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여성, 전문직업인들의 출현
(옥성득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발췌)
조선의 기독교는 항일민족주의와 근대문명을 보급함으로 조선-대한제국의 정부의 정책과 일치하여 고종과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이후 우호적인 태도로 조선은 서구인들에게 의료와 교육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근대사회는 왕족과 귀족 중심의 봉건주의 정치와 사회질서를 타파하였고 개인들의 인권과 여권을 중요시하였다. 기독교가 가져온 평등과 인권 존중은 조선사회에 변혁을 가져왔다.
아래는 초창기 사회 변혁의 물결 속에서 근대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인물에 대한 소개로 옥성득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373쪽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백정 박성춘은 시의인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개신교인이 된 후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가 되고 마민공동회의 연사로 활동하였다. 그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첫 졸업생으로서 첫 의사 면허를 얻어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양반인 남편이 첩을 얻은 후 외로이 지내던 전삼덕은 1900년 전도부인이 되어 북한 지방 전도에 헌신했다. 김점동(박에스더)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보구여관에서 미국인 여의사 홀의 조수로 일했다. 후일 그녀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으대를 졸업하고 1900년부터 첫(여)의사로 일하면서 여성 전문 직업인 시대의 문을 열었다. 부자의 후처로 들어간 하란사는 미국 웨슬리언 대학에서 공부하여 한국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문학사 자격을 취득하고 1906년 이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고아 겸 불구로서 여종이었던 이은혜(이그레이스)는 보구여관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수술 후 바로 걷게 되었으며,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간호원 양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1908년 1회로 졸업한 후 간호원이 되어 독립 전문인의 길을 걸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김마르다 역시 908년 졸업한 후 간호원이 되어 간호양성원학교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 간호원들은 1920년대에 등장한 ‘신여성’을 예고하는 1900년대 판 기독교 신여성들이었다. 이 신여성들은 내연-외연의 이분법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사회 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부와 단체들이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 신지식을 교육하는 학교나 서양병원 등을 설립했으나 조선에서는 그 일의 많은 부분을 선교사들이 담당하였다.
조선의 첫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알랜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출연하였지만 원장을 선교사인 알랜, 헤론, 빈톤, 에비슨에게 맡겼고 나중에는 재정 부족으로 손을 떼었다. 세브란스병원도, 군산의 야소병원, 목포의 프렌치병원, 전주의 제중원도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비롯한 각 도시의 근대식 학교도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대학도 평양 숭실기독교연합대학(1905년)와 서울의 조선기독교대학(1915년)도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기독교는 근대교육을 통하여 전문 직업을 가진 많은 신여성을 배출함으로 여성들을 유교의 봉건질서에서 해방시켰으며 사회 개혁의 한축을 이루도록 지원함으로 독립운동을 선양하며 교회 부흥과 발전 그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2021.9.30.목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