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용두동교회 77년사에 수록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개화 초기 어떻게 선교가 시작되고 부흥했으며, 그것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용두동교회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나라에 임한 흔적을 역력하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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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은 현재는 행정적으로 서울특별시에 속하여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에는 경기도 고양군 종인면 용두리에 소속되었다. 동대문에서 동쪽으로 10리 안에 있는 언덕을 중심으로 당시는 불과 5, 60호의 초가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작은 동네였다.
유교 전통의 뿌리에 깊이 박혀 있고 일반대중은 무지와 미신에 젖어 가난에 허덕이던 동네였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27년 전인 1885년에 기독교가 몰고 온 복음의 기쁜 소식과 개화의 거센 물결은 아직도 이 조용한 용두리(또는 용머리, Yongmoree라고 선교사들이 부름)의 깊은 잠을 깨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구원의 복음이 몰고 온 사회개혁의 돌풍은 마침내 이 조용한 용머리 동네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일본의 침략 마수가 우리나라를 장악한 지 2년째가 되는 1907년 의 어느날 이 작은 용머리 동네에 조영례라고 하는 8세 된 소녀가 있었다. 조씨 집안의 외딸로서 또 막내로서 영례는 늙으신 부모의 사랑을 똑차지하면서 살다가 우연히 무서운 병을 얻어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소녀의 병이 그녀의 단란한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곧 나아지려니 하는 기대 속에 치료를 해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영례의 병은 악화일로에만 있더니, 드디어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마비가 된 것이다.
병세가 이렇게 심각하게 발전하게 되니 그의 모친 계월씨는 귀여운 그녀의 외동딸을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좋다는 한약방을 찾아다녔고, 불구가 된 딸의 병을 고쳐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직도 속수무책이었다.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때 그녀의 부모는 동대문 턱에 우뚝 서 있는 감리교 여선교부에서 경영하는 동대문부인병원을 기억하였다. 비록 낯설은 서양여자들이 와서 경영하는 병원이었으나, 딸의 병을 고쳐만 준다면 예수의 신세를 지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마지막 소망을 동대문부인병원에 걸었던 것이다.
이 동대문병원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스크랜톤이 약국으로 시작하여 병원으로 발전시킨 곳이다. 이때 이 병원에는 커틀러 여의사와 에러스버거 두 여의사가 환자들을 친절하게 치료하면서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 병원도 육신의 병만을 고쳐 주는 곳이 아니고 영혼의 병까지 치료하고 있었다. 즉 전도부인들을 고용하여 입원환자와 그 가족도 외래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던 때였다.
원래 그녀의 병이 크게 기울었던 후에 동대문병원에 입원하였던 까닭으로 어린 영례의 병은 속한 시일 내에 낫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병세는 눈에 띄게 영례의 병은 낫기 시작하였고 굳어 버렸던 그의 한족 팔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부모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1개월 만에 영례의 병은 완전히 나았다. 정말 기적같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영례는 춤을 추었고 그의 부모는 의사선생들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의사들은 그 부모에게 당신의 딸을 고쳐 주신 분은 우리 사람인 의사가 아니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영례의 부모는 이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 부모에게 당신의 딸의 병을 고쳐 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방법은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딸의 병을 고쳐 준 것에 감사하려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믿는 생활을 해야 된다 타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급한 일을 면한 그 부모에게는 믿음을 가진다는 긴박성이 없었다. 그런데 환자 본인인 영례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또 입원 1개월이라는 시간이 어린 영례의 마음속에 믿음의 씨를 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즉 영례가 입원하고 그녀의 병세가 혼전되면서 병원측에서는 어린 영례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약도 주고 복음도 함께 주었던 것이다. 영례는 이 두 가지를 잘 받아서 먹었다.
그랬더니 그의 병도 빨리 낫고, 그의 믿음도 급속히 그리고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병원에 있던 전도사들은 영례에게 꾸준히 열심히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찬송가와 기도를 가르쳤다. 영리한 영례는 이것들을 빨리 배우고 또 혼자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영례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가 깊이 그리고 굳건히 자리잡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의 부모도 놀랬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어린 소녀의 호기심 정도록 생각하고 퇴원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결과는 퇴원 후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분명히 병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녀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할 때 분명히 그전에 맛보지 못한 어떤 감격과 기쁨을 체험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기쁨과 평안은 그전의 것보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 대로 받아들이고 또 시키는 대로 기도와 찬송을하였다. 병원에서의 일 개월이란 시간은 영례에게 이런 기도와 찬송을 생활화시키게 하였다. 즉 체질화시키고 습관화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원 후에도 영례는 식사 때가 되면 반드시 부모들에게도 손을 모으게 하고 자신이 식사기도를 인도하고 같이 식사를 하게 하였다. 부모는 어린 딸의 이런 습관을 막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례는 부모에게 자기가 병원에서 배운 찬송가와 주기도문 등을 열심히 가르쳤다. 부모도 이런 자기 외딸의 수다그러울 정도의 신앙생활을 반대하거나 방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귀여운 자기 딸의 무서운 병을 고쳐 준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고, 또 본인이 전렇게 믿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반대할 생각도 없어졌던 것이다. 오히려 자기 딸의 권고로 함께 기도하고 찬송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선 용두리마을에서 처음으로 조씨 가정이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용두동에 믿음의 뿌리가 내리게 된 시초요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영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영례는 이웃집에 전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미 동네에 소문이 좋게 나있었기 때문에 전도하기에도 좋았다. 죽어 가던 영례가 ‘예수 병원’에 가더니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죽을 병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실로 설교 대신 생활로써 전도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도방법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감리교회 초기 선교에 있어서 의료선교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가를 영례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순수한 믿음보다도 예수를 믿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다분히 공리적인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증거를 보고 교회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믿음의 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으로까지 인도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일을 의료선교가 하였던 것이다. 동대문부인병원이 이런 일들을 잘 해냈다. 수천년간 무지와 미신에 얽매여 있던 용두리 마을에 완전한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킨 것이다. 병만 나면 무당이나 찾고 푸닥거리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초기에는 병원이라고 하면 기독교 계통의 병원뿐이었다.(서울에는 알렌의 광혜원, 스크랜톤의 상동병원, 그리고 동대문부인병원 등). 기독교병원에 오면 거기에서 의사나 전도사들이 육신의 병과 동시에 영혼의 병까지 치료하여 주었던 것이다. 초창기의 병원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민중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가장 빠르고 또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매체였던 것이다. 우리 용두리도 이런 의료선교의 도움으로 서서히 복음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