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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과 영남 선비들의 교류
황만기 ❙안동대학교 교수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字號에 담긴 청백의 삶
3. 만휴정과 영남선비들의 교류 양상 및 의미
4. 마무리
1. 들어가는 말
안동은 ‘누정의 도시’이다. 안동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누정의 수가 현저히 많다.
전국적인 분포면에 있어서 경상도 지역(1295)이 강원도(174)나 충청도(219) 지역 에 비해 월등히 많고 전라도(1070) 지역보다도 200곳이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경상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안동지역(97)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예천(79), 청송(61), 의성(57), 문경(59) 등 경상남도에 비해 경상북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1) 이러한 현상은 물줄기를 중심으로 주변에 씨족과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황지에서 발원한 황지천은 낙동강의 원줄기로 청량산을 거쳐 예안, 와룡을 지나 안동호를 형성하고 있으며, 안동호 건립 이전부터 안동지역의 젖줄이 되어 왔다. 또 청송 파천면에서 시작된 용전천은 반변천의원줄기로 길안의 길안천과 합류하여 임하를 거쳐 선어대를 지나 흘러오다가 귀래정 앞 와부탄에서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하여 하류로 흘러간다. 그리하여안동지역 정자들은 대부분 낙동강과 반변천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안동지역에 소재하는 정자들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지은 것이지만, 삼귀정‧ 애일당‧낙강정‧ 귀래정‧만휴정‧
백운정 등 15,6세기에 지은 것도 상당수 있다.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정자를 지은 배경을 들여다보면 중앙정계에서의 구속되고 억압받는 삶보다는 지방으로 내려와 은거적 삶을 향유하려는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정치적․ 정파적 갈등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자 자연경관이빼어난 산․ 강 ․ 계곡 등을 찾아 누대나 정자를 경영하게 된다. 이는 行休의 기로에서 유자가 취하는 유가의식과 관련성이 있으며 천인합일의 정신에 기초하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화를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유가의 정신에서 경영된정자는 입지조건에 따라 山亭․ 溪亭․ 江亭․ 海亭․ 池亭․ 巖亭으로 구분되고, 경영의형태에 따라 遊賞之所․ 講學之所․ 藏修之所․ 追慕之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20㎞ 정도 가면 길안면소가 나온다. 길안은 예나 지금이나안동의 관할 지역이었다. 본래 吉安部曲인데, 고려 忠惠王 때에 縣으로 승격되어조선시대 이후로는 줄곧 안동의 속현이 되었다. 길안면소에서 다시 영천방면으로6㎞정도 가다가 보면 묵계서원이 위치한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이 묵계이다. 묵계는 居默驛 혹은 居無斁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보백당 김계행이 이곳에 우거하면서 묵촌으로 개칭하였고, 앞의 냇물을 묵계라 개명함으로 인해 지금의 묵계 마을이탄생하게 되었다. 山水의 寶庫인 묵계는 굽이진 물과 긴 여울이 작은 언덕을 감아휘돌아 흐르고, 줄지은 골짝과 모인 봉우리는 원기를 감싸고 빙 둘러 지키고 있다.
묵계 개울 건너 오른편 松巖洞天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외부에서는 전혀 상상할수 없는 비경이 시야를 흥분시킨다. 특히 골짝에서 비롯된 작은 물줄기가 송암동에이르러서 힘차게 쏟아지는 송암동폭포와 1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널찍한 반타석을 배경으로 위치한 정자 하나가 의연한 자태로 자리해 있다. 이 정자가 바로 안동김씨 보백당 김계행이 건립한 晩休亭이다. 김계행은 1501년 그의 나이 71세 때 1498년에 발생한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파장에서 벗어나고자 길안 묵계의 송암동 폭포 위에 자신의 별서를 경영하기에 이른다. 만휴정은 입지조건으로는 계정, 경영의 형태로는 장수지소에 해당한다.
보백당에 관한 연구로는 김시황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생애와 유학사상」, 최은주의 「영남사림들, 보백당을 추모하다」, 그리고 박명숙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학문과 문학」 등이 있다. 이들 논문은 2013년 동양예학회에서 주관하여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동양예학 제29집에 실려 있다. 또 최은주 종가문화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보백당종가를 중심으로 계보, 묵계의 풍경, 만휴정, 묵계서원, 제례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5) 그리고 필자는 최근 만휴정의 유래와중건과정 등을 만휴정 경내에 걸려 있는 시판과 중수기문 등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분석, 고증하면서 보백당의 청백정신과 연계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논고는1790년 중수 당시의 시문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는 한계가 없지 없다. 그리하여이번 발표에서는 기존 연구의 폭을 확장하여 문집 속의 편지와 시를 추가적으로조사ㆍ분석하고, 보백당종가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고문서 가운데 만휴정과연관된 유람기나 시문, 연례시의 수창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만휴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남선비들의 교류양상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2. 字號에 담긴 청백의 삶
보백당의 생애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언급한 여러 학자들이 밝혔고, 필자 또한졸고에서 밀암의 행장과 김중청의 연보를 바탕으로 가계와 생애 전반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오늘 발표하실 정시열 교수 또한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논의를 피한다. 한 인물의 자와 호는 그의 삶과 매우 긴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다. 보백당의 자호도 그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에본장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그 속에 담긴 청백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字는 일반적으로 관례를 치르면서 스승이나 문중 또는 주변의 덕망이 높은 어른들이 지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成人이 되어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字를 쓰다가 스승을 모시거나 成家하여 자신의 위치가 성숙되면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號이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는 경우가있고, 스승이나 벗이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보백당의 字는 取斯이다. 보백당의 자에 대한 해설 즉 字說이 남아 있지 않아누가 어떤 연유로 보백당의 자를 지었는지 그 제반 사항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자가 너무 독특해서 한 번 유추해보고자 한다. 보백당의 이름은 係行이고 그의형은 係權이므로 係자 항렬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렬자는 차치하고 行에 대해서 주목해 보기로 한다. 行은 곧 행실을 의미한다. 이는 행실에 있어서 올바른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자가 지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필자가 예전 경전을 읽다가 공자가 그의 제자 宓不齊에게 언급한 말이 생각난다. 공자는 논어 「공야장」에서 그의 행실을 평하면서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그러나 노나라에 군자가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斯焉取斯]”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백당의 자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듯하다. 보백당의 자는 바로 宓不齊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복부제의 자는 子賤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복부제보다 宓子賤이 더 익숙하다. 이는 陶淵明이 이름이 陶潛이지만 도연명이라 부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자천은 어진 守令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로, 청백리의 상징으로널리 알려져 있다. 呂氏春秋 「察賢」에 “복자천이 선보(單父) 고을을 다스릴 때거문고나 타고 堂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선보기 다스려졌다. 巫馬期는 새벽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며 밤낮 쉬지 않고 몸소 일을 하여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 무마기가 그 까닭을 묻자, 복자천이 대답하기를 ‘말하자면, 나는 사람에게 맡겼고, 그대는 노력에 맡긴 것이니, 노력에 맡기면 고생스럽고 사람에게 맡기면 편안한 것이다.’하였다.”라고 하였다.
복자천은 또 ‘掣肘’ 故事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춘추시대 魯나라에서 宓子賤을선보 고을의 수령으로 삼았는데, 복자천이 왕에게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였다.
복자천은 두 사람을 시켜 곁에서 글씨 쓰는 사람의 팔꿈치를 당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글씨를 잘못 쓰면 화를 내었고 잘 쓰려고 하면 또다시 당겼다. 글씨 쓰는 사람이 돌아가 그 사실을 아뢰자, 노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복자천은 내가 그를 방해하여 善政을 베풀지 못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하고, 선보 고을에서 徵發하는일이 없도록 명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고 한다.
보백당은 복자천의 경우처럼 평생 동안 청백을 실천하였고, 지방의 수령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백당을 ‘朝鮮의 宓子賤’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본다.
다음으로 보백당의 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보백당은 그의 나이 68세 되던 1498년에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2리에 해당하는 笥堤[설못]에 살았다. 이때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寶白堂’이라 하였다. 이는 그가 일찍이 읊조린 詩에서 “우리 집엔 보물이라곤 없나니, 있다면 청백만이 보물이다.[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라고 한데서 취한 말이다. 그는 당호를 보백당이라 명명함과 동시에그의 자호로 삼은 듯하다. 그는 이곳 설못에서 조용히 거처하며 聖賢이 남긴 글을깊이 연구하며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 유유자적한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곧바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태장을 맞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그해 7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또 이듬해 2월에 다시 옥사에 나아가 고초를 당하다가 8월에는 다시 대서성과대사헌에 제수되는 등 연속되는 부침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 뒤 1500년 그의나이 70세에 환향하였다가 이듬해 3월에 묵계 별저에 우거하다가 젊은 시절 아름다운 승경에 매료된 송암동계곡에 만휴정을 경영하게 된다. 만휴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여기서는 상론을 피한다. 다만 보백당이 읊조린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의 글귀는 그의 생활철학인 동시에 사후에는 후손들의 遺誡가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만휴정 현판의 백미가 되어 만휴정을 찾는 세인들의 마음을숙연케 하고 있다.
만휴정에는 보백당이 유훈으로 남긴 시판이 하나 더 걸려 있는데, 바로 ‘持身謹愼 待人忠厚[몸가짐은 삼가고 남에겐 정성을 다하라]’이다. 이는 보백당이 81세 되던 1511년 2월에 內外 종족과 인친들이 다 모였을 때 자손들에게 남긴 경계의 메세지이다. 보백당은 홀로 있을 때나 남과 함께 있을 때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평생 表裏가 상응하고 言行이 일치하였다. 그의 이런 정신은 청백정신으로 구현되었고 이를 자손들에게 유훈으로남겼다.
보백당은 또 임종시에도 자질들에게 청백을 전하여 서로 효성스럽고 우애있게 지내며, 사후에 장례는 薄葬을 하고 미사여구의 碣銘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살아서는 청백을 실천하였고, 죽어서는 그 정신을 잇게 하려고 함이다.
響山 李晩燾(1842∼1910)의 아우 柳川 李晩煃(1845∼1920)는 그가 지은 「보백당중수기」에서 보물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보백당의 청백정신을 ‘三白精神’으로 승화하여 재해석하고 있다.
대개 일찍이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는 것에는 세 등급이 있다. 군자는 道德을 품은 것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고, 文士들은 經籍을 탐닉하는 것으로써 보물로 여기며, 衆人들은 주옥같은 보석을 보물로 여긴다. 선생과 같은 경우는
潔白으로써 마음을 다스렸고, 精白으로써 임금을 섬겼으며, 淸白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니, 시종일관 ‘白’자 한 글자를 자신의 보물로 삼았고, 또한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주는 유일한 비결로 삼았다. 선생의 보물은 文士나 衆人의 보물이 아니고 바로 도덕군자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위 인용문은 보백당이 유언으로 남긴 시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의 의미를 확대하여 재생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백당이 말한 淸白에 이미 潔白과 精白을 아우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潔白, 精白, 淸白 이른바 三白의 정신으로 세분하여 그적용 대상을 마음, 임금, 백성으로 구체화하여 서로 잘 부합케 하였던 것이다. 이는 ‘寶白無寶物 寶物惟三白’으로 환치할 수 있을 듯하다. 또 인용문에서 보백당이보물로 여겼다고 한 遺安은 龐德公이 劉表에게 말한 것으로,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 준다는 뜻이다.
방덕공이 현산(峴山) 남쪽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 하지 않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
표(劉表)가 찾아와서 “선생은 시골에서 고생하며 지내면서도 벼슬해서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려오?” 하였다. 그러자 방덕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남겨 주는데 나는 유독
편안함을 남겨 주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똑같지는 않으나, 남겨 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이만규는 또 옛날 孔翰이 顔回가 살았던 옛 골목에 顔樂亭을 지었을 때 程明道가 “땅을 차마 버려둘 수 없으며 올바른 그의 학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地不忍廢, 正學其何可忘.〕”라고 銘을 부친 것은 공한이 새로 지은 정자에 살면서 옛학문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보백당을 새롭게 중수하였으니보백당이 위치한 터를 절대 없애서는 안 되며 보백당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3. 만휴정과 영남선비들의 교류 양상 및 의미
만휴정은 1986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만휴정 주변 일대의 ‘安東 晩休亭 園林’은 2011년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어지역민을 비롯한 타지 사람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경관만 탐닉해서는 안 되고 이속에 담긴 보백당 김계행의 아름다운 정신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500년 이상의 세월이 녹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휴정 마루에 올라서서 북쪽 방향으로 보면 정해년(2007년) 봄에 南基忠이 써서 건 雙淸軒 현판이 있다. 이는 만휴정이 건립되기 전 雙淸軒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이다. 雙淸軒에 대한 궁금증은 바로 옆 안내표지판을 통해 그 대략을 가늠할 수 있다. 쌍청헌은 원래 보백당의 장인인 의령남씨 南尙致의 당호이다.
남상치의 다른 이름은 尙治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 國朝佐命原從功臣 南深의 3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南轍이고 두 딸은 金漢哲(1430~1506)15)과 寶白堂 金係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1) 文會를 통한 선비들의 교감
보백당의 청백정신이 숨어있는 만휴정은 지속적인 관리와 사랑을 받지 못한 채25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거의 폐허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750년 경에 와서 후손 金泳(1702~1784)에 의하여 중수의 희망을 갖게 된다. 보백당의 9세손인 그는 자가 游伯, 호가 黙隱齋이다. 李明杰(1890~?字 德懷)이 편찬한 嶠南樓亭詩集 에는 김영이 읊은 시가 실려 있는데, 만휴정 중건이 시작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先祖構亭地선조께서 정자 지은 터를
群賢濟濟看수많은 현인들이 바라보네
懸巖銀作瀑바위벼랑에 흰 폭포가 쏟아지고
鏟壁玉成壇절벽을 깎아 옥단을 이뤘네
高躅依依遠고상한 자취 멀리 아득하고
淸風灑灑寒맑은 바람 차갑고 시원하네
重修今日始오늘에야 중수를 시작하니
爲乞賦斯干사간 시를 지어주길 요청하네
보백당이 지었던 옛터에 만휴정을 새롭게 중수하기 위해 절벽을 깎아낸 것으로 보아 기존의 규모를 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고 공사과정이 매우 힘들었음을 엿볼수 있다. 시인은 보백당의 고상한 자취와 맑은 정신을 생각하면서 중수의 완성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마지막 구의 斯干은 시경 소아 「斯干」 편을 말하는데, 이 시는 주나라 폭군 厲王의 아들 宣王이 정치를 개혁하고 덕정을 펴서 주나라의 중흥을 이루었는데, 이때 선왕이 새 궁실이 낙성한 것을 축하한 시이다. 여기서는 金泳이 만휴정이 중수되어 축하시를 지어주길 요청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30여년 간 기초 공사에 해당하는 터만 닦아놓은 채 본격적인 건축구조 공사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임종시 유언으로 둘째 아들 金東道(1734~1794, 자 德一)에게 숙원사업인 만휴정 중수의 완성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아래 蘆厓 柳道源(1721~1791)의 시에서 자세하게 드러난다. 류도원은 본격적으로 만휴정 중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甲辰年(1784) 여름에 만휴정에 들러 함께 온 선비들과 정신적 교감을 하게 된다.
先丈藏修志선생께서 학문에 뜻을 둔 곳에
經營積有年여러 해 동안 정자를 경영하네
別區芬馥在별천지에 향기가 남아 있고
遺業裔孫傳유업이 후손에게 전해졌네
基拓三泓上세 웅덩이 가에 터를 닦아
壇成卅載前삼십 년 전에 단을 완성했네
九原千古恨저송길에 천고의 한을
分付胤郞賢18) 아들에게 분부하였네
앞에서 살펴본 김영의 시에서처럼 보백당의 유업과 정신을 잇기 위해 기초 공사를 시작한 만휴정은 터만 닦아놓은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게 된 것이다. 5구의 三泓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세찬 물줄기의 영향으로 형성된 세 개의 웅덩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백당이 처음 만휴정
을 경영하던 정신이 자신에게로 이어졌다가 자연스레 아들에게 이어지는 이른바 祖․子․ 孫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맥락을 의미한다.
다음은 南屛 鄭璞(1734~1796)의 시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정박은 의성 옥산 출생으로 자가 琢之, 본관이 八溪이다. 정박은 만휴정 중건을 주도한 金泳의 둘째 사위이자 金東道의 매부이다.19) 이 시는 그의 문집인 남병집 에도 실려 있다.
秋水添三瀑가을 물은 세 폭포에 더해지고
巖臺閱百年암대는 백 년의 세월을 겪었네
境因幽徑得경내는 오솔길을 따라 갈 수 있고
亭以哲人傳정자는 현인 때문에 전해지고 있네
人語靑山裏사람들은 청산 속에서 얘기하고
花心白露前국화가 백로 전에 활짝 피었네
風流逢竹下대나무 아래에 풍류객 만나
詩什續諸賢20) 제현들의 시편에 이어 짓네
이 시를 지은 계절적 배경은 백로(白露) 전 가을이다. 차가운 기운을 띤 가을날의 송암 폭포 물은 20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낸 정자의 늠름한 모습을 칭송하듯 말없는 아우성을 외친다. 정자로 들어가는 길은 지금처럼 다리가 놓여있지 않아서 오솔길을 통해서만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경내로 들어선 시인은 고풍스런 만휴정의 모습에서 현인 보백당의 정신을 전해 듣고 있다. 또한 함께 모인 사람들은 제각각 보백당의 청백정신을 칭송하고 국화가 백로 직전에 활짝 피어 있다. 청각과 시각의 공감각적 이미지를 교차하여 표현의 묘미를 더해준다. 또 대나무 아래에는풍류객들이 보백당의 정신을 교감하며 차운시를 읊조리고 있다.
俛庵 李㙖(1739~1810, 字 稚春)와 함께 만휴정에 가서 차운한 시로, 경내에 시판이 걸려 있으며 그의 문집에도 실려져 있다.
突兀亭新就 새로 지은 우뚝한 정자 모습
荒墟閱幾年 몇 년이나 황폐해져 있었던가
高風不可挹 고상한 풍모 만져볼 수 없으나
遺躅尙今傳 남긴 자취 지금까지 전해지네
峽坼銀河落 은하수 떨어져 골짝 트였고
門開翠屛前 푸른 바위 앞에 문이 열렸네
夤緣多勝償 비록 멋진 경치 맛보긴 했으나
拙句愧諸賢 졸렬한 시구 제현에게 부끄럽네
오랫동안 황폐화 된 만휴정을 안타까워하면서 새로 중건된 정자의 모습을 반기고 있다. 金養根은 「晩休亭重修記」에서 중수과정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몇 백 년 동안 방치된 만휴정을 金泳이 뜻을 가지고 중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히도 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에 그의 둘째 아들 金東道가 선친의 뜻을 이어 만휴
정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수한 시점과 중수절차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수 한 해는 1790년이고, 2월에 토대를 구축하고 3월 22일에 기둥을 세우고 3월 30일巳時에 상량식을 하였으며, 완성되기까지 모두 5개월이 소요되었다.
3,4구는 만휴정 주인이었던 보백당의 고상한 풍모를 만져볼 수 없어도 그가 남긴 정신적 발자취는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술회하고 있다. 제5구는 마치 李白의 「望廬山瀑布」에서 “삼천 척 높이를 곧장 내리쏟아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듯하구나.[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송암 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중국의 여산폭포에 비유하면서 하늘에서 마치 은하수가 떨어져 내렸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松巖瀑布의 세찬 물줄기는 지금까지도 보백당의 청백 기상을 대변해 주듯 잠시도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이 시판의 앞부분에 동갑내기 원장과 함께 만휴정을 유람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굉의 문집인 귀와집 에는 이 보다 분량이 많은 병서가 기록되어 있다. 시를 이해함에 있어 보다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김굉은 병서에서 김동도가 옛 터를 개척하여 만휴정을 중수하였으며, 김동도의 요청에 의해 시를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가하면 푸른 바위와 흰 반타석, 그리고 가마솥처럼 생긴 세 곳의 연못 등 만휴정 앞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극찬하고 있다. 한편 2백여 년이 지나 자손들이 조상의 업을 잘 이어받아 만휴정을 새롭게 중수한 일은 자연환경보다 더 아름다운 행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잘 조화를 이룬 만휴정이 시회를 향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임과 동시에 청백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교감의 장소임을 밝히고 있다.
2) 延諡禮를 통한 지역적 교류
만휴정에는 또 肯菴 李敦禹(1807~1884)의 시판이 걸려 있다. 이 시판은 李敦禹가 무진년(1868) 4월에 보백당의 시호를 맞이하는 延諡宴에 獻官으로 참여하였다
가 짬을 내어 만휴정을 유람한 후 東埜 金養根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延諡宴는 延諡禮라고도 하는데 宣諡와 延諡를 기념하기 위해 펼쳐지는 잔치로 공식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조선초기 이래로 관행화되어 있었다. 宣諡란 행정절차에 따라정해진 시호를 내리는 것을 말하며 賜諡라고 한다. 延諡란 내려진 시호를 후손이맞이하는 의식으로, 迎諡라고도 한다. 그런데 보백당의 시호가 내려진 시점에 대해서 李敦禹의 「보백당 신도비명」에는 계해년(1863)으로 되어 있고, 교지에는 崇禎紀元 후 4번째 무진년(1868) 4월에 시호가 내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의문은 寶白堂金先生延諡時日記 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보백당 종가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으로, 하나의 성책으로 엮어져 있다. 표지에는 ‘戊辰二月日 寶
白堂先生延諡時日記’라고 기록되어 있고, 뒷면은 여백이다. 내용이 시작되는 첫 면 첫 행에 ‘寶白堂先生延
諡時日記’라고 제목을 기록한 다음 해당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모두 9면이다. 또 2015년 4월에 동양예
학회에서 전문을 譯註하였다.
황만기 _ 만휴정과 영남 선비들의 교류
기미년(1859) 시호를 청하는 일로 인하여 本孫 金濩根이 領議政이자 原任인 鄭元容에게 시장을 청하니, 대략 운운하였다. 계해년(1863) 겨울 11월에 시호의 은전이 특별히 내려졌는데, 시호는 定獻이다. 그 註에 “순일한 행실이 어긋나지 않음이‘定’이고, 충직한 마음으로 덕에 들어감이‘獻’이다.”라고 하였다. 마땅히 달려가 延奉의 예를 행해야 하나 物力에 구속되어 그럭저럭 행하지 못하였다. 정묘년(1867) 10월에 本孫이 돈 千緡은 거둔 뒤에야 大事를 치를 수 있었다. 무진년(1868) 1월에 正謁禮를 행하였다. …중략… 2월 9일 金濩根이 상경하였다.
29일 춘향례를 행하였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보백당의 시호가 결정된 것은 1863년 11월이다. 그러나 物力에 구속되어 迎奉禮를 행하지 못하다가 4년 뒤인 1867년 10월에 가서야 本孫이 千緡의 자금을 마련하여 大事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68년 1월에 正謁禮를 행하였고 2월 9일에 金濩根(1807~1868)이 상경하여 3월 5일에 돌아온 뒤에야 延諡禮 날짜가 4월 4일이고, 禮官이 吏曹佐郎 尙州 金秉緯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金濩根은 1790년 만휴정을 중수한 김동도의 曾孫으로, 자가 致商, 호가 定菴이다.
연시를 위해서는 막대한 경비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벼슬이 없으면 연시할 수 없었다. 즉 선시는 시호를 반하하는 왕의 교서와 제문이 내려지는 행사였기 때문에관복을 입지 않고는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런 제약 때문에 시호가 결정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연시하지 못하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연시하지 못해 한을 품고 죽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후손들이 연시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연시를 하지 못하면 시호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돈우는 시판 서문에서 당시 金孟實, 金士行, 柳季好와 함께 만휴정에 찾아갔다
시호는 여러 가지 절차에 따라 정하게 된다. 이때 한 가지만 올리는 것이 아니고, 세 가지를 올려서 그 중
에 하나를 낙점 받게 된다. 東國諡號 에 그 세 가지 시호가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首望은 낙점
받은 定獻이고, 副望은 靖敏(寬樂令終曰靖, 好古不怠曰敏), 三望은 景敏(由義而濟曰景, 應事有功曰敏)이다.
및 金光壽와 함께 만휴정에 가서 반나절 유상하고 판상 시에 차운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또 延諡宴이 거행되던 당일에는 金養範(字 士鍊)과 함께 公事員의 임무를 맡았다. 김진림은 자가 士恒, 호가 浪坡, 본관이 의성이다. 생부는 東園 金羲壽이고, 詩集이 있다.士行은 그의 별자가 아닌가 한다.
또 김광수의 문집인 龜陰集 에는 그가 1868년에 玉汝晦(字 舜如)에게 답장한 편지에서 만휴정을 유람한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 만휴정 유람에 대한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그는 당시 스스로 절구 세 수를 짓고, 金養範(1802~1879, 本 安東, 字 士鍊, 號 萬同)과 柳致好 등 대여섯 명도 자신의 시에 화운하여 하나의 시축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山中故事의 대비하고자 의도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보의 시구 ‘慷慨嗣眞作 咨嗟玉山桂’와 같은 시구는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말과 함께 유람하지 못한 아쉬운 속내를 전하였다.34)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당시 都都廳의임무를 맡은 玉汝晦는 병 때문에 묵계서원에서 거행한 延諡禮에 참석하지 못하여 자연스레 만휴정 유람도 함께 할 수 없었다 먼저 이돈우의 차운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晩生天地東늦게야 영남 땅에 태어나서
西望漑鬵釜도성 바라보며 가마솥 씻으려 했네
夫子當明運선생께서 명운의 시대를 만났으나
家中何所有집안에 소유한 바 그 무엇이던가
1,2구는 비록 구석진 영남 땅에 태어났지만 조정에 출사하여 나라를 부지하고픈 포부를 지녔음을 의미한다. 특히 2구의 ‘漑釜鬵’는 나라를 부지할 재상을 후원하고 싶다는 말로, 시경 「匪風」에 “물고기를 쪄먹을 이 누군지, 있다면야 내가 가마솥 닦을래. 그 누가 주(周)나라로 돌아갈 이 있다면, 진정 좋은 말 일러 주리.〔誰能亨魚? 漑之釜鬵. 誰將西歸? 懷之好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구의 명운은 밝은 시대로, 곧 성종대를 말하는 듯하다. 보백당은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ㆍ대사헌ㆍ이조참의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렇지만 벼슬살이를 통한 부를 누리지 않고 청렴결백만을 일삼으며 임종시에 자손들에게 오직 淸白만을 보물로 여길 것을 당부하였다. 두 번째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雲飛金鶴遠구름 날려 금학산이 아득하고
雷吟玉龍大천둥이 울리듯 냇물이 유장하네
盤石可安身몸을 편안히 할 수 있는 반석은
休官晩退坐만년에 벼슬 그만두고 물러난 곳
金鶴山은 만휴정 남쪽에 있는 주산이다. 금학산 봉우리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형상화하였고, 2구는 만휴정 앞을 흐르는 거센 시냇물 소리를 천둥소리에 견주었다. 1구의 시각적 이미지와 2구의 청각적 이미지가 한데 어울러져 시너지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3,4구에서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반타석은 옛날 보백당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던 곳임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수이다.
淸白遺雲仍후손에겐 청백정신 남기었고
翠微起榭亭푸른 산엔 정자가 우뚝하네
欲言今日事지금의 일을 말하고 싶으나
洪造窅難形크나큰 은혜 형용하기 어렵네
산중턱에 우뚝 솟은 정자에는 청백의 정신을 남겨준 보백당의 청백정신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항구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보백당의 시호를 맞이하기 위해 500명 이상의 유림들이 묵계서원에 모여 연시례를 거행하려는 순간이다. 시인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임금의 커다란 은혜에 감읍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延諡宴 행사는 단순히 정헌의 시호가 적힌 교지 하나를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호를 얻기 위해서는 시장을 올려 왕의 재가를 얻을 때까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가 숨어 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부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호를 받는 연시연은 가문의 자랑이자 지역의 자부심이며 영남의 대경사인 것이다. 더군다나 헌관의 임무를 띤 시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된 일이다.
다음은 이때 함께 했던 龜陰 金光壽(1801~1871, 자 맹실)가 차운한 마지막 시만 살펴보기로 한다.
憶昔中條隱예전 중조의 은자를 생각하니
架巖結此亭바위 위에 이 정자를 지었네
淸風何處在청풍의 정신은 어느 곳에 있는가
山水露奇形36) 산수가 기이한 형상 드러내네
中條의 은자는 당나라 때의 시인 司空圖를 말한다. 그는 만년에 벼슬을 사퇴하고 中條山 王官谷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면서 그 정자를 休休亭이라 일컬었다. 휴휴정은 만휴정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1,2구에서 이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사공도가 지은 휴휴정에는 주변 경관만 빼어날 뿐 만휴정처럼 청백의 정신은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인은 만휴정이 가지는 독특하고 특별한 점을 짧은 시구에 담아 만휴정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만 매몰되지 말고 만휴정에 담긴 인문정신을 함께 향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김광수는 만휴정을 스트레스를 치유할
수 있는 치유의 장소이자 명상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3) 修稧를 통한 화합의 장
1728년 무신란 이후 안동지역 재지사족들은 중앙정계에서 입지조건이 위축되었다. 이러한 위기감은 안동지역 재지사족들의 결속과 유기적 단결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속과 단결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儒契나 修契의 결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1868년에서 영남지역 사림들이 모인 연시례에 참여한 일원 중에 일부가 만휴정 유람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들 시회에 이어서 16년 뒤에는 이곳 만휴정에서 修稧가 있었다. 修契는 이른바 在地士族들 간에 契를 만들어 보백당의 정신을 공유하자는 것으로 이는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연간 한두 차례 정기적 모임을 통하여 시를 읊거나 담소를 나누면서 문중의 대소사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肯菴 李敦禹(1807~1884)의 「晩休亭修稧序」가 고문서의 형태로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16년 뒤 계미년에 마침 일 때문에 다시 山門을 지나게 되었다. 季父를 모시고 同人 上舍 金幼用과 友人 金德祖와 함께 또 다시 이곳에 올랐다. 산이 더욱높고 물이 더욱 맑았으며 세 폭포가 연못을 이루어 구비마다 더욱 기이하였다.
재지사족간의 결속이 아닌 갈등적 요소가 발생하였는데, 太師廟에서 모셔진 金宣平과 權幸의 위차를 둘러싼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서의 시비 갈등,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을 추배하려고 할 때 기 배향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차문제로 두고 불거진 병호시비 등이 그것이다.
정자가 그 위에 있었는데 새가 놀라 날개를 펼치는 듯하고 꿩이 날아가는 것같아 예전의 유람이 제대로 된 유람이 아니고 우리 고을의 제일의 산수임을 알았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다만 院宇가 무너져 菟葵燕麥의 장이 되었고, 정자도 인가에서 멀리 텅 빈 골짝에 위치해 있는 탓에 관리할 사람이 없어 棟宇가 제모습을 잃었다. 이것은 자손들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 士林의 책임이다. 동지와 여러 명류들이 서로 논의하여 각자 10文의 돈을 부당하기로 하는 수계의 안을 마련하였다. 또한 원근의 뜻을 함께 하는 자들에게 알려 속속 끌어들여 해마다 자산을 불려 이 정자를 보호할 바탕으로 삼았다. 모두가 “서문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며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빨리 글을 지어 山中故事를갖출 따름이다. 계미년 7월 28일 한산 李敦禹가 쓰다.
이 서문은 이돈우가 1883년 7월 28일에 지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1868년 4월에 거행된 연시연에 헌관의 자격으로 묵계서원에 왔다가 만휴정을 유람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16년 뒤인 1883년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유람이 그에게 있어 두 번째의 유람인 셈이다. 그는 77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季父 李秀憼을 모시고 上舍 金驥善(1806~1883)과 友人 李憲裕와 함께 만휴정을 올라 이곳의 승경을 만끽한 다음 만휴정을 유지보수하는 목적으로 각자 10文의 돈을 추렴키로 修稧를 하였다.
함께 한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李秀憼은 대산 이상정의 증손자이고 俛齋 李秉運의 셋째 아들로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김기선은 자가 幼用, 호가 沂墅, 본관이 안동이다. 의성 점곡 사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金養植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 金坤壽의 딸이다. 이헌유는 字가 德祖이다.
이돈우는 기이하고 기이한 만휴정이 안동지역의 가장 멋진 자연환경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부서지고 훼손된 만휴정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자손들만의 걱정일 뿐만 아니라 안동 사림 전체의 책임이기 때문에 뜻이 맞는 여러 名流들과 함께 만휴정을 보수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만휴정을 보수하기 위한 모임이지만 이곳이 계모임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향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한 모임이기도 한 것이다. 한산이씨와 의성김씨, 그리고 안동김씨(선김) 와의 만남이다. 이는 만휴정이 타 가문과의 통섭적 기능을 열어줌과 동시에 향후 폭넓은 교류를 위한 네트워크 형성의 구심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돈우의 수계에서는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수계에 芝廬 金常壽(1819~1906)40), 鵝山 柳潤文(1824~1893)41), 柳建鎬 등도 함께 하였음을 알 수있다. 김상수의 자는 季恒, 호는 芝廬, 본관은 의성이다. 金宏運의 아들로 金岱鎭의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천전 출신 直谷 金敬植(1829~1905)이 만휴정수계시축에 차운한 시가 있는데,42) 아마 이때 지은 시가 아닌가 한다. 김경식은 자가 仲直, 별호가 雲樵, 牧林居士이고, 본관은 의성이다.
4) 추모 공간으로 활용
金聲根(1835∼1919, 字 仲遠, 號 海士)은 임인년(1902) 重陽節에 族曾孫 金澤鎭(1875~1924, 字 箕八)과 함께 만휴정에 들렀다. 그가 지은 「晩休亭記」를 살펴보기로 한다.
생각건대 나의 傍祖 보백당 선생은 학술과 덕망으로 成宗朝에 급제하여司諫院․ 司憲府․ 弘文館․ 承政院․ 成均館․ 吏曹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이것은벼슬에 나아갈 만해서 행한 것이다. 直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위태로운 환란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여 猿鶴을 벗 삼고 자연을 즐기며 性理書를 연구하며 壽福을 유지한 것은 물러날 만해서 물러난 것이다. 그 早晩의 행적은 실로 時義에 합치된다.
위 기문은 누정기에 속한다. 누정기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누대와 주거에 관한 것이다. 누대에 대한 기문은 주변승경의 묘사와 현실의 번다함을떠난 공간에서의 정신적인 휴식의 감회를 적은 글이다. 누정은 거의 산천의 전망이좋은 승경에 자리하고 있는데 향유층은 주로 사대부로서 관리나 시인 묵객들이다.
이들은 누정에서 유흥을 즐기고, 자연풍광을 감상하면서 심신을 수양하며, 시문으로 교유하였다. 따라서 작자는 주변 경관의 묘사와 유흥의 즐거움을 기술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누정기는 記事, 寫境, 議論의 요소를 갖추게 된다. 記事는 건물의위치와 소요된 경비와 시간 등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寫境은 건물 주변의 산수 경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고, 의론은 건물이 짓게 된 경위와 명칭과 관련된 논설이다. 위의 형식에 비추어보더라도 일반적인 기문은 먼저 해당 정자의자연적 요인 및 건립연도와 건립배경 등을 서술하고 나서 정자를 건립한 인물에 대해서 다루는 이른바 先景後人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문은 의론에 해당되는 보백당의 인물됨에 대해서 먼저 기술한 다음 정자의 소박한 모습에 대해서 다루는 先人後景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기문 서두에 와야 할 배경 등의 記事 부분이 기문 말미에 위치해 있는 점 등은 일반적 누정기의 글쓰기 방식을 벗어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永嘉(안동)의 黙溪는 일찍이 내가 오가면서 노닐고 완상하던 곳인데 한 오묘한 곳에 위치한 정자가 松巖洞壑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이 정자는 보백당께서 辛酉年(1501) 이후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정자를 지어 이름 붙인 것
이다. 왼쪽에는 雙淸軒이 있는데 편액의 글씨가 아직도 청신하다. 앞쪽에는淸德祠가 있는데 후인들이 경모하는 곳이다. 오늘 이 정자에 오르니 시내골짝의 초목들이 여전히 精彩를 발산하고 있으며, 높은 소나무와 바람소리는
百世의 淸風을 우러러볼 만하고, 폭포와 웅덩이는 實學의 淵源을 상상할 만하다.
아! 晉公의 綠野堂과 贊公의 平泉莊은 모두 將相의 부귀함을 지극히 드러내었고 그들의 退居는 생걱컨대 사치하고 화려했을 것이니, 어찌 이 정자에서 휴식하던 날에 넉넉하고 다하지 않는 벼슬과 녹봉을 버리고서 그윽하고
상쾌한 곳을 취하여 청백을 지키던 것과 같겠는가? 간혹 정자가 흥성하고 폐치되는 운수가 있더라도 후손들은 떠받들고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
김성근은 보백당이 신유년(1501) 이후로 노년에 휴식을 취할 계획으로 만휴정을 짓게 되었으며, 만휴정의 전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왼쪽에는 쌍청헌이 있고 앞쪽에는 청덕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청덕사이다. 淸德祠는 默溪書院 사당의 명칭이다. 주지하다시피 묵계서원은 안동시길안면 묵계리 705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706년(숙종 32) 士林들이 寶白堂과 凝溪 玉沽(1382~1436)를 봉향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1687년 書堂에서 시작하여 1696년 精舍로 되었다가 1706년에 사당인 淸德祠 편액을 걸게되었고, 명칭을 묵계서원으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12년에 재와 루, 주사 및 문과 담장이 모두 완성이 되었는데, 누는 挹淸樓, 재는 克己齋, 당은 立敎堂,문은 進德門이다. 이로부터 서원으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8년 봄에 현 보백당 종손이신 김주현 전 교육감의 정성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옆에는 최근에 건립된 보백당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김성근의 언급을 바탕으로 상황을 유추해보면 1871년 묵계서원이 훼철됨으로 인해 1895년에 제사기능을 제외한 교육의 기능만을 담당하는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보백당을 추모하는 별도의 장소가 필요했던 탓으로 청덕사 편액을 만휴정으로 옮겨 사당의 기능을 겸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위패를 모신 작은 사당을 새로 건립한 것인지, 만휴정 내의 방 한 칸을 활용하여 사당으로 사용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이와 관련한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리라 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묵계서원이 복원되기 전까지는 만휴정이 수양과 학문공간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제사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성근은 또 晉公의 綠野堂47)이나 贊皇의 平泉莊48)과 같은 호화스럽고 사치한 정자보다는 보백당이 벼슬에서 물러나 청백의 정신을 지키며 노년을 보낸 만휴정이 훨씬 더 좋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보백당의 청백정신이 서려있는 만휴정을 경건하게 보호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
5) 영남선비들의 시회
臨川을 유람한 지 40일이 되었는데, 蘭圃 金敬立49)이 편지를 보내어 만휴정을 유람하자고 하였다. 정자는 그의 선조 보백당이 만년에 퇴휴한 곳이다.
雙澗(金益洛) ․ 晴坡(金振玉) 두 노인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梧山에 도착하니비가 내려 金厚若(金鎭堉, 1853~?)의 처소에 묵었다. 다음날 厚若과 함께 저녁 안개를 뚫고 仙塘에 도착하니 敬立이 웃으면서 맞아주었다. 杜陵에 사는
鄭德三(鄭源達, 1853~1924)이 소식을 듣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雲下(金九淵)도 와서 함께 묵계서원에서 묵었다. 황량하고 폐허가 된 오랜 계단은兎葵와 燕麥의 감정50)을 견딜 수 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니 李東洲(李中燮,1875~1915, 자 舜佐)가 斗巖에서 뒤따라 와서 서로 손을 잡고 만휴정으로 들어갔다.
위 인용문은 石塢 權秉燮(1854~1939)이 지은 만휴정 유람기이다. 서두에서 권병섭은 臨川을 유람한지 40일 만에 다시 만휴정을 유람하였다고 하였다. 임천은白雲亭 아래 釜淵 일대를 말한다. 권병섭의 문집 석오집 에는 이 유람기 바로 앞에 「臨川舟遊記」가 실려 있다. 이 유람기 첫머리에 임자년(1912) 7월 16일(음력)
47) 晉公은 唐나라 憲宗 때의 賢相인 裴度를 말하고, 綠野堂은 그가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배도는 헌종 연간에 都元帥로서 五元濟가 일으킨 淮西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晉國公에 봉해지고 벼슬이 中書令에 이르렀는데, 여러번 물러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만년에 은퇴하여 洛陽에 綠野堂을 지어 놓고 白居易, 劉禹錫 등과 함께 밤낮으로 詩酒를 즐기면서 세상의 일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48) 贊皇은 唐나라 때 贊皇伯에 봉해진 李德裕를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河南 洛陽縣 남쪽에 평천장을 세웠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仙境과도 같았다 한다.
49) 김경립(金敬立) : 김학규(金學圭, 1852~1929)를 말한다. 본관은 안동, 호는 난파이다. 문집이 있다.
50) 토규(兎葵)와 연맥(燕麥) : 야맥(野麥)과 야초(野草)로, 가슴 아픈 황량한 정경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재유현도관(再遊玄都觀)〉절구 해설에 “지금 14년 만에 다시 주객낭중이 되어 거듭 현도를 거닐어 보니, 옛날 도사가 심었다는 선도 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고,오직 토규와 연맥만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今十有四年, 復爲主客郎中, 重遊玄都觀, 蕩然
無復一樹, 爲兔葵燕麥動搖於春風耳.〕”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 蘇東坡가 적벽 일대에서 뱃놀이 한 고사를 모방하여 임천에서의 뱃놀이를 약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2) 7월 16일로부터 40일 뒤는 8월 26일(음력)이 된다. 이것이 권병섭 일행이 만휴정을 유람한 시기이다. 권병섭이 만휴정을 유람하게 된 계기는 만휴정 주인인 蘭圃 金學圭(1852~1929)가 편지를 보내어 유람을 청했기 때문이다. 함께 유람한 이들은 약 11명 정도 되는데 성에 자를 붙인 경우, 성에 호를 붙인 경우, 자만 쓰거나 호만 쓴 경우, 실명을 쓴 경우 등 다양하다.
정자는 黃鶴山 북쪽 자락의 폭포 위에 있었다. 시냇물은 산 아래에서부터 모든 돌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모두 희고 매끄러운 돌이었으며, 끊어진 곳에는 흰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정자 아래에 (물이) 이른 뒤에 양쪽 기슭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 門을 이루었다. 물이 바위 위로 흘러 내리다가 이곳에 이르러 문과 다투다가 급히 떨어져 성내고 노한 기세로 눈처럼 흰 폭포를 이루었다. 그 아래에는 커다란 솥 모양처럼 생긴 웅덩이가 검푸르면서도 깨끗하였다. 이러한 기세로 연달아 두 웅덩이가 이루어져 있는데 깊이와 넓이는 위의 것에 비해 조금 모자란다. 오랜 가뭄으로 폭포가 장엄하지 못했으나 장마 때가 되면 반드시 커다란 물소리를 내며 기이한 불거리가 될것이다. 서로 함께 堂에서 술을 마시노라니 국화가 반쯤 피었고 단풍도 들기 시작하여 조금 붉었으며 숲속의 새들은 사람을 향해 재잘거렸다.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정자와 주방이 제법 멀어 음식을 운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바야흐로 음식을 내오는 사람들이 적어서 힘센 하인을 뽑아 음식을 머리에 이고 술병 하나씩 들고 오도록 하고서는 서로 함께 그 자리에서 술과 음식을 먹었다. 밤에 율시 한 수씩을 짓고 술도 몇 순배 마셨다.
본론 부분에서는 만휴정 주변 경관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오랜 가뭄 때문에 폭포의 장관을 보지 못한 속내는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중추절을 막 지낸 터라 국화가 피고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여기에 숲속에서는 새들이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시인은 자연이 주는 선물에 도치되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있다.
권병섭은 저녁에 율시 한 수씩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문의 특성상 이때 지은 시를 따로 부기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필자가 보백당 종가에서 기탁한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때 지은 詩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축의 제목은 「晩休亭雅集」이라 되어 있고, 칠언율시이기 때문에 압운자 5자(陽長香蒼觴)를 제목 옆에 행을 달리하여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함께 유람한 이들이 읊은 시를 순서대로 기록해 놓고 있다.55) 일행은 모두 11명으로, 7언율시 한 수씩을 지었다.
이 가운데 만휴정 유람을 초청한 난포 김학규와 초청을 받은 석오 권병섭의 시만 감상하기로 한다.
仙鶴迢迢下夕陽저 멀리 선학이 석양에 내려오니
秋天復見日舒長가을에 해가 다시 길어져 보이네
丹楓葉落靑山瘦단풍잎이 떨어져서 푸른 산이 앙상하고
黃菊花開白酒香국화꽃이 피어서 막걸리가 향기롭네
泉石傳家淸且素집안에 전해지는 천석은 맑고도 희며
衣冠閱世老而蒼세월 겪은 의관은 오래되어 창연하네
先亭瀟灑群賢集先祖의 쇄락한 정자에 여러 현인 모여서
雲樹深情曲水觴56) 벗에 대한 깊은 정에 잔을 띄워 마시네
위 시는 보백당의 15대손인 蘭圃 金學圭가 지은 것이다. 7언율시의 정격으로 앞의 네 구는 경치와 문물을 묘사하였고, 뒤의 네 구는 작자의 정감을 담았다.
먼저首聯(1,2구)의 묘사가 빼어나다. 시간적 배경은 저녁 무렵이고 계절적 배경은 가을55) 기록의 원칙은 시를 먼저 기록하고 그 시가 끝나는 부분 아래쪽에 시를 지은 사람의 호나 이름을 기록해 두고 있다. 시는 晩啞, 東洲, 雲下, 素啞, 蘭圃, 石塢, 雙澗, 晴坡, 薇樵, 權秉博 순이고, 마지막에 작자를 기록하지 않은 시가 한 수 더 있다. 이들의 이름을 확인해보니 金衡圭?, 李中燮(1875~1915, 자 舜佐), 金九
淵, 權泰泳(1879~1946), 金學圭, 權秉燮, 金益洛, 金振玉, 金在顯, 權秉博(1871~1948), 未詳이다.
이다. 가을은 해가 점차 짧아지는 시점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인은 석양 무렵에 내려앉는 학의 밝은 색채로 인해 가을 하늘의 해가 조금 길어져 보인다고 하였다. 시야에 들어온 순간적 이미지를 놓치고 않고 센스 있는 기치로 담아내어 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함련(3,4구)에서는 단풍잎이 떨어지는 산의 모습과 국화꽃을 바라보며 막걸리 마시는 전경을 묘사하고 있다. 경련(5,6구)에서는 색채의 대비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면서도 淸과 素의 시어를 통해 천석의 모습뿐만 아니라 보백당의 청백 정신과 검소한 생활을 함께 담아내는 중의적 표현법을 쓰고 있으며,오랜 세월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해온 문물의 고색찬연함을 길이 기리고 있다. 마지막 미련(7,8구)에서는 여러 벗들과 함께 先祖 보백당이 지은 정자에서 飮酒吟風하며 보백당의 높은 학덕과 청백의 정신을 떠올리고 있다.
다음은 초대받은 석오 권병섭이 읊은 시이다.
名亭瀟灑枕山陽 산 남쪽에 위치한 깨끗하고 이름난 정자
懶客西風景慕長지친 길손이 서풍 맞으며 길이 경모하네
末路洽成仙界會노년에 선계의 모임을 원만하게 이루어
秀童剩帶古田香동자들도 예전의 향기를 넉넉히 맛보네
溪巖噴瀑千年白시내 바위에 천년토록 흰 폭포가 쏟아지고
林岫留雲八月蒼산의 숲에 팔월의 푸른 구름이 머무네
衰暮風流天一借하늘이 노년에 풍류를 한 번 빌려주어
白頭相笑更傳觴57) 백발노인들이 서로 웃다가 술을 마시네
권병섭은 김학규의 선경후정의 표현법과는 상반되게 선정후경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2구에서는 8월 26일 저녁 바람을 맞으며 만휴정에 올라 보백당의 정신을 길이 경모하고 있다. 3,4구에서는 노년에 이룬 선계의 모임을 이루었음을 흡족해하고 있다. 이는 만휴정에서의 모임을 통해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보백당의 정신을 함께 공유하고 호흡하며 교류의 폭을 확대해갔음을 의미한다. 5,6구의 대구가매우 일품이다. 특히 5구의 표현법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은 바위 위를 흐르는 세찬 물줄기의 순행적인 모습을 마치 바위가 물거품을 내뿜는 것처럼 역발상적인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것도 순간적이지 않고 천 년 이상의 지속적인 자연현상을 시적 감흥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는 바로 보백당의 청백정신이 쉼없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노년에서나마 젊은이들과 정신적 교감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학진흥원에 기탁된 보백당종가 고문서에는 만휴정 시축이 몇 종류더 있는데, 20여명의 선비들이 참여한 시회가 있었고 심지어 56여명이 넘는 선비들이 시회를 연 경우도 있었다.
4. 마무리
만휴정은 안동지역 정자의 백미이다. 배산임수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백이라는 정신문화의 가치를 지닌 채 시대적 변천을 통하여 특정한 기능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변모되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위에서 살펴보듯이 만휴정은 門會, 契會, 延諡禮, 詩會, 追慕의 공간임과 동시에 영남 사인들의 교류의 폭을 넓혀가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宗會, 洞會를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청의 각종 행사 장소, 교유 집단의 형성 근원지, 題詠을 통한 문학적 교감의 장소 등으로도 그 기능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1790년에 만휴정이 중건된 이후로 이곳을 찾은 名儒巨公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만휴정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담아내었다. 이러한 현상은 1868년, 1883년, 1902년, 1912년에 걸쳐 지속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면상에 다 담아내지는 못했으나 1912년 이후에도 시회를 통한 교류는 보백당 가문을 넘어선 타 가문 타 지역 더 나아가 영남전체로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여타의 정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하나의 정자라는 매개체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그 속에 담긴 정신을 경모한다는 것은 정자로서의 단순한기능을 넘어선 정신적 헤게모니가 더 큰 작용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시너지효과는 만휴정이 가지는 특징점으로, 향후 만휴정 뿐만 아니라 여타 누정 연구에있어서 試論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 2004년에 안동지역 유림들이 청백리인 응계 옥고와 보백당 김계행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淸芬稧를 입안하였다. 이는 비록 만휴정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정신적 맥락을 잇는다는 의미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는 35명이 수계를 하였으나 점차 인원이 늘어나 2007년 88명으로 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보백당의 淸白사상은 안동김씨가 家傳해야 할 교훈이요, 안동시민이 繼承해야 할 정신이요, 대한민국이 守護해야 할 문화이다.
■ 참고문헌
1. 원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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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荇, 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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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성씨별 구성인원을 살펴보면 안동 김씨가 30인으로 가장 많으며, 이어 광산 김씨 7인, 의성 김씨 6인, 전
주 류씨 5인이다. 그리고 순흥 안씨․재령 이씨․진성 이씨 각각 4인이고, 고성 이씨․안동 권씨․의령 옥씨․풍산
류씨가 각각 3인이다.
74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2. 족보자료
義城金氏保功公派譜所, 義城金氏保功公派譜 全 1987.
南氏大宗會, 南氏大同譜 , 回想社, 1993.
安東金氏大同譜委員會, 安東金氏世譜 , 回想社, 1982.
眞城李氏大宗會, 眞城李氏世譜 , 1991.
3. 고문서
金聲根, 「晩休亭記」
李敦禹, 「晩休亭修稧序」,
李晩煃, 「寶白堂重修記」
未詳, 寶白堂金先生延諡時日記
未詳, 「晩休亭雅集」
4. 논문 및 저서
권정원, 「字號를 통해 살펴본 李德懋의 삶의 지향」, 東洋漢文學硏究 第26輯, 동양한문학
회, 2008.
김시황,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생애와 유학사상」,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학회, 2013.
김학수,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증시(贈諡) 행정」, 고문서연구 23, 2003.
박명숙,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학문과 문학」,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학회, 2013.
오용원, 「안동지방 누정문학 연구」, 어문학 제83집, 한국어문학회, 2004.
이병주, 「성호 이익의 기문 연구」, 동양문화연구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4.
이종호, 「낙동강 상류의 누정풍류」,
최은주, 「영남사림들, 보백당을 추모하다」, 동양예학 제29집, 동양예학회, 2013.
최은주,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의 종가 , 예문서원, 2013.
황만기, 「청백정신이 피어나는 만휴정」, 퇴계학 23집,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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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2018년 3월에
안동 대학교 황 만기 교수가 쓴 글을 옮긴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