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가 무척 춥다. 서울은 최저 기온이 -16도, 체감 온도가 -20도까지 떨어져 무척 추웠는데 순천 지역도 추위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순천 최저기온이 영하 11도를 기록하며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고 한다. 다들 건강 유의하시고 혹시라도 빙판길 걸으실 때 조심하시기 바란다. 저희 집도 금요일 저녁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토요일 점검을 해보니 가마가 터져 누수가 되어 교체해야 한다고 한다.
* 강원 경기 북부 등 일부 지역에서 -25도(횡성 안흥)까지 내려가는 강추위가 계속 되면서, SNS에서는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가 남극(1월 평균 기온 -27.7도)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그 와중에 밀양에서는 37명이라는 애꿎은 인명이 희생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생과 사가 허망하게 갈리는 이런 비극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 지난주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군산에서 열린 총회에 잘 참석했고 인사도 잘 드렸다. 첫날에는 예배와 강연을 마치고 식사 후 회의가 진행됐는데 이번 총회 핫 이슈는 10년 전 출교당한 김홍술 목사의 복권에 대한 논의였다. 듣던 대로 보수적인 분위가 강한 군산 지역 목회자와 장로들이 주로 반대 발언을 했는데, 1시간 40분 정도 찬반 토론이 이어진 끝에 표결에서는 47대 21로 복권이 가결됐다.
* 그 과정에서 복음교회의 민낯을 볼 수 있었는데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희망을 가질 만한 부분도 있었다. 획일적인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80년인 넘는 역사 속에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교회도 그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창립 13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 창립13주년을 맞아 과거를 돌이켜보며 회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모습을 점검하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오늘의 설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이란 유명한 책이 있는데 미래를 퓨투룸(futurum)과 어드벤투스(adventus)로 구분한다. 우리가 시간을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단순한 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퓨투룸은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과거에 불과하다.
* 오늘 예배 시작 전까지 지금 이 순간은 미래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예배 후에 애찬을 나누는 시간은 아직 미래에 해당하지만 그 역시 과거가 되어 버릴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래는 퓨처(future)의 어원인 퓨투룸이 아니라 대강절을 의미하기도 하는 어드벤투스를 의미한다. 어드벤투스는 앞서 있는 시간인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시간의 발원이자 원천’ 또는 ‘시간이 지닌 가능성의 전제’이다.
* 말이 어렵지 않은가? 신학적 설명은 난해하기 때문에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어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라틴어 퓨투룸과 퓨처의 어원은 '있다, 존재한다'를 의미하는 동사 sum에서 파생(미래분사)된 것이다. 즉 이 단어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드벤투스는 이미 온 미래를 가리킨다. 미래에 존재하지만 과거와 현재에 함께 존재하는 종말론적 미래이다.
* 오늘 교회의 미래는 그런 종말론적 미래 어드벤투스보다 우리가 앞으로 존재하게 될 퓨투룸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시간은 미래에서 시작되어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론 기독교적인 시간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미래에 다가가는 것이기보다 미래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최재천 교수가 편집한 ‘상상오디세이’라는 책을 보면, 미래학자들은 미래란 고체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액체와 같다고 말한다. 즉 막연히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라고 궁금해 하며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미래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미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 기다리던 기다리지 않던 미래는 반드시 온다. 그 미래는 찰나의 현재에 머물고 이내 과거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예배 전의 미래가 지금 현재가 됐고 잠시 후 과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교회가 창립된 지 1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난 13년의 성과와 한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다가올 13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막연히 다가올 미래만을 기다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하는 미래의 교회 모습이다. 바울은 4장 1절부터 성령에 의해 우리가 평화의 띠로 묶여 하나가 된 상태를 유지하라는 권면과 함께 하나의 희망, 하나의 몸, 하나의 성령,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그 하나에 기초해 세워진 교회의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총과 소명을 받은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언급한 바울은 11절에서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교사로 삼으셨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반부에서 무려 일곱 가지의 하나됨을 강조하던 바울이 후반부에서는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바울이 원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다양성 속에서 이뤄나가는 하나됨임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됨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납, 그리고 사랑을 통해 이뤄진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던 “본질에서는 일치, 비본질에서는 관용, 그리고 모든 일에서는 사랑”이라는 모토가 이런 모습에 부합한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본질에서는 일치해야 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관용,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용납하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중산에서 오르면 가장 빠르지만 백무동에서 오를 수도 있고 대원사에서 오를 수도 있다. 그 외에 뱀사골, 피아골, 거림 등 수많은 계곡길로 올라 갈 수도 있다.
*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백무동 코스 하나라고 우기면서 다른 길로 오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나?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처지나 입장에 대한 배려 없는 그런 막무가내식 주장을 하는 사람은 14절에서 언급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생각이 미숙한 사람은사람들의 생각이 다 자신과 같고, 사람들이 더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
* 그런데 생각이 성숙한 사람은사람들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고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여긴다. 교회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제시한다.
* 바울이 제시하는 에베소 교회의 바람직한 미래 모습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공동번역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를 “그리스도를 닮아야”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13절과 일맥상통한다.
* 교회의 올바른 미래는 이런 목적 또는 존재 이유를 위해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머리로 하여 여러 지체가 각자 서로 결합되어 맡은 분량대로 활동하고,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아 성장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움으로써 만들어진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르기” 또는 “그리스도를 닮기”에 더욱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이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로 바꿔 말하면 예수 닮기 또는 예수 살기이다.
*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하비 콕스는 현대의 종교인들이 교리보다는 윤리적인 지침이나 영적인 훈련에 더 관심을 가지며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중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분석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교회의 미래는 바울이 제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르기” 또는 “그리스도를 닮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 제레미 리프킨의 <종말의 시대>에서 ‘종교의 황혼’이라는 섹션은 이런 주장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여러 통계들을 제시한다. 먼저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태도 변화는 다음과 같다.
농업사회
산업국가
탈산업국가
매주 종교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율
44%
25% 이하
20% 정도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
50% 이상
1/3
1/4
종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
3/2
1/3
1/5
이 통계에서 미국은 산업국가 중에서 유일한 예외에 해당하는데, 그 이유는 노인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젊은이들은 그런 성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미국 역시 다른 탈산업국가의 뒤를 이을 것이다.
* 그러나 기술적으로 진보한 사회일수록 전통적인 종교에 대한 충성도는 감소하는 반면, 개인의 영성 훈련(만물에 담긴 넓은 우주적 계획의 의미를 찾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탐구)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1년부터 영성 훈련에 대한 변화를 추적해 온 세계 가치관 조사의 질문(“인생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하나?”)에 대해 “자주”라고 대답한 사람들의 비율 변화는 다음과 같다.
1981년
2001년
캐나다
37%
52%
이탈리아
37%
50%
멕시코
31%
47%
남아프리카공화국
39%
54%
* 미국에서는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1999년 이후 10% 증가했고, 그 비율은 2006년에 미국 성인의 40%에 이르렀다. 이처럼 영성 훈련이 증가하고 종교 성향이 감소한다는 것은 개인의식과 자기표현이 커진다는 징조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막연히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라고 궁금해 하며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둔감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예민해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종교/교리에서 영혼/영성으로 관심이 바뀌는 현상은 ‘진정한 신자’와 ‘이교도’를 갈라놓는 고대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적 편견과 독선적인 교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 창립 13주년을 맞는 하늘씨앗교회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쪽에 속한다면, 이 질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축복받는다는 가르침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런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르기” 또는 “그리스도를 닮기”(예수 닮기 또는 예수 살기)의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인류의 지식 총량은 13개월마다 2배로 증가 중이며 그 주기는 계속 단축될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다, 이런 급속한 변화 속도 때문에 244년 전통의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 2010년 인쇄본 발간을 중단했을 정도다. 과거에 존재했거나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 가능성은 지난 100년 동안 80%에서 5%로 감소한 반면, 미래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날 가능성은 5%에서 85%로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13년 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하늘씨앗교회가 13년 후에도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보시기 바란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 예수를 머리로 하여 여러 지체가 각자 서로 결합되어 다양성 속에서 이뤄나가는 하나됨에 대해 생각하던 중 얼마 전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GRB090429B이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름의 별이 있다. 이 별은 2009년 NASA에서 처음 발견했는데, 지구로부터 무려 131억 4000만 광년이나 떨어져있다고 한다. 131억 광년은 약 9조 4600억 km인 1광년의 131억 4000만 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 1광년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거리인데, 그보다 131억 4000만 배나 먼 거리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띵해지지 않는가. 그런데 광년은 거리만이 아니라 시간을 의미하는 단위이기도 하다. 1광년 떨어진 별이 관측된 순간의 모습은 현재가 아니라 1년 전의 모습이다. 131억 4000만 광년 떨어진 GRB090429B가 2009년 관측됐을 때의 모습 역시 현재가 아니라 131억 4000만 년 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별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 그 별은 이미 사라졌거나 다른 별 안에 흡수되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은 같은 시간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1초 전의 달부터 131억 4000만 년 전의 GRB090429B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다른 시간의 별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의 별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많은 별들이 지구에서 같은 거리에 위치해야 하는데 그런 우주의 모습은 기괴할 것이다.
*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른 시간의 별들이 수없이 모여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주를 구성하는 것처럼, 우리의 교회나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수없이 다른 개인과 개인이 모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채근담에는 “사람들을 보면 갖춘 이도 있고 못 갖춘 이도 있거늘 어떻게 나 혼자만 모두 갖추어야 하겠는가? 자기 마음을 보면 사리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거늘 어떻게 남들은 모두 이치에 맞기를 바라겠는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 나 혼자 모든 것을 갖출 수도 없고, 내가 그런 것처럼 남들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의 미래를 우리가 아름답고 알차게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루이스 스티븐슨은 “하루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을 거둬들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뿌렸느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의 이름처럼 우리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우리의 수확량이나 수확물이 아니라 우리가 뿌린 씨앗이라고 믿는다.
* 씨앗을 뿌리고 나면 한동안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씨앗은 땅 밑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가 할 일은 묵묵히 하나님나라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도록 양분을 공급하며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방식은 다를 수 있어도 지향하는 목표는 같아야 한다.
* 지난 13년 동안 이 교회를 세우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후의 시간 속에서도 함께 하시며 지켜주실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13주년을 맞은 하늘씨앗교회의 구성원 각자가 처음 이 교회를 통해 가졌던 새로운 희망과 결단을 지켜나가면서, 더욱 아름답고 성숙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시간 동안 함께 그 길을 걸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란다.
첫댓글 천황봉에 오르는 길이 여러 길이 있듯이
씨앗님의 믿음의 분량과 신앙관 각자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할때 화평이
넘치는 교회가 되지않을까요?
그렇겠지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