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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리, 교리적 주석
칼빈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 비추어
1. 들어가는 말: 축자적, 신앙의 유비
성경의 권위(autoritas)와 자기가신성(auvtopistij)은 그 저자 (autor)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순환성”이 단지 억측이나 헛된 논변에 불과하지 않음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 재하시고, 스스로 계시하시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 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신학 혹은 계시의 존재의 원리 (principium essendi)로서 개진하였다. 스스로 존재하는 진리 곧 계 시에 대한 확신은 구원의 은총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 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한 마디( 節)의 성역을 뒤로하고 새 마디의 음조를 짚어 가시는 이환봉 교수님 이 강단에서 남긴 과묵한 사자후, 그 요체가 여기에 있다.1)
성경은 규범하는 규범(norma normans)이며 교리는 성경에 의해 서 규범된 규범(norma normata Scriptura)이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신앙고백의 형태로 진술한 명제이다. 교리는 그것이 참인 이상 성경에 속한다. 성경은 참 교리에 의해서 그 고백적 가르침 이 명제적으로 진술된다. 주석은 성경을 풀어 참 교리를 조명하는 것 이다. 이렇듯 성경의 참 교리를 풀어서 조명하는 것을 ‘교리적 주석’ 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칼케돈신경에 의해서 수립된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 적 연합에 따른 신성과 신성의 속성교통(koinwni,a ivdiwma,twn, communicatio idiomatum)을 다루면서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그 것이 위격 안에서(in), 위격을 통하여(through), 위격에로(unto) 간 접적으로(indirecte)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이 직접적으 로(directe) 교통한다고 본 루터란 정통주의와 대척점에 섰다.
칼케 돈신경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만이 구체(具體, concretum)로 서 기체(suppositum)가 되며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natura)은 추 상(抽象, abstractum)으로서 실체(substantia)가 될 뿐 자체로 기 체는 될 수 없다고 보았다.2) 그리하여 “한 동일하신 분(e[na kai. to.n auvto.n, unum eundemque)”이 “신성에 따라서 성부와 동 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며,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죄는 없으시며, 실로 창세전에 신성 에 따라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후일에 동일하신 분이 우리와 우 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 에게서 나셨으며”라고 천명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신성에 따라서 (kata. th,n qeo,thta, secundum deitatem)”와 “인성에 따라서 (kata. th.n avnqrwpo,thta, secundum humanitatem)”는 위격 적 연합 가운데 있는 양성의 속성교통의 방식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표현으로서 본성은 위격 안에 있으나(evnupo,stasij, enhypostasis) 위격은 아니라는(avnupo,stasij, anhypostasis) 정통기독론적 관점 을 견지하고 있다.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각각의 본성에 따른 속성들이 모두 한 인 격에 돌려진다는 점에서만 속성교통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위격 안 에서, 위격을 통하여, 위격에로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교통 을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른 축자적 교통(communicatio verbalis) 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단지(tantum)” 하나의 언술 방식(modus loquendi)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realiter) 일어나는 것 으로 다루어졌다. 이는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그러나 실 제적 현존(praesentia spiritualis sed realis)”을 말한 칼빈의 성례 론에 부합한다. 여기에서 “영적”이라 함은, 인성에 따라서는 어느 곳 에 계시는 한 분 동일하신 주님이 신성에 따라서 모든 곳에 계신다 는 축자적 교통의 비밀(musth,rion)을 함의하고 있다. 성례의 비밀 (sacramentum)은 한 분 그리스도께 인성에 따른 localitas와 신성 에 따른 ubiquitas를 모두 돌릴 때, 온전히 작용한다.
루터는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질 경우 그것들을 묶는 모종의 개념을 상정해서 제 3의 길로 이해하려고 드는 경향을 보였다. 후기 루터에 있어서는 이러한 입장이 철회되지만 그 의 제자들은 오히려 스승의 초기 입장을 강화해서 일치신조(Forma Concordiae)에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성으로써 모든 곳에 현존 하신다는 인성의 편재(遍在)를 거론하는데 까지 이르고 있다.
그들은 이를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충실한 루터의 입장이라고 말 하고 있지만 이는 오히려 그것에 역행된다.3)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 빈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듯한 신성과 인성의 모든 속성 들을 한 인격에 속한 것으로 보아 축자적으로 서술하는 가운데서 그 비밀을 오히려 부각시키고자 한다. 루터는 축자적인 것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지만, 칼빈은 축자적인 것이야말로 실제 적이라고 여긴다.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자적, 역사적, 영적이 라고 회자된다. 문자적이나 영적이기 때문에 유대문자주의를 넘어서 고, 영적이나 문자적이기 때문에 풍유적 해석이 아니라 신학적 해석 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 해석은 문자적-영적 해석을 전제한다. 그 때 에만 역사비평주의를 넘어서게 된다. 본고에서는 칼빈이 개진한 중보 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가 그의 성경주석에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고찰함으로 이러한 점을 일고하고자 한다.
2.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과 소위 초(超)칼빈주의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
소위 초칼빈주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루터란들의 성찬 교리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생겨난 개념이다. 루터란들은 칼빈의 성찬 교리 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육체적인 임재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 신들의 속성교통에 관한 이론과 배치(背馳)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였다. 그런데 칼빈을 잇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이름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 는 칼빈신학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오히려 영예로운 호칭이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소위(the so-called)”라는 말을 그 앞에 붙여 자 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4) 소위 초칼빈주 의는 칼빈이 성찬 교리뿐만 아니라 승천 후에도 계속되는 그리스도 의 양성적 중보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거 하시는 자리를 떠나시지 아니하시고도 순전히 초(超)육체적인(etiam extra carnem) 방법으로 영적 그러나 실제적인 현존(praesentia spiritualis sed realis)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미친다. 이는 그 리스도의 현존은 언제나 전적이나 전체적으로 그리하지는 않는다는 (totus ubique sed non totum, the presence of the whole Christ but not wholly) 원리에 기반한다.5)
칼빈의 다음 말이 소위 초칼빈주의의 전형으로 자주 회자된다. 위 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의 교리적 핵심이 여기에 있다. 이는 다음 과 같은 논법을 취한다. ‘신성에 따라서는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므로 옮겨 다니실 수 없는 분이 인성에 따라서 내려오셨으므로, 그 분은 떠 나지 아니하시고 내려오셨다.’ 이는 철학적 혹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 라 신앙의 유비에 따라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축자적 진술 (praedicatio verbalis)이다.
무한한 본질의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고 해서 우 리는 그가 그 속에 갇혀 계신다고 공상하지 않는다. 놀랍도다, 하나님의 아들 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도다! 놀랍도다, 그가 처녀의 태중에 계셨으며, 지상에 다니셨으며, 십자가에 달리고자 하셨으며, 처음과 같 이 항상 우주에 편만하셨도다! 6)
칼빈이 개진한 소위 초(超)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 격적 연합 관점에서 파악된다.7) 칼빈은 대리적 속죄에 대한 루터 의 이론이 그리스도의 양성의 속성간의 “위격적 교통(a hypostatic communication)”이 아니라 “실제적 교환(a real exchange)”에8) 기 초함으로써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면서9), 성육신한 중 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하여 다양하게 기술된 성경의 본 문들은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이라는 관점에서 일관성 있 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에 따르면, “속성 혹은 특성의 교통(communicatio idiomatum sive proprietatum)”은 다음과 같 은 양상으로 나타난다.10) 이러한 구별은 성경의 서술에 따른 축자적 인 것이다.11)
첫째, 성자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으며(요 8:58), 모든 피 조물보다 먼저 나셨으며(골 1:15, 17),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영광 을 받으시며(요 17:5),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는(요 5:17) 말씀들 가운데서 보듯이 신성에 고유한 속성만을 표현하는 경 우에도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영원히 성부와 함께 계시고 일하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지 만 동시에 이 땅에 오신 참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함께 새겨야 한다.
둘째, 인성의 고유한 속성만을 표현하는 말씀들도 양성의 위격적 연 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성자의 낮아지심과 육 체 가운데 오심이 자주 말씀된다. 예컨대, 성자는 “아버지의 종”이시 다(사 42:1). 그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요 8:50),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으시며(요 6:38), 지혜와 키가 자라 가는 분이며 (눅 2:52),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분이시다(눅 24:39). 주님은 자신이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요 14:10). 뿐 만 아니라 마지막 날과 때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다(막 13:32; 마 24:36).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표현하는 이러한 구절들을 읽을 때에 도 그의 신성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대속의 진정한 비밀을 깨닫게 된 다. 그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연약함을 지니시고 시간에 따라서 성 장해 가는 분이시지만 또한 참 하나님이시므로 언제든 완전하고 불 변하시다.
셋째, 신성에 고유한 속성과 인성에 고유한 속성이 함께 표현되 는 다음 본문들은 오직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의 관점에서만 합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성) 자기 피로(인성) 사신 교 회”(행 20:28), “영광의 주를(신성) 십자가에 못 박지(인성) 아니하였 으리라”(고전 2:8),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신성) 우리가 들은 바 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인성)”(요 일 1:1), “그가[하나님이](신성)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인 성)”(요일 3:16) 등.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은 주어는 신성을 술어는 인성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 반대 경우, 혹은 주어는 인성을 술어는 신인양성을, 혹은 그 반대 경우 등 다양하지만 언제든 신인양성의 위격적 교통이라는 관점 에서 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은 인성에 따라서 그리하셨으나 그 사역이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주님께 동시에 함 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는 말씀과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 오히 려 위격적 연합의 비밀을 심오하게 제시하고 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를 흘리셨다는 말씀으로 그 분께서 인성 가운데 하신 일을 신성으로 돌린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신성에 고유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은 아니다.12)
넷째,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성 교통을 다루면서 성경에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함의하는 인격을 전하는 구절들이 많음을 지적한다. 이 구절들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참 실체를(veram Christi substantiam)” 신성이나 인성으로 특정할 수 없는 경우로서 동일한 말씀으로 양성의 어떠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본문들도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본문들은 요한복음 에 많이 나타난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지시고(요 1:29; 막 2:10),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로 서 공경을 받으시며(요 5:21-23), “세상의 빛”(요 8:12; 9:5), “선한 목자”(요 10:11), 구원의 “문”(요 10:9), “참 포도나무”(요 15:1)로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신다는 말씀들이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아우 르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다(고전 8:6). 이러한 권위와 사역은 단지 사 람에 불과한 자에게는 부여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 버지께도 이를 그대로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성육신한 아들에게 이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절들이 신 성과 인성 어느 한 성에만 특정되는 속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분류가 칼빈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13) 칼빈의 고유성은 이러한 분류가 신학적 사변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 언어와 역사와 문 맥에 충실한 주석의 열매라는 점에 있다.14)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맥 고완은 칼빈의 설교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들어, 그것이 성경의 권위 에 기초하고, 강해적, 체계적, 교리적이며, 목회와 예배의 일환으로 행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15) 우리는 이를 칼빈의 주석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신성양성의 속성교통론의 기초 가 되는 위격적 연합 교리를 칼빈이 어떻게 그의 성경주석에서 전개하고 있는지 아래에 살펴보고자 한다.
3. 위격적 연합 교리에 관한 주석: 신인양성의 속성교통에 주목하여
칼빈의 주석 가운데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주석에 위격적 연합 교 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한문헌에는 ‘나는......이다(ejgwv eijmiv)’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그 자신의 증언이 풍부하다. 칼빈은 공관복음을 “중보자의 모 든 의무(partes)”를 다룬 “몸(corpus)”이라고 부르고 요한복음을 “ 영혼(anima)”이며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한 길을 여는 열쇠 (clavis)”라고 부른다.16)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위격적 연합이라는 교 리적 주제(locus classicus)를 그것을 증언하는 요한문헌의 본문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3.1. 말씀이 육신이 되심
칼빈은 제 2위 성자 하나님의 인격 자체가 성육신의 비밀의 원천 이 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심의 형언할 수 없 는 은밀함(ineffabile arcanum)”은 “하나님의 본질로 계신 진정한 위격(veram in essentia Dei hypostasin)”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씀의(요 1:14) “자명한 의미(clara sententia)”는 “창세 전에 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거하시면서 사람 이 되셨다”는데 있다.17)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무엇보다도 적절히(magis proprie)” 표 현한 말이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 이라고 본다.18) 칼빈은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많은 본문이 “단지 그 의 신성 자체를(in nudam divinitatem)”를 말하고자 함도 “그의 인 성”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고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묘사(elogium filii Dei in carne manifestati)”를 담고 있다고 주석한다.19)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으로서 대속의 중보를 행하시는 주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말씀들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20)
칼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씀을(요 1:14) “하나님의 아들 은 시간적인 시작을(temporis initium) 지니지 않으신 영원한 말씀 이신 채로 여전히 계시면서 어느 시점에 사람이 되셨다(homo esse coepit)”고 하여 소위 초칼빈주의의 일단을 드러낸다.21) 소위 초칼빈 주의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찬송시라고 알려진 빌 2:5-11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도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forma Dei)” 로서(빌 2:6) 영원한 “엄위(maiestas)”를 지니신다. 성육신한 주님 이 자기를 비우심은(빌 2:7) 신성의 포기가 아니라 한 인격 안에서의 인성을 취하심으로 신성이 인성과 연합함을 뜻한다. 이는 다음과 같 이 주석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실제로 아버지와 동일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제한하심이 없이, 종의 모양으로 육체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셨다.” 22)
소위 초칼빈주의는 성육신 전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임재를 설명하 기 위한 신학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야곱의 사닥다리 위에 나타난 여 호와의 사자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다는 사실 은 그가 땅과 하늘을 가득 채우시는 것을 제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와 능력이 모든 곳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23) 같 은 맥락에서, “고대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forma hominis)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이후에 하나님이 육체 가운데 오셨을 때 보여 주셨던 신비의 서곡(praeludium mysterii)이었다”고 주장한다.24)
비록 그리스도는 아직 육신 가운데 나타나시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그가 그 자신을 조상들에게 나타내셨을 때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보자였으며,”25) “미래 그의 사역의 실례(specimen)”를 계시하셨다 고 보는 것도 같은 경우이다.26)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의 중보를 특별 히 강조하는 입장에 비추어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영적이나 실제 적인 편재(遍在)가 역사 가운데 시종 구현되고 있음을—비록 구약에 서는 예표적이나—확신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27)
3.2. 세 가지 종류의 신인양성의 교통
3.2.1. 은사의 교통(communicatio gratiarum)과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치 신적인 인간과 같이(quasi divinum hominem)” “그의 인격 가운데” “인성에 있어서” “하늘의 능력(coelestis virtus)”을 지니신다. 인성은 신성의 고유한 속성을 그대로 지닐 수는 없으나, 신성과 연합함으로 그 고귀함을 누리게 된다.28)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엄위가 육체에 결속된다 (Dei maiestas cum carne coniuncta).”29) 우리가 하나님과 결속하 는 유일한 고리는 그리스도와의 결속이다(unicum esse vinculum nostrae cum Deo coniunctionis, si Christo coniuncti sumus).”30)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마 1:23)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들성경, 교리, 교리적 주석: 칼빈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 비추어
사이의 교통의 방식”이 되신다는 점을 지시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그와 하나가 된다(unum cum eo efficimur).”31) 이렇듯,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 체로” 거하시는(골 2:9)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부 우 리에게 교통하신다(totum se nobis communicat).”32) 성령이 그리 스도께 무한이 임하였다. 그것은 은사의 종류 여하에 따라서 제한적 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영의 무한한 부요함을 아 들에게 부어주셨다. 그리하여 그 충만함에 모든 구원받은 자녀들이 동참하게 하셨다.33)
비록 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흘러나오지만, 그 완전한 현현은 그리스 도의 육체 외에 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육체 안에서 사람의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육체 안에서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제물 이 드려졌으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하나님을 향한 복종이 이 루어졌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죽음을 이기고, 그의 육체는 하늘의 영광 속으 로 취해졌다.34)
그리스도는 “그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지니신 것을 우리를 양자 로 삼으심으로 우리에게 교통하신다(quod natura proprium habet nobis adoptione communicat).”35)
3.2.2. 속성의 교통(communicatio idiomatum)
속성의 교통은 한 인격 안에서 한 본성에 속한 속성들이 다른 본성 에 “돌려지는(transfertur, aptetur)” 경우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씀을(행 20:28) 주석하면서 칼빈은 “여 기에서 바울이 피를 하나님께 돌린 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교부들 은 한 본성의 속성이 다른 본성에 돌려지므로 이러한 형태의 어법을 속성의 교통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여 이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 을 피력하였다.36)
칼빈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에서(요 3:13) “인자”는 인성에 따른 표현이고 하늘에 올라간 자는 신성에 따른 표현이다. 이렇듯 “인격의 하나됨으 로 인하여 한 본성에 속한 특성이 다른 본성의 특성에 돌려지는 것은 (transferri) 자주 있는 일이며 통상적이다.”37)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 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38) 이와 관련하 여 칼빈은 “신성이 쉬고 있는 동안에(quiescente divinitate)” 인성 은 죽음을 죽으셨다는 이레네우스(Irenaeus)의 말이 광범위하게 적 용될 수 있다고 지적하므로 신인양성의 속성의 교통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개진하였다.39)
무엇보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관한 칼빈의 주석 이 주목된다. 주님은 인성에 따라서 “죽음의 공포에(metu mortis)” 휩싸여 계셨지만 “신적인 영광의 엄위”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에게는 “경건과 엄위(pietas et maiestas)”가 함께 있었다(암브로스, Ambrose). 다만 신성에 따른 능력이 “마치 숨은 듯 일시적으로 쉬고 있었다(quasi abscondita ad tempus quievisse).” 그러나 고통당 하고 두려워하는 동안에도 인성은 그것과 연합되어 있는 말씀의 권능 에 의지하였다. 그리스도의 뜻은 인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으로 성부 의 뜻에 일치하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 Cyril of Alexandria). 그 러므로 단의론자들(Monothelites)의 주장은 잘못되었다.40)
칼빈은 신인양성의 중보가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아버지께 영광을 올림도, 그 동일한 영광으로 아들이 높아짐 곧 승귀도 없다는 점을 분 명히 적시하고 있다.
우리의 복은 죄로 말미암아 지워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하고 갱신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살 아있는 형상(viva imago)일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와 함께 지니신 그의 인성 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영광이 새겨진 영상(影像, effigies)이시다. 그리하여 그 는 우리를 변화시켜 그의 지체로 삼으신다.41)
3.2.3. 사역의 교통(communicatio apotelesmatum)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셨다. “생명이시자 생명의 근원(vita et fons vitae)”이 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영혼과 육체의 사람이 되 시고 그 인성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하셨다. 신성에 따라 서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 인성에 따라서 죽으셨다.42)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요 14:1) 주석하면서 칼빈은 믿음의 주초(柱礎)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양성의 위격적 연 합에 따른 중보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리 스도의 비하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불가해한 신령(神靈)으로 날아 올라간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보기에 낮은 곳에 처 하신 그리스도께 의탁하지 않는 한 결코 하늘에 이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연약함에서 기초를 찾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확 고해질 수 없다.”43)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 심”으로(요 5:17) 사람이 되신 주님이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구원의 저자(salutis autorem)” 가 되심을 알리시기 위해서였다.44)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 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는 말씀을(요 5:19) 주석하면서 칼빈은 본문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나 그가 성부와 구 별되는 성자의 위격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치는 것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의 가시적인 육체 아래 숨겨진 하나님의 능력으로(divina virtute, quae sub carne visibili latebat)” 병자를 치유하였음을 부각시켜 그의 사역이 신성과 인성의 양성적 중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기록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로부터 주님의 일 은 “하나님의 일(opera divina)”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금할 수 없 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45)
주님은 우리의 대속을 위하여 “육체의 본질과 정서(essentia carniset affectus)”를 함께 지니셨다. 그리하여 연약함 가운데 대속의 죽음 을 죽으셨다.46) “신격이 육체의 연약함에 여지를 허락하신 방식으로 (quomodo deitas locum cesserit carnis infirmitati)” 대속의 죽음 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 죽음에 복종하 신 분이 죽음에 대한 “승리자(victor)”가 되셨다.47)
3.3. 위격적 연합과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 divina)
칼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의 신인양성의 위격을 다루 면서 종종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이라는 말로 신성을 대 신한다. 주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요 8:12) 칼빈 은 비록 그리스도는 “몸으로는(corporis adspectu)” 우리를 떠나 계 시지만 “그의 영의 비밀스러운 능력은 날마다 우리 가운데 조명된다” 고 강조한다.48) “성령은 그리스도와 무관히 어떤 것도 우리에게 부여 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가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하신다.”49)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특정하여 부르는 것은(롬 8:9), 그 “충 만함(plenitudo)”이 우리의 중보자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부어지 셨으므로 그에게서 우리가 “우리의 몫(nostrum portio)”을 받아 누 리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50) 성자와 성령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서 구분된다. 보혜사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능력 과 작용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역사하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의 임 재로 말미암아 ‘우리 밖에(extra nos)’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in nobis)’ 계신다.51)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이러한 중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미친다. 이러 한 측면에서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자 진리의 영이라 일컫는 다.52) 여기에서 우리는 나를 초월한 말씀이 내 속에서 말씀된다는 소 위 초칼빈주의의 인식론적 차원을 발견한다.53)
이러한 위격적 연합의 인식론적 차원이 칼빈이 『기독교 강요』와 신 학적 작품들, 그리고 주석과 설교 등에서 누차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의 맞추심이란 개념에 잘 드러난다. 신학자들은 주로 그 기원과 용례 를 연구함에 있어서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게 있어서 이 개념은 그 이상의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54) 신구약이 실 체에 있어서는 하나이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양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다양함을 설명하거나,55)
여기에서와 같이 위격적 연합에 따른 양성의 속성교통을 다룰 때 하나님의 맞추심이라는 개념이 현저히 나타난다.칼빈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독생자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 다고 전하는 말씀은(요 1:14) 우리에게 “그에 대한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을 제공한다”고 하면서 “은혜와 진리”라는 용어 는 일종의 “치환(per hypallagen)”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 도가 우리의 구세주시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가징 특징적으로 부각시 키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곧 우리에게 맞추신 말이라 는 것이다.56) “평범한 단순성(plebeia simplicitas)”이 그리스도의 “ 교수방법(ratio docendi)”이다.57)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유일하신 해 석자(unus patris consiliarius)”로서 감추어진 비밀을 우리에게 알 리신다.58) 다양한 양상의 속성교통은 그러한 맞추심의 은혜를 우리 에게 드러낸다.
4. 결론: 축자적 그리고 기독론적
칼빈은 “모든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totum evangelium in Christo contineri)”고 여기고, 복음의 핵심을 그리 스도의 인격 자체에서 찾는다.59) 은사의 교통과 속성의 교통과 사역의 교통은 성경말씀에 따른 “축자적 교통”의 세 가지 양상을 뜻할 뿐, 서로 별개가 아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믿음으로 수납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친히 말씀하심으로 믿음으로 수납할 때 교리적 확실성(certitudo)이 담보된다. 이러한 점 에 착안하여 칼빈은 오직 신앙의 유비로만 주어진 본문들에 부합하는 체계적인 가르침 곧 교리(doctrina)를 가장 엄정하게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60) 이와 관련한 가장 첨예한 논쟁이 우리가 다룬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에 따른 신인양성의 ‘축자적 교통’과 관련하여 종교 개혁기에 일어났다. 칼빈의 성경해석을 특징짓는 “간결성과 유익성 (brevitas et facilitas)”은 단지 문체와 어투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본문의 교리적 의미를 추구하는 엄정한 주석의 자세에 일차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는 본고에서 주목하였다.61)
칼빈의 설교 역시 이러한 기독론적 관점이 시종 견지된다.62)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이 존재와 속성,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은총에 집중되는 바, 이에 대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선포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설교는 기독론적 범주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교리를 심화시키고 그 부요함을 추구할 때 하나님의 음성(vox Dei)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여긴다.63)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복음의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가운데 이해된 다(la substance de l’Evangile est comprinse en la personne du Fils de Dieu).”64) 이러한 경향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비하 와 승귀의 상태 그리고 대속의 사역을 설교하면서 칼빈이 성례적 연 합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입장—영적 임재설—에 자주 문의하고 있음 이 주목할 만하다.65)
구약신학자 차일즈(Brevard S. Childs)는 성경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를 다룬 한 논문에서 양자의 차이는 본질적이지 않으며 정도에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66) 그러나 이는 다분히 이상적일 뿐, 현실의 괴리는 크다. 과연 오늘날 성경의 본질과 권위, 나아가 성경해석과 주 석, 설교, 혹은 성경신학이 교리적으로 추구되고 있는가?
칼빈은 성경과 교리의 관계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를 견지하는 가운데 교리적 주석을 감행하였다.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예표적 해석에 편향되지 않았다.67) 구약의 기독론을 예표론적 측면에서 다루되 문자적, 역사 적, 영적 해석의 근저 위에서 그리하였다.68) 그러므로 그의 주석은 본문에 충실하면서도 신구약의 경륜에 맞추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적 의미를 고려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곧 신학적으로 추구되었다. 칼 빈에게 있어서 주석은 말씀에 의해서 규범된 교리를 조명하고 적용 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기 도 하였다.69)66) Brevard S. Childs, “On Reclaiming the Bible for Christian Theology,” in Reclaiming the Bible for the Church, ed. Carl E. Braaten and Robert W. Jenson (Grand Rapids: Eerdmans, 1995), 1-15, 특히 15. 여기에서 저자가 성경신학적 입장에 경도되어 이러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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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칼빈주석』, 롬 1:3 (15-16, CO 49.15).
60) Cf.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2, Holy Scripture: The Cognitive Foundation of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93), 63-66.
61) 그동안 이러한 관점은 거의 무시되었다. Cf. Richard C. Gamble, “Calvin as Theologian and Exegete: Is There Anything New?” Calvin Theological Journal 23 (1998), 178-194; Park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85-93.
62) Cf. 이환봉, 『성경에 이르는 길』, 361-366.
63) T. H. L. Parker, Calvin’s Preaching (Edinburgh: T&T Clark, 1992), 97-100.
64)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 Leroy Nixon (Audubon,NJ: Old Paths, 1977, New Edition of New English Translation 1950), 요 1:1(15,21, CO 47.467, 472, 476); 눅 2:1-14 (36-38, CO 46.956-958).
65)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48-49, 63, 156-157, 195-196,
67) Cf. John L. Thompson, “Calvin as a Biblical Interpreter,” in John Calvin, ed. Donald 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64-70.
68) 이러한 점에서 칼빈은 “가운데 길(중립, via media)”에 서 있었다. Cf.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the Old Testament, 113-132.
69) 말씀의 순수한 의미는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는 문제는 칼빈의 해석학과 관련하여 문 제되어 왔다. 다음 책은 이 주제를 칼빈의 신학의 형성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Thomas F. Torrance, The Hermeneutics of John Calvin (Edinburgh: Scottisch Academic Press, 1988. 그러나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것이 “말씀하시는 하나 님의 인격에 의해서(a persona loquentis Dei)” 말씀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을 확고 하게 견지하는 칼빈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는 별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Inst. 1.7.4, (CO 2.58).
문병호(총신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https://www.kirs.kr/data/seminar/renewal/16new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