튼 즐거움이 결정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 고통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야. 명백한 사실이지.
문: 고통은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M: 왜 안 된단 말인가? 하려고 해 본 적이 있어? 시도해 보라구. 그러면 고통 속에서 즐거움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네. 왜냐하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즐거움보다도 사람들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이야.
인간적 자아는 그 본성상 끊임없이 즐거움을 구하고 괴로움은 피하고 있는데 이런 식의 패턴을 끝내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자아의 죽음인 거야.
욕망과 두려움을 지닌 인간적인 자아의 죽음이 사람들을 행복과 평화의 근원인 우리들의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줘. 끊임없이 즐거움을 구한다는 것은 내면에 항존하는 상태를 반영하고 있어, 그러나 사람들은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될 때만 자기를 의식 한다구.
분노가 정상적인 생활을 가장 크게 파괴하는 것인데, 이 분노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 만약 고통이 있는 그대로 교훈이나 경고로서 받아들여져서 깊이 음미되고 각성하게 되며 고통과 즐거움 사이의 분열은 없어지고 둘 다가 경험이 되는 거야.
저항하면 고통스럽고 받아들이면 환희가 생기지.
문: 즐거움은 피하고 고통을 추구하라는 말씀인가요?
M: 즐거움을 구하지도 말고 고통을 피하지도 말라는 거야. 오는 대로 그 둘 모두를 받아들여서,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 둘 모두를 즐기고 보내야 할 때는 보내주면 돼.
문: 어떻게 고통을 즐길 수가 있습니까? 육체적인 고통에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M: 물론이지. 그건 정신적인 고통도 마찬가지야. 축복은 고통을 자각하는데 있는 거야. 그것을 피한다거나 고개를 돌려서는 안 돼. 모든 행복은 자각에서부터 오는 거야. 자각의 시간이 길수록 즐거움은 더 깊어지는 것이지. 고통을 받아들이고 저항하지 않으며 용기를 가지고 인내하면 이것이 참된 행복, 참된 축복의 깊고도 무한한 원천을 열어주지.
문: 왜 고통이 즐거움보다 효과가 더 크다는 것입니까?
M: 자아의 모든 힘들은 고통을 거절하지만 즐거움은 쉽게 받아들이거든, 아상이 참된 행복으로의 길을 방해하고 있는데,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상을 거부하는 거야. 그리니 고통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아상이 죽고 행복의 샘들이 열리게 되는 거지.
문: 고뇌를 받아들이는 것도 똑같은 작용을 합니까?
M: 고통의 사실은 자각의 초점 안에 쉽사리 들어오지. 그런데 고뇌의 경우에는 그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야. 고뇌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지. 왜냐하면 정신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끊임없는 고뇌의 흐름이기 때문이야.
고뇌의 깊은 층에 도달하려면 그 뿌리로 내려가서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생명에너지의 흐름을 서로 차단하고 장애를 일으키며 파괴하고 있어.
문: 제가 의식할 수 있는 수준보다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그런 얽힘을 어떻게 제가 바로 잡을 수가 있습니까?
M: 일상생활을 하면서 주의 깊게 생활하도록 해. 쉽사리 판단하지 말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생겨나는 모든 일들을 그냥 거기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면서"내가 있음" 과 함께 있으라구.
그렇게 자신을 잘 관찰하게 되면 그 관찰 자체가 내면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해서 묶여 있던 에너지를 자네의 삶과 의식에 더해 주지. 이것이 바로 자각의 위대한 작용이다. 자각이야말로 인생과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모든 장애를 제거하며 에너지를 해방시켜주지. 지성은 자유의 관문이며 말갛게 깨어있는 주의력이야말로 지성의 모체야.
문: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왜 즐거움은 고통으로 끝납니까?
M: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즐거움 역시 그런 거야. 기대도 하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말라구. 그러면 고통이 없을 거야.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기억과 상상이야. 물론 즐거움 이후에 일어나는 고통은 몸이나 마음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몸은 그 한계를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욕망은 한이 없고 끝이 없어. 속박과 자유의 열쇠가 모두 마음에 있으니 부지런히 마음을 관찰하게나.
문: 아직 대답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의 즐거움이 파괴를 낳습니까? 왜 사람은 파괴 속에서 즐거움을 얻습니까? 삶의 관심은 그 자신을 보호하고 지속시키고 확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통과 즐거움에 의해 끌려가는 어느 지점에서 이것들이 파괴적으로 되는 것인가요?
M: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기대하면서, 과장하고 왜곡시키고 빼먹기 때문에 그래, 과거와 미래에 투사되기 때문에 미래는 언제나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게 되지. 그래서 감각과 행동의 기관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자극을 받아서 불가피하게 무너지는 것이야.
즐거움의 대상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즐거움을 주지 못해. 또한 그것을 잘못 쓰면 쉽게 상하고 곧 파괴되지. 이런 까닭으로 즐거움이 추구되는 곳에는 반드시 더 많은 고통이 생기는 거야.
문: 우리는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망치고 있습니다.
M: 물론 이기심이라는 것은 항상 파괴적이야. 욕망과 두려움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상태이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분노가 일고 분노와 함께 혐오가 생기면서 파괴의 열정이 생기는 것이야. 전쟁이라는 것도 혐오가 온갖 죽음의 도구로 무장하여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혐오일 뿐이야.
문: 그런 무서운 상태를 끝내는 길이 있습니까?
M: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알게 되면 아무리 작아 보이고 섬세한 것이라도 그 영향력이 점점 넓게 퍼져서 세계의 정서적 풍토는 더욱 따사로와지는 것이야. 사람들이 지도자를 따르고 있으니 그 지도자들 중에 위대한 마음과 정신을 지녀 이기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몇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그 영향력만으로도 지금 이 시대의 미숙함과 범죄들을 불가능케 할 거야.
새로운 황금시대가 와서 한동안 머무르다가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다시 무너지겠지. 왜냐하면 썰물이라는 것은 밀물이 제일 높을 적에 시작되는 것이니까.
문: 영원한 완벽함 같은 것은 없습니까?
M: 있어, 그런데 그 안에는 온갖 불완전함도 담겨 있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인지할 수 있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본성의 완벽함이야. 이것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을 알지 못하지.
그것은 창조와 파괴라는 두 극 사이에서 끝없는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거야. 선호하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와지면 고통의 짐을 진 마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
문: 하지만 저는 혼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들도 있습니다.
M: 만약 자네가 욕망과 두려움을 지니고 그들에게 가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야. 먼저 자기 자신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나서 타인들을 도울 생각을 하게나. 그러나 사실은 남들을 도우려는 희망조차 필요하지 않아.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냥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최대의 도움이 돼.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