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64
ㅡ 고구려 전성기 7 ㅡ
(장수왕 1)
광개토대왕은 18세나이로 보위에 올라 39세 젊은나이에 죽었다. 광개토대왕까지 그 바로 윗세대 몇 몇 고구려 왕들은 모두 단명을 했다. 그 단명을 한 방에 바꾼 왕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왕이 죽은 후에 붙여 주는 별명인 묘호를 무덤이 자리 잡은 땅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앞 편에서 정리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미천’이라는 강 옆에 무덤을 만들었기에 미천왕, ‘고국원’이란 언덕에 무덤을 썼기에 고국원왕, ‘소수림’이란 숲 속에 무덤을 써서 소수림왕이라 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장수왕'은 달랐다. 본인이 잠들어 있는 땅이름이 아니다. 워낙 오래 살아서 신하들이 묘호로 길다는 뜻의 ‘長(장)’과 목숨을 뜻하는 ‘壽(수)’를 합하여 ‘장수(長壽)’라 붙여 줬다. 98세에 세상을 떠났고 왕으로 나라를 다스린 시기만도 79년이었다.
기록만 따지자면 '장수왕'이 가장 오래 재위하고 오래 산 왕이 아니다. 고구려 6대 '태조왕'이 재위기간 93년에 119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태조왕 경우는 상식적으로 어긋난 점이 여러 곳 있어 사실로 받아 들이기에는 어렵다.
어쨌던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자 아버지처럼 스무살도 안 된 젋은 나이에 고구려 제20대 왕으로 즉위했다.
한 나라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 경우를 '고국원왕' 때 한 번 망했다 친 뒤 3대로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형제가 1세대 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다.
2세대는 고국양왕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녀 영토를 크게 넓혀 놨다.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하고 조상들이 남긴 과제들을 해결해 냈다.
이처럼 5세기 고구려는 동아시아 외교의 중심지로, 그 파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구려를 천하중심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중국본토 남북조 국가 들, 고구려 빈틈을 시시각각 찾는 백제와 신라, 가야를 사방에 두고있어 고구려가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였다.
'장수왕'은 오랜 재위기간을 통해 고구려의 이 어려운 문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 받는다.
사실 장수왕 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수왕 주요업적 중 하나는 당시 수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이전 하여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방정책만을 최우선으로 삼던 고구려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이 때 장수왕이 힘을 좀 더 내어서 삼국통일까지 이루었다면 어떡했을까?
우리나라 영토는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까?
그러나 장수왕은 그렇게까지 하지 못 했다. 평양성으로 천도후에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내전에 휩싸인 것으로 추정되기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안타갑고 아쉬운 일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이유들은 <고대사도 흐른다 36편>에서 정리해 올린 바 있다. 참고 바란다.
평양천도를 기점으로 고구려 국호는 고려(高麗)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충주고구려비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므로 '고려'라는 국호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공식적으로 굳어진 시기는 장수왕 시기로 본다. 중국 측 기록에서도 장수왕 재위 시기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소 고려시대부터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다시 보편화되어 있었다.
'삼국사기'가 좋은 예이다.
현대학계에서도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 부르고 있다. 다소 급진적인 소수 연구자들은 아예 고대 고구려와 중세 고려를 각기 '전고려', '후고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동안 한민족이 '고구려'와 '고려'로 구분해와서 별 반응은 없다.
장수왕은 오래도 살았지만 지략이 출중했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를 치러 갈 때 무작정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들어야 군사를 움직였다.
훗날 조선 이순신장군과 같은 전투유형이었다.
그 한 예로 백제와 전쟁도 그러했다.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전에 사전공작 차원에서 스파이를 먼저 보내 백제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수왕이 보낸 첩자는 '도림' 이라는 승려였다. 도림은 망명객 으로 위장하여 백제 수도에 들어 갔다. 바둑을 좋아하는 백제 개로왕에게 바둑으로 신임을 얻은 도림은 백제국력을 약화시키고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기 위한 작전에 들어 갔다. 그 작전은 백제 궁궐이 낡고 좁다며 새로운 궁궐 을 짓게 한 거였다. 도림 건의는 백제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한 고도의 술수였지만,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 '개로왕'은 그날부터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궁궐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새 궁궐은 나라 재정을 거덜 냈으며,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큰 궁궐 을 짓다 보니 민심 또한 개로왕을 떠나기 시작했다. 백제가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을 본 도림은 자기 임무를 완수했음을 확신하며 비밀리에 고구려로 돌아와 '장수왕'에게 지금이 백제를 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한다. 도림의 보고를 들은 장수왕은 막강 군사를 보내 백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백제는 고구려 군사공격에 힘없이 무너졌으며, 개로왕은 고구려군에 살해되고 말았다. ]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백제군에 살해된 원한을 갚았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하는 수 없이 웅진으로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예에서 보듯이 장수왕은 철저하고 신중한 전략적 인물 이었다.
이어서 장수왕 주요업적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