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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93. [역경의 열매]
김용애 (1-15) 26년 교사생활 접고 47세에 아프리카로
26년 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던 나를 하나님께선 그냥 놔두지 않으셨다. 교직 생활은 안정되고 행복했다. 하지만 1991년 2월28일 사표를 냈다. 그리고 3월4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오지의 선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라고 할 때 곧 떠난 것처럼….
친한 친구 중 하나가 "고향 떠나 멀리 가면 고추장이 그리울 거야"라고 하면서 고추장 단지를 비행기를 타려는 내게 건넸다. 난감했다. 혼자 해외 여행할 때에도 짐 들고 낑낑거리는 게 질색인지라 옷가방을 비행기편으로 부치고 달랑 핸드백 하나만 들고 타곤 했었는데…. 하지만 친구의 성의가 고마워 얼떨결에 고추장 단지를 받아 들었다.
홍콩 공항에서 9시간을 기다린 뒤,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겨우 탈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홍콩 시내로 나가 보자며 일행 중 한 사람이 한인교회 주소 한 곳을 내밀었다. 지나가는 한국인 나그네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교회라고 했다.
홍콩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 기사에게 한문으로 된 주소를 보여주니 곧 차가 출발했다. 주소가 적힌 곳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는 집사님과 통성명을 했다.
"안녕하세요. 김용애 선교삽니다."
"피곤할 테니 좀 쉬세요."
그 한마디에 교회 바닥에서 잠에 빠져 들었다. 잠결에 한 여집사님이 바가지에 쌀을 '박박' 씻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구수한 밥과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저녁 드세요."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밥을 먹어 댔다. 그리고는 또 쓰러져 잤다.
교회 담임 목사님이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고급 중국 요리가 나오는데 접시에 이가 빠져 있는 게 아닌가. 기분이 언짢았다. 종업원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이 빠진 그릇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종업원은 빙그레 웃으며 "이 식당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지요". 사뭇 아이러니였다. 긴 역사 자랑이 이 빠진 그릇이라니….
정중하게 음식을 대접하는 목사님이 고마웠다. 한국인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감동했던지 나도 이 다음에 사역을 하게 되면 이런 사역도 같이 하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아프리카 비행기는 다시 출발했다. 봄을 기다리는 처녀처럼 오지의 선교지로 떠나는 난 설렘으로 가득했다.
정리=유영대 기자, 사진 김지훈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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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4년 대전 출생. 공주사범대 가정과 졸업. 대전 호수돈여고·서울 문영여중 교사(26년 근무). 1991년 서울 연희동 원천교회에서 남아공 선교사로 파송. PNBC(포체프스트롬새출발센터)선교회 창립. 8개 교회 개척. 현재 남아공 학교 2곳과 법원에서 성경 강의 및 전도 활동, 매주 2000여명 빈민들에게 식품 구제사역, 에이즈(AIDS)고아원 (이름:Heaven of angel=천사들의 안식처) 원장으로 빈민가 어린이 100여명 보호사역 중(문의:원천교회 02-337-5400, www.woncheon.or.kr).
***[역경의 열매] 김용애 (2) 교사도 건물도 없는 곳… ‘속았구나’ 한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 첫날부터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를 운영하는 책임자로 초빙받았는데 현장에 도착해보니 교사도 건물도 없었다.
'아뿔싸, 속았구나.'
밤새 울었다. 눈물에 푹 젖은 눈으로 광활한 하늘을 보니 속은 나 자신이 한없이 처량했다.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아주 가까운 친구와 집안 식구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모두 "돌아와라. 걱정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옛날 삶, 그때 그 아름다웠던 삶을 다시 즐기고 살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나님께 "이건 애초의 계획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해주실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기도 가운데 생각을 고쳐 먹었다.
"저것 봐라. 김용애가 망했구나. 그러기에 헌신도 적당히 해야지. 덮어놓고 헌신하면 위험한 거야."
나를 지켜보는 성도들이 이렇게 말할까봐 살짝 겁이 났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후원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다.
5개월 가까이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었다. 기도하는 동안 현지 주민들에게 간단한 한국어를 가르쳤다.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니까 자연스레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에 먼저 와 있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내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됐다. 슬며시 발을 뺐다. 한국인들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필요한 기술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어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저 흥미만 줄 뿐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다.
5개월 뒤, 지금 17년째 사역 중인 포체프스트룸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포체프스트룸은 남아공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130㎞가량 떨어진 곳이다. 차로는 2시간 정도.
포체프스트룸에 오던 날, 어떤 목사 사모님이 황소 한 마리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고 했다. 나를 선교사로 파송한 원천교회 담임 목사님은 사무엘상 6장 10∼16절 말씀으로 설교를 하시면서 나를 법궤를 싣고 울며 울며 벧세메스로 가는 소에 비유하셨다고 한다. 어떤 교인 한 분은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소가 굽이굽이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깼다고 했다. 수레를 멘 소가 서울 도심 한복판을 지나가는 희한한 꿈을 꾸고 심히 놀랐다고 했다. 또 다른 성도는 나를 통해 아프리카의 많은 소떼를 환상으로 보았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소다. 소처럼 일해야 하고 결국 희생 제물로 끝나야 한다. 선교사로서 늘 각오하고 있는 일이다.
남아공 현지 사역은 허점투성이였다. 내가 만난 흑인들은 거짓말, 도둑질, 속임수의 명수가 적지 않았다. 몹쓸 인간들…. 교사 생활 대부분을 학생과에서 근무했던 나로선 질색할 일이었다. 절망감을 느끼곤 했다. 오 하나님! 앞으로 이들과 어떻게 선교 활동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몇 달 동안 그저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3) 아프리카 생활 불만… 선교 사명 잠시 망각
"하나님. 이렇게 거짓이 판치는 곳에선 올바른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한국으로 보내주세요. 전 아는 것도 많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주도 많잖아요? 원시적인 흑인들에게는 아무것도 활용할 수 없어요. 다시 한국으로 보내주시면 다방면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울며 기도했다. 연일 짜증의 연속이었다. 기도를 드린 며칠 후, 한국 교회에서 부흥 집회에 초청한다는 연락이 왔다.
'옳다, 됐다. 이번 방한기간 어느 한국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선교적인 일을 제안하면 선교지를 한국으로 옮겨야지.'
알고 지내온 백인 친구들에게도 단단히 인사를 해 놨다.
"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것은 네가 가져. 저것은 네가 갖고…."
남아공 생활을 혼자 정리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 내 사역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셈이 됐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 아프리카 대지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결코 이 땅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상했다. 한국에 도착해 바쁘고 신나게 한참을 지내는 동안 아무런 제안이 없었다. "한국에 오면 할 일이 많은데 왜 거기서 썩고 있느냐"고 말했던 사람들도 모두 조용했다. 방문 2주째부터는 울음보가 터졌다.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슬픈 건 하나님이 날 외면하신 것 같았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출국 이틀 전, 부모님께 인사하러 대전으로 내려가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고속버스를 탄 채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환상 무대는 아프리카였다. 백인 부부가 개학을 맞아 어린 딸을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주려고 짐을 챙겨 차에 싣고 딸을 데리러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린 딸은 방바닥에 뒹굴며 기숙사에 가지 않고 엄마랑 아빠랑 집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며 울고 있다. 부모는 방 문턱에서 울고 있는 철부지 딸을 내려다보며 측은하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부모의 마음이고 나는 이 멍청한 딸이라고 자각되면서 눈물이 딱 멎었다. 이젠 회개의 눈물이 터졌다.
"하나님.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아프리카로 돌아가겠습니다."
아프리카로 돌아온 며칠 후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지식과 재주가 필요하지 않다. 흑인들이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더구나 네 소관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고 천국에 오기를 원한다. 복음을 전하라. 내 백성이 네 백성이고 내 자녀가 네 자녀이니라."
새로운 사명이 생겼다. 오직 한 가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보고 드리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4) 근무태만 현지 고용 목사와 법정 싸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 30대 흑인인 다니엘 목사를 선교회 내 교회로 초청했다. 온순해 보이는 다니엘 목사는 늙은 어머니가 받는 연금(월 6만원 정도)으로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30분씩 아침에 들려주고 심방과 복음을 전하면 아파트 방 한칸과 사례비를 주는 조건을 제안했다.
다니엘 목사는 너무 행복해했다. 이 일 외에 더 많은 일을 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말뿐이었다. 며칠 일하는 척하더니 주일 낮 예배 설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치원 교사와 잡담하며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유치원이 엉망진창이 됐다. 심방하라고 내보내면 오후 내내 어디서 놀다가 들어오곤 했다. 한마디로 근무태만이었고 그 정도가 심했다.
이런 식으로 일하면 직장을 잃을 거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한달 후, 노동 관청에서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다니엘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지 않았으니 한달 내로 월급을 지급하지 않으면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제때 지급했는데 말이다. 수령 영수증을 받아놓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경고장을 펼쳐 들고 하늘을 향해 하소연했다.
"하나님, 다 아시면서 왜 이런 일을 방치하십니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재판정에 서야 합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도 법정에 서고 바울도 재판을 받았는데 너는 왜 못 서느냐? 법정에 서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며칠 후, 법원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증인이 되어 줄 만한 유치원 선생님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후에 보복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민이 됐다. 인근 교회의 아더 목사님과 친한 사이여서 증인을 서줄 누구든 좀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재판 기일이 됐다. 법정에 들어선 아더 목사님은 곧바로 평소 안면이 있는 다니엘 목사에게 가까이 가서 성경을 펴들고 잠깐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졸지에 피고인이 된 나는 분통이 나 식식거렸다.
판사가 원고와 피고를 확인하고 재판을 진행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다니엘이 벌떡 일어났다.
"법정에 들어오기 전에 아더 목사님께 성경 말씀을 들었는데 깨달은 바가 있어 소송을 포기하겠습니다."
나중에 아더 목사님이 물으니 성경 말씀은 에베소서 4장 25∼32절이었다. "그런 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 내지 말고…"
할렐루야! 얼마 후 나는 재판소에서 전도사가 됐다. 그러고는 17년 동안 재판소에서 놀라운 전도의 체험들을 하게 될 줄이야…. 그땐 꿈에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5) 병상의 아버지 “선교센터 땅값 내가 주마”
남아공 선교 3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현지 목사들과 함께 가려니 준비 서류가 만만치 않았다. 사역하느라 서류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터에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가 머리를 크게 다치셨으니 좀 더 빨리 귀국할 수 없겠느냐는 동생의 연락이었다. 부랴부랴 차비를 꾸리고 2주 빠르게 입국했다. 병원 응급실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얼굴에는 침침한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 딸 용애가 왔습니다. 선교 활동한 걸 녹음했습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남아공 사역을 설명해 드리니 아버지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워지는 게 느껴졌다. 며칠 후 병실 문을 여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아버지의 얼굴 혈색이 좋아지고 환한 광채가 났던 것이다.
"아버지. 승리하셨네요"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얘야. 나 좀 보자. 너 남아공에서 선교센터로 할 만한 땅이 있다면서?내가 사 주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동생이 아버지께 선교지 사정을 이야기한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는 선교지 사정이 어렵다 해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상황을 기다려 보자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지금은 백인 정부입니다. 하지만 흑인이 정권을 잡으면 백인 재산을 흑인들이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선교센터 건립을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아공으로 돌아올 무렵 흑인 정부가 들어섰다.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백인 재산이 강탈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조용히 선교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힐문하셨다.
"네가 감히 나에게 바치는 헌금을 거절하느냐? 네가 감히 나에게 바치고 싶어하는 손길을 거부하느냐? 그것은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고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당황해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정부가 바뀌면 알려준다던 목장 건은 어떻게 됐느냐?" 아버지였다.
얼떨결에 하나님께서 방금 기도 중에 하신 말씀을 아버지께 보고드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교센터 건립에 돈을 대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헌금은 선교센터 건립에 종잣돈이 됐다. 이렇게 해서 뜻이 있는 현지 목회자와 연합해 남아공 PNBC선교센터(Potchsfstroom New Beginning Center)가 건립됐다. 정부 허가도 받았다. 'Article 21'. 노벨평화상을 탄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육영재단과 동등한 자격이다. PNBC선교센터는 교회와 유치원을 하고 있고 신학코스(목사 자격증이 주어진다), 직업훈련학교, 재판소 전도, 식품구제 활동, 에이즈(AIDS) 고아원 등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사역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작은 도구가 되길 늘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6) “헤이∼ 차이나” 놀림에 울화
"헤이, 차이나. 빵 좀 줘." "차이나, 사탕 안 주나?"
구제 활동을 벌이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다.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비슷해 그런다 해도 기분이 나빴다. 구호품을 잔뜩 싣고 유치원을 방문할 때면 우리에게 잘 보이려는 교사들은 어린이들에게 "땡큐, 미시스(Mrs), 또는 미스트레스(Mistress), 마담(Madame)"이라고 부르라고 열심히 반복해 가르친다. 흑인들은 백인 남자를 부를 때 서(sir), 보스(Boss), 마이로드(My lord)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까 나를 차이나라고 부르는 건 "야, 중국년아" 하는 꼴이다.
이곳 아파트 엘리베이터 입구에 '개와 중국인은 탈 수 없다'고 쓰인 팻말을 봤다. 이곳 사람들은 중국인을 멸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주님 뜻대로 불쌍한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겠다고 결심한 나였지만 구제품을 나눠주는 현장에서까지 "차이나, 차이나"라는 소릴 들으니 화가 날 수밖에….
놀리는 사람들에게 "난 차이니즈가 아니고 코리안이에요"라고 가르쳐줬다. 또 차이니즈라 해도 사람을 멸시하듯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실례라고 알려줬다.
한 번은 걸어가는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의 소년이 "헤이, 차이나. 차이나" 하면서 큰 소리로 놀려댔다. 난 그 소년에게 다가가 조용히 타일렀다.
"당신들에게 사랑을 주고, 성경을 가르쳐주고 축복을 해주는 사람을 모욕하면 안 돼요. 몹시 불쾌하니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는데, 또 똑같이 외쳐댔다. 우리 속담인 '소 귀에 경읽기'라고나 할까.
식품을 기부받는 일은 가히 전투적이었다. 기부받은 음식물을 냉동기 11대에 보관하고 흑인 마을까지 차에 싣고 갔다. 식품을 제공받는 이들이 1주일에 2000여명이 넘는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뿌연 먼지가 온 몸에 묻어도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에게 식품을 나눠주려고 땀을 뻘뻘 흘리곤 했다. 식품을 나눠주고 있노라면 옆에 걸어놓은 내 겉옷은 어느 틈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더 안 준다고 불평했다. 이미 타간 음식은 감춰두고 옷이나 얼굴에 무슨 칠하고 변장하고 또 타가는 일이 반복됐다.
한 번은 한 여성이 식품을 받은 뒤 20m쯤 떨어진 곳에 서서 "차이나, 차이나"해 가면서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쳐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곁에 있는 흑인 청년에게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느냐"고 물어봤다.
"차이나가 썩은 물건 가져다 나눠준다고 하네요."
듣기 민망했던지 흑인 청년은 그 여성에게 "그 썩은 거 이리 가져와라. 그거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소리치니 식품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잽싸게 도망갔다.
"오! 하나님. 차이나라고 사람들이 놀리더라도 화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힘이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더 겸손하게 이 사역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역경의 열매] 김용애 (7) 수모 참고 견디며 구제 사역에 매진
흑인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다. 셔츠에 피를 흠뻑 묻혀 폭행을 당했다며 먹을 것을 달라는 사람, 어젯밤에 촛불이 넘어져 오두막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구걸하는 사람, 교회 목사인데 휘발유가 떨어져 길에 차를 세워두었으니 도와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저런 수법에 참 많이도 속았다. 병든 아이를 안고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것도 알고 보니 모두 연극이었다. 하나님께서 영안의 눈을 주어서 가짜를 분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이런 능력은 없었다.
구제 사역을 하다보니 매일 사람들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을 돌봐야 하니 이제 그만 오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는 "집에 불을 지르겠다, 가족을 죽이겠다"며 위협했다. 원하는 만큼 식품을 주지 않으면 준 음식을 내던지고 욕을 퍼부어댔다.
그 중 정신박약인이 한 명 있었다. 측은해 보여 올 때마다 두말없이 음식을 건네주니 그는 차츰 방자해졌다. 새벽 5시든, 밤 10시든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눌러댔다. 빵을 주면 고기를 달라 했고, 옷이나 신발까지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참 곤혹스러웠다.
1주일에 2000명 이상에게 식품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굉장한 부자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무슨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거나…. 하지만 사실 난 생활비를 절약해 식품을 나눠주고 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백그라운드이시긴 하다. 그리고 뜻있는 현지 교회와 성도, 기업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PNBC(포체프스트룸 새출발 센터)선교회 초대 이사장인 윌리엄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성도인 블록리본이라는 빵공장 매니저에게 내 사역에 빵을 좀 공급해 주라고 부탁했다. 매니저는 쾌히 승낙했다. 식빵을 매일 두 상자(20줄)를 제공했다. 얼마 후 한 상자를 가져가니 또 채워줬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또 한 상자를 내밀어도 선뜻 채워주었다. 더 많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줄 수 있어 신이 났다. 청과시장 파터씨도 1주일에 3번 2상자씩 야채를 한가득 기증했다. 모두 훌륭하고 고마운 분들이다.
어느 날 식품을 지원하는 대형마트인 픽앤드페이(Pick and Pay) 관계자들에게 '스프 치킨'(급식) 사역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혼혈인학교 학생들이 허기로 공부하기 어려운 것을 돕기 위함이다. 이 사역을 시작하자 현지 신문에 커다란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됐다. 신문을 살펴보니 픽앤드페이 관계자의 멘트가 있었는데 "그냥 미세스 김이 도와줘서 시작했다"고 쓰여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픽앤드페이로 달려갔다.
"내가 거리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여러 군데 식품을 분배해주고 있는데 도와주십시오."
매니저 워런씨가 빙그레 웃으며 동의했다. 야채와 과일 파트 담당자를 부르더니 식품을 곧 주겠다고 했다. 할렐루야!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정작 물건을 내주는 공장 말단 직원들은 피곤도 하고 아무 유익도 없어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졸라대질 않나, 2시간 후에 와라, 오후에 오라고 거들먹거렸다.
그러다보니 아무것도 받지 못한 날도 있었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 혼자 이 수모를 견디면 수천명이 끼니를 때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8) “백인의 신 왜 믿나” 거부하는 흑인들 전도
기도 가운데 "법원에 가서 전도하라"는 영감이 떠올라 화들짝 놀랐다. 몇 달 전 현지인과의 소송에 질렸는지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법원에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 김용애입니다. 여기서 전도 활동을 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안 돼요."
법원 책임자인 수석 판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거절했다.
"왜죠, 왜 안 되는데요?"
"만일 당신에게 전도활동을 허락하면 다른 종교단체에서도 요구할 것입니다. 기독교만 해도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잘못하면 법원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오."
언뜻 생각해 보니 판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곳에 온 사람이 아닌가….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문제 될 거 없습니다. 만일 누구라도 저처럼 전도하게 해 달라거나 문제가 생기면 당장 그만둘 테니 전도 활동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럼 그렇게 해 보시오"라며 전도 활동을 허락해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석 판사는 우리 PNBC선교회 이사장 윌리엄 목사님 교회 성도였다. 내 사역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원 전도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재판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복음을 받아들이긴커녕 "왜 하필 나를 전도하냐"고 욕을 해대는 사람도 있었다. 전도를 시작하면 벌떡 일어나 가 버리고…. 한동안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한번은 법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 예수님을 믿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탕을 나눠주니 한 할아버지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설교할 땐 잠잠하더니 사탕 준다고 좋아하나.'
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좋아요?"
"마담이 기도해 줄 때 뜨거운 것이 가슴 속으로 쑥 들어갔어요."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렐루야!
한 대학생은 아무 날 아무 시에 법정에 와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란다. 그날 난 그 학생의 손을 붙잡고 뜨겁게 기도했다.
얼마 후 길에서 만난 학생은 재판 후 바로 감옥으로 끌려갈 줄 알았는데 무죄로 풀려났다며 연신 고마워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예수를 안 믿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백인의 신은 죽어도 안 믿는단다. 또 "예수님이 백인이냐 흑인이냐"고 되묻는다.
"저 하늘의 해는 흑인의 해인가요, 백인의 해인가요? 저 해는 백인의 것도 흑인의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구세주이십니다."
내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호한 어조는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님께서 내 입을 사용하시어 흑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으신 것이다.
백인 중엔 미개한 흑인은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끔 있어 놀라곤 했다. 하나님은 흑인과 백인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흑인들에게 가장 쉬운 전도는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9) ‘죽으면 죽으리라’ 흑인 타운서 전도
치안이 불안한 흑인 마을을 찾아 전도했다. 백인 친구들은 "여기가 어딘데 혼자 다니느냐"고 난리였다. 한 흑인 친구는 "흑인들이 차를 불태울 수 있고 살해할 수도 있다"며 염려했다. 개의치 않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전도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흑인 타운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정신 없이 차를 몰고 도망쳐나왔다. 며칠간 꼼짝 않고 지냈다.
'이를 어쩐담? 성령님께서 거리 전도를 하라 하셨는데….'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는 입구에 경찰서가 있는데, 다음날 그 경찰서로 달려갔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 김용애입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있습니다. 경찰서 앞마당에는 큰 나무가 많고 벤치도 있으니 사람들을 그곳에서 전도하게 해 주십시오."
경찰서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절대 혼자 다니지 말고 경찰서 정원에서 전도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마웠다. 그날부터 경찰서 안 정원 그늘에 앉아 매일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경찰서 앞마당에서 20명쯤 모아 설교하고 빵과 유유, 사탕을 나눠준 뒤 또 다른 그룹을 전도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언어가 10개가 넘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동네마다 그 중에 한 명쯤은 영어를 알아듣고 통역하는 사람이 나타나곤 했다. 성령님께서는 늘 역사해 주셨다. 어떤 사람은 메시지를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다. 한 남자는 매일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는데 거리에서 내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뒤 술 한 방울, 담배 한 개비도 피우지 않게 됐다고 했다. 어떤 여자는 자기 숙소에서 전도해 달라고 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노동자 숙소라고 했다.
곁에 있던 경찰관이 화들짝 놀라며 "가지 마세요. 거기는 지옥입니다"라고 했다.
"아, 지옥이라면 전도해야 하는 것이 내 의무 아닌가."
가서 보니 지저분한 건물들이었다. 큰 방이 5∼6개쯤 일렬로 늘어서 있고 중앙에 취사를 하도록 설비돼 있었다.
이런 건물이 20개동도 넘었다. 경찰관이며 목회자인 듀마씨에게 경호를 부탁했다. 내가 설교를 하면 듀마씨가 통역하고 경호원 노릇도 했다. 말씀을 듣는 흑인 노동자들은 의외로 온순하고 착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늘었다. 성경을 갖기 원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일일이 노동자 가정을 방문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노동자들이 꽉 들어차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 복음성가를 번역해 즐겁게 부르기도 했다. 얼마 전 후임자에게 이 사역을 물려줬다. 흑인들은 거리에서 만나면 "Come to Church"(교회로 돌아오라)라고 외쳐댄다. 건물 사이사이를 누비며 "예배 드리러 오라"고 내가 외쳐댄 구호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10) “여고 교장 자리 줄테니 귀국하라” 제안 받고 흔들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역을 시작한 지 6∼7년 됐을 무렵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다짜고짜 그분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인생을 고생하면서 사느냐"며 유수한 여고 교장으로 초빙할테니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근사한 제안이었다. 잠시 후 난 그 학교를 미션 스쿨로 만들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분은 "윤리 과목에서 기독교를 가르칠 수 있다. 또 학교 안에서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장으로 간다면 남아공 사역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선교회를 이미 만들었으니 고국에서 받는 월급으로 선교회를 운영하고, 방학 때는 남아공에 와서 선교회 일을 보면 되지 않는가.
한국과 남아공을 오가면서 얼마든지 사역을 할 수 있지 않는가. 게다가 내겐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소중하지 않은가. 특별히 미래의 지도자가 될 여성들을 신앙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건 매우 의미있는 일이지….'
흥분이 됐다. 그리고 희망이 일었다. 다음날 또 승낙 여부를 묻는 전화가 왔을 때 난 서슴지 않고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성령님께서 기도 가운데 영감을 통해 충고하신 것이다.
"내가 네게 무엇이 부족하더냐? 네게 허락한 사역을 그렇게 쉽게 그만두려 하느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과분하게 잘 해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엉엉 큰 소리로 울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겐 첫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사 사역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헌금을 선교사역에 철저하게 쓴다고 피나는 노력으로 내핍 생활을 해 왔다. 또 정신세계는 내가 선망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희생과 금욕의 생활이었다. 철저하게 자기를 버리는 삶이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떠오를 정도였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몇년 전 일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남자가 내게 청혼을 했다.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사람이고 서로 좋아할 만한 그런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부자였다. 나를 좋아해서 그런지 아프리카 사역도 여러 번 도왔다.
'그와 결혼하면 여왕처럼 남은 삶을 즐길 수 있을까?'
형제들까지도 오랫동안 고된 사역을 해서 하나님이 포상으로 행복하게 여생을 마치라고 은혜를 내리셨나보다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공 사역을 내 안위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지금까지 돌봐주신 것도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였다. 두번째 시험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11) 市공무원과 담판… 교회 부지 무료 기증받아
PNBC선교회(Potchefstroom New Beginning Center·포체프스트룸새출발센터)를 통해 에이즈 고아원까지 8개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를 세울 때마다 사연이 남달랐다.
5, 6번째 교회를 세울 때는 통장에 돈이 별로 없었다. 아파트 관리비를 내려고 관리사무실에 가서 사무책임자인 카렌씨와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는데 동네 부자로 소문난 아드리안씨가 들어왔다.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그는 내게 "새해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별 계획 안 세웠어요. 다만 하나님께서 교회 건축을 하라고 말씀하셔서 뭐 이번에는 양철로 교회를 지어볼까 합니다."
"왜 벽돌로 제대로 짓지 않고 양철로 지으려 하나요?"
"돈이 별로 없어서요. 하나님께서는 교회 건축을 하라 하시는데 돈은 없고, 좀 그러네요…."
"땅을 사십시오. 제가 벽돌로 교회를 지어 드리지요."
"정말이세요?"
아드리안씨는 PNBC선교회 부이사장이었다. 하지만 별로 한 일도 없이 사퇴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말한 것이니 한번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우선 PNBC선교회 이사장 로우 목사님에게 PNBC 이름으로 교회 부지 신청을 관계 기관에 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로우 이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김 선교사님. 시청에서 교회 땅 부지 두 군데를 한 기관에 팔 수 없다고 하니 하나만 사야겠네요."
"그래요? 그럼 하나만 짓지요. 뭐."
양미간을 찌푸리며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교회를 짓겠다는데 관청에서 거부한 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전도 강의를 하러 운전하고 가다 핸들을 꺾어 시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축 담당 공무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PNBC에서 교회 부지 2개를 신청했는데 거절하고 하나만 된다고 하셨습니까? 나는 사업가도 아니고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멍청하게 주기만 하는 선교 사역을 이 땅에서 벌이고 있지요. 조사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헌금이 이 땅에 쓰이고 있는가를…."
"알겠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당당하게 시청을 걸어 나왔다. 며칠 후 로우 이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선교사님. 기적이 일어났어요. 시청에서 우리가 신청한 부지를 둘 다 주겠대요. 그것도 무료 기증입니다."
"아, 그래요? 축하합니다. 모두 이사장님의 훌륭하신 능력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아직도 내가 그 공무원과 싸운 사실을 모른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교회 두 곳이 무사히 건축됐다. 지금은 수백명의 아프리카인이 예배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김용애 (12) 패륜 넘치는 땅… ‘인간 존엄성’에 회의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정말 가난했다.
얼마 전 남아공 목사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서울 서대문구청 옆 개울가에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훔쳐가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아공 포체프스트룸 빈민 지역에서 벌이는 내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들을 배고프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내 사역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한 영화감독이 남아공에 왔다. 여기 저기 사역지를 방문하면서 빈민 지역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광경을 찍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한참을 찍던 영화감독은 갑자기 짜증을 냈다.
"왜 먹는 것만 계속 찍게 하십니까. 시청자들이 이 필름을 보면 지겨워할 겁니다. 너무 식상합니다."
"감독님. 내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굶는 사람들이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역을 많이 소개할 수밖에요."
안타깝게도 남아공 사람들의 배고픔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번은 곰팡이가 난 식빵을 발견하고 내다 버렸는데 지나가던 여인이 얼른 줍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고 덩실 춤을 추며 갔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집 밖에 놔두면 난리가 났다. 쓰레기 봉지를 열고 먹을 것을 찾아 담아가니 집 앞이 온통 쓰레기로 뒤범벅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죽은 짐승을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빈민 지역의 배고픈 사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가 딸을 임신시키고 아이가 태어나면 정부에서 미혼모에게 나오는 월 2만원 정도의 양육비를 타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온 가족이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처음엔 백인 친구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흑인을 멸시해서 과장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상파 텔레비전에서 국민 건강에 대한 좌담을 하는데 거기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 마음이 시릴 정도로 안타까웠다.
에이즈 환자가 숫처녀와 관계하면 병이 낫는다고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딸을 건드리는 아버지들이 있다는 보도도 줄을 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다.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도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가.
넝마를 깔 정도인 흙바닥 방에서 태어나 평생 깨끗한 새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한 사람들.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고 더럽고 깨진 그릇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먹는 아이들. 구멍이 숭숭 뚫리고 조각조각 이어 붙인 양철로 된 엉성한 집들. 남아공 빈민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
배고픈 이들을 돕는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더 많은 손길이 있었으면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13) 아이들 사로잡은 ‘사탕 전도’ 풍성한 결실
전도를 할 때는 꼭 사탕을 나눠준다.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사탕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 교육 방법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힌 뒤 꿀 한 방울을 떨어뜨려 그걸 빨아 먹게 해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생각이 들도록 교육한다. 일종의 '연상 효과'다. 난 꿀 대신 사탕을 활용하기로 했다.
"주의 말씀이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물론 이 나라니까 사탕 전도가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라면 "누굴 뭘로 보고 그까짓 사탕으로 설득하려 하느냐"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사탕 전도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학생들은 나를 보면 "사탕이 온다"며 좋아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나는 선생님들에게도 축복의 말과 함께 사탕을 건넨다.
법원 전도할 때도 사탕을 나눠준다. 사탕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전도 메시지를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들었으면 두 번 들을 필요는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흑인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사탕을 주세요"라고 우기곤 했다. 사탕을 아껴야 하는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가가 오르면서 사탕 값도 크게 올랐다. 10㎝만한 사탕에서 5㎝만한 사탕으로 바꿨다. 갈등이 생겼다.
'하나님, 제발 제가 만난 사람들을 기억나게 해주세요. 그래야 사탕을 골고루 분배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더 전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이 어째서인지 들어주시질 않는다. 얼굴 색깔이 검은 흑인들이라 그런지 나를 비롯한 전도 대원들은 사탕을 주었는지 잘 모를 경우가 훨씬 많았다.
어느 날 전도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성령님께서 내게 영감을 주셨다.
"여러 번 만나더라도 사탕을 주어라. 평생 교회를 다니고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네 선교비는 다 내 돈이니라."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새삼 깨달았다. 성경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는 것을…. 사탕이 아까워 나눠주지 않은 내가 부끄러웠다.
사탕에 얽힌 재밌는 사연들이 많다. 한번은 법원에서 전도를 하는데 별 반응이 없어 마침 지나가던 흑인 판사에게 "그렇지요? 재판관님"하고 응원을 청했는데 이분은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인지라 "당신도 알잖아요. 나는 천국을 안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나는 정색을 하고 "권위 있는 분이 안 믿는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지옥 가면 판사님이 책임 지실래요?"라고 따졌더니, 그는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며칠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흑인 판사가 다가오더니 "그 거룩한 사탕 저도 하나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판사가 교회에 다니기로 한 것이다. 할렐루야! 작은 사탕 1개. 하지만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단서를 제공하는 같아 고맙기까지 하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14) “당신의 뜻입니까,악마의 장난입니까”
학교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학교에 잘 나오고 성경 말씀을 유심히 듣던 아이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죽었단다. 순해 보이던 아이였는데….
자기 가족이 에이즈로 죽어 간다며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남아프리공화국이 에이즈로 창궐한 곳이라니 안타까웠다.
"하나님. 왜 이들은 에이즈로 죽어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악마의 장난입니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에이즈 고아원을 만들라는 영감을 주셨다. 아연실색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사역으로 지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사역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특히 돈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네 스스로 돈을 마련해 썼느냐? 내가 모두 공급해 주지 않았느냐."
따져 보니 정말 그랬다. 한번도 누구에게 헌금을 부탁하지 않았고 6억원 정도를 선교 기금으로 써 왔다. 하지만 에이즈 병이 무섭다고 투덜거렸다. 치료하던 의사와 간호사들도 에이즈에 걸렸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 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너는 내 치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분명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 더 이상 변명할 길이 없었다.
이곳은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들이 많았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 감염된 어린이 에이즈 환자 수십만명이 10세가 안 돼 죽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치료는 엄두도 못낼 뿐 아니라 끼니 해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들을 돌볼 시설과 의료진, 약품은 거의 없다. 현지에서 함께 동역할 사람과 물질적 후원, 기도가 필요한 실정이다.
한 에이즈 여성 환자는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매달렸다. 살고 싶으니 하나님께 치료해 주시길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에이즈 치료를 말씀하신 것이 문득 생각났다.
"하나님. 지난번 기도에 에이즈 환자를 치료해 주신다고 하셨죠? 지금 이 친구를 치료해 주십시오. 그러면 용감하게 에이즈 고아원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몇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살고 있다.
또 한 중년 여성도 자기 아들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했다. 가보니 그 아들은 피골이 상접해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하나님께 이 사람도 고쳐 주십사하고 기도드렸다. 다음 날 갔을 때 집안에는 아무도 없고 침대가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벌써 죽었나?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에이즈에 걸린 그가 군인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지금도 오동통한 얼굴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더 살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에이즈 환자를 치료해 주시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에이즈 병이 이젠 두렵지 않다. 이 땅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이들과 함께 죽고 싶을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용애 (15·끝) ‘희망의 삶터’ 에이즈 고아원 착공
PNBC선교회(Potchefstroom New Beginning Center·포체프스트룸새출발센터)를 통해 에이즈 고아원을 짓고 있다. 에이즈 고아원 안에는 50채의 집을 짓게 되고 한 집에 7∼8명의 어린이가 양부모와 기거하게 된다. 또 호두나무를 심고 가내수공업을 벌여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1만7820㎡의 부지에 담장을 세웠고 두 채는 이미 착공한 상태다. 담장을 먼저 세운 것은 건축자재 도난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양부모와 함께, 그리고 집마다 따로 짓는 이유는 '고아원은 수용소 같은 곳'이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함이다. 고아원이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고아원 부지를 무상으로 기증받은 것도 큰 은혜였다. 고아원 부지를 신청했을 때 시 관계자들은 고아원 땅을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도록 일을 진행해 나갔다. PNBC선교회의 선교와 구제 활동에 감동을 받아서였던 것 같다. 시 관계자들은 먼 이국 땅에서 자기 나라와 사회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하는 내가 마냥 신기한 듯했다.
에이즈 고아원 위치는 포체프스트룸 익스텐션 11번지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하지만 차츰 지역 개발이 예상되는 지역으로 진료소가 옆에 위치하고 있다. 진료소가 옆에 있으니 에이즈 고아원 아이들에게 유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 관계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무료로 땅을 기증받도록 힘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나님께 복받으시라고 기도 드릴게요."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남의 나라에 와서 에이즈 고아들을 위해 힘써 주는 것이 더 고맙다고 했다.
"뭘요, 우리 시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선한 사역에 들어 쓰셨음이 분명했다. 할렐루야!
26년 동안 행복하게 교직 생활을 했던 나 김용애. 이제 남아공에 에이즈 고아원을 세워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정성껏 돌볼 계획이다. 현재 빈민가 어린이 100여명을 보호 사역 중이다. 현지 매스컴들은 한국의 여성 선교사가 벌이는 에이즈 봉사 활동에 큰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닌다. 특히 에이즈 등 난치병 환자들에게 안수 기도와 말씀 선포로 신유(神癒)의 은혜를 베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들에게 벌이는 식품 구제 사역도 계속 인기다. 빵 채소 과일 등 각종 식료품을 슈퍼마켓과 청과시장 등에서 지원받아 14곳 빈민 2000여명에게 나눠주는 푸드뱅크 사역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모이방크 교회 등 8개 교회를 개척했다. 신앙 상담을 해 주고 법원을 방문해 재판받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도 주요 사역 중 하나다.
"에이즈 고아들을 돌볼 의료진과 약품, 생활용품이 부족해 물질적 후원과 기도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도 에이즈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입니다. 남아공의 어린이를 돌보는 것은 아프리카는 물론, 전 세계 에이즈 퇴치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문의:원천교회 02-337-5400, www.wonche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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