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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이러한 흑피옥 조각상을 제작했을까?
수많은 옥 조각품 중에서 유일하게 현대인과 거의 같은 복장을 한 수염을 기른 남자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다른 인물 조각상과는 전혀 다른 특징들을 매우 많이 가진 특이한 조각상이다.
1)수많은 인물조각상들이 거의 모두가 전신조각상이며, 상대적으로 인물의 얼굴이 매우 작게 표현된 점에 반하여 이 인물상은 독특하게 흉부 이상만 조각되었고 전형적인 흉상 초상 조각상이다. 자조상으로 보인다.
2) 수많은 인물상들의 머리모양은 대체로 길게 늘어 뜨렸는데, 이 인물은 상투를 틀었다. 뒷모습에 머리카락을 표현한 곳이 없이 머리는 모두 위로 올려져 있으므로 틀림없는 상투를 튼 모양인데 이 역시 수많은 조각상 중에서 유일한 형태이다. 그리고 상투 끝에 상투머리 덮게인 관이 있고 관에는 새(매미?) 모양 장식이 있다. 나중에 갓을 써서 상투를 보호하는데 갓God은 영어로 God 신神이며, 갓머리는 상투를 표현한 것으로 원래는 우주선이 지붕에 앉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윤복현님의 주장으로는 영어의 성인聖人을 뜻하는 ‘세인트’ 라는 단어는 ‘상투’가 변한 말이라고 한다. 즉 상투란 하늘부족만이 하는 것이었다. 갓은 말총으로 만들며 새 장식은 날개 달린 천마를 상징한다. 즉 상투와 새 장식 갓은 신神(하늘에서 온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3) 이 사람의 안면각은 다른 인물들의 안면각이 80도 이내인 점과 비교하여 거의 직각을 이루고 있다.
4) 이 인물의 얼굴의 상하 비율은 다른 인물상들이 거의 정사각형인데 비해 이 인물은 상하로 긴 장방형이다. 극히 지적인 인상이다.
5)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상이다. 즉 수염을 기른다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뜻한다. 콧수염을 기른 이들은 신적인 존재로서 수명에 제한이 없었다.
6) 상의에 두루마기의 에리처럼 보이는 장식이 되어 있고 상체에 의복을 걸친 거의 유일한 인물상이다. 자세히 보니 털은 한쪽으로만 그은 사선으로 처리한데 반하여 이 무늬는 격자무늬이다. 이것은 분명 격자로 짜여진 천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매우 특별하며 예외적인 조각으로 이 인물이 특별히 중요한 인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누가 보던지 당시 돌도끼를 사용하는 원시인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며 그들이 바로 무덤의 주인공이고 이 조각품들을 조각한 장본인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바로 시리우스라는 별로부터 이동해 온 우주인들로 보인다. 그들이 세운 문명이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 이다. [인용 끝]
자! 그러면 그 잘생긴 스타 배우를 마고라 할 것인가?
덮어 놓고 여신상만 찾을 일이 아니다. 바이블에 노아를 보라 노아는 홍수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선지자인데 남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이블의 원조는 힌두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힌두 신화에서 홍수를 이겨내고 인류를 재창조하는 神의 이름은 마누스이다. 마누스는 남자가 분명한 것이 그의 아내 이름이 마누라이기 때문이다.
* 마누스(manus) : 인류의 조상, 지혜의 화신.
* 마누라(Manura) : 여신(女神) 여자 제사장, 여자 추장,
인도의 힌두 신화학자들은 진화의 마지막에 씨앗 마누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점을 72번 째 마하유가(Maha Yuga) . 4320000 x 72로 지목하였다. 인도 경전 '샤타파타 브라마나(Shatapatha Brahmana)'에 대홍수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누는 노아의 특성과 아담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브리테니카 온라인 사전 인용
" '샤타파타 브라마나(Shatapatha Brahmana)'를 보면 마누가 친절을 베풀었던 물고기로부터 전 인류에게 대홍수가 덮치리라는 경고를 듣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마누는 물고기가 일러준 대로 배를 만들었다가 홍수가 닥치자 이 배를 물고기의 뿔에 묶어 산꼭대기에 있는 쉴 곳으로 안전하게 대피했다. 홍수가 물러가자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인 마누는 제물인 버터와 신 우유를 물에 부어 제사를 지냈다. 1년 뒤 스스로 '마누의 딸'이라고 하는 여자가 그 물에서 태어났고, 이 둘은 그 뒤 땅 위에 다시 번성하게 된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에서 이 물고기는 브라마 신과 동일시되지만,
〈푸라나스 Purāṇas〉에서는 비슈누 신이 물고기로 변신한 마트시아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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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스는 3억 1천1백4만 년 마다 다가오는 지구 재창조기에 나타나는 구원의 神이다. 힌두 경전에 실린 말이 전부 산스크리트이고 우리말인데 우리의 옛 조상들이 그 신화적 사상과 철학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3억 1천1백4만 년 전에는 판게아 개벽기였다. 즉, 지금 지구 땅덩어리는 판게아에서 갈라지며 이룩된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아예 판게아(Pangaea)를 반고(盤古)라고 한다. 비록 신화이지만 일리 있는 말이 아닌가!
3억 1천1백4만 년이라는 숫자는 간지(干支) 숫자이다. 다시 말해 60의 배수이다. 시계의 숫자판을 분침 시침이 돌고 돌듯이 시간이 돌고 돌아 3억 1천1백4만 년이 지나면 지구는 다시 창조된다. 그때 인류는 죽는 사람도 있고 살아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마누스가 그 구원의 손을 펼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발굴 문명학자들은 틀에 박힌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어떤 고구려 무덤에서 닭 모양이 새겨진 유물이 나왔다고 덮어 놓고 봉황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2차, 3차 등등 줄이어 마고성을 떠난 사람들
황궁씨가 권속을 나누어 무리들을 출성시키기 전에도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리들은 멸종되거나 살아남았어도 소수 부족 단위로 남아 지금의 동남아 일대와 중국의 오지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멀쩡한 神의 자식들이 오미의 재앙 이후 태어나는 자식마다 금수의 모양으로 태어나니 이 시기가 3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후 환인씨(1만 1천 년 전)때에 와서 지기(地氣)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부도지)
[인용문]
부도지 제 9장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에 잡거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인용 끝]
이런 내용을 근거로 스토리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2차, 3차 줄이어 마고성을 떠난 사람들과 후기 황궁씨 일족도 차례로 흑피옥 종족이 사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흑피옥 종족의 결속력은 너무나 강하여 외부인을 보면 죽이려 달려들었다. 그후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에 가서 정착하게 된다. 그들 중 태행산맥을 넘어 간 사람도 있었고 태행산맥 서쪽 아래 요하 근처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다.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후기 출성족(後期出城族)들의 일부는 요하 일대에 자리 잡고 흑피옥 종족과 1천년 동안 이웃해서 살다보니 옥(玉)가공 기술이 전파되고 서로 무역을 하는 등 제법 왕래가 많았다.
그러나 생긴 모습이 많이 달랐다. 흑피옥 종족은 '난장이'들이 모여 사는 나라였고 요하 일대는 그래도 정상인들이 살았다. 요하를 넘고 태행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간 사람들은 멀리 일본까지 갔다. 그리고 청구와 한반도에도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 황궁씨의 후예는 천산을 출발하여 태행산맥을 넘고 부상국에 당도하니 장차 이곳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길지였으므로 요녕성 일대에 아사달을 짓고 영주, 봉래, 방장, 지리, 한라, 백두 등지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대라 신선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 부분도 소설 님금나무에 이야기로 만들어 수록했습니다.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약 1만 1천 년 전후하여 서해 바다가 육지였을 때 천축 실담어를 사용하며 대륙 쪽에서 한반도로 걸어서 들어 왔을 것이다. 그것은 산동반도와 절강성 일대에 고대 신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언어가 우리나라 경상도와 유사한 것이 많다. 이는 얼마 전 광동어를 전공한 김준성이라는 한 유학생이 알려 주었다.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사람들의 먼 조상은 지금은 바다가 된 서해 지역에 그냥 살았지 동쪽으로 의도적으로 이주해온 것은 아닐 것이다. 바다가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려 7천년 정도에 걸쳐 서서히 지형이 바뀌는 것이므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은 한반도와 대륙 땅, 일본까지 걸어서 오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부상국이다.
부상국은 발해라고도 하고 한밝 땅, 밝달, 배달 환국, 청구 등 명칭이 많다. 명칭이 많다는 것은 사연도 많은 것이고 사연이 많으니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 작은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조선까지 다 찌그러트려 넣은 학자들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꼭 반성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황궁씨의 무리들은 부상국의 좋은 땅에서 풍요하게 살았다. 특히 쌀과 콩, 조, 기장 그리고 해산물, 범피, 호피, 원숭이, 코끼리, 물개가죽, 압록강에서 나는 수암옥 등 많은 교역 물품을 요하 일대에 무역상들에게 공급하였다.
당시 환인씨의 나라는 천제울국으로 이전원에 있으면서 전 세계에 파견사를 보내 다스렸다. 황궁씨 일족들이 청구에 먼저 들어와 발판을 마련하여 훗날 지금으로부터 약 6천 5백 년 전에 천제울국에서 환웅씨가 무리 3천을 이끌고 부상국으로 가게 된다. 이른바 환웅이 서자(庶子)라는 것은 神의 아이들이란 뜻이다. 서자(庶子)의 올바른 뜻은 시바(Siva) 神이 보낸 사자이다. 서자(庶子)의 올바른 뜻은 다음 장에서 소개한다.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서, 1만 2천 년 전 대홍수 시기가 도래 되었다. 그것은 몇 백만 년 간 지속되어 오던 빙하기가 갑자기 멈추고 전 세계적으로 해빙이 시작된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융기하고 갈라지고 폭우가 쏟아지고 해일이 일고 지구는 총체적 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천 년이 지난 후 북방 시베리아 트랩에서 강력한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폭발은 간헐적으로 일백 년 동안 폭발하여 전체 지구의 기온이 올라갔다. 화산이 폭발하여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그 원인이다. 지구 온난화는 약 2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홍수에 떠 밀려온 옥조각들이 지천에 널브러지니 흑피옥족은 신나게 더 많은 조각품을 만들고 요하 일대로 보내 식량과 맞바꾸며 교역과 왕권력을 강화 시키고 아주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영거드라이아스 기간 동안 흑피옥족은 갑자기 멸종했다. 그들은 추위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약 2백 년간 지구는 얼어붙었다. 이 기간 동안 요하 일대로 피신한 사람은 평생을 '난장이' 취급 받으면서 공방에 처박혀 옥기 가공만 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결국 적자생존 법칙에 의하여 멸종했다.
이제 옥문화는 요하 일대에서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피옥 기술이 100% 전수되지 않았으므로 옥을 가공하는 모양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옥이 귀해 졌으므로 조각품의 크기도 줄었다. 검은색 코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옥은 전부 수암옥으로 대체 되었다. 구하기 어려운 경옥은 이미 화산재에 덮여 땅속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끔 곤륜산 쪽에서 오는 무역상들이 곤륜옥을 가지고 와서 교역했다.
요하 일대도 흑피옥과 마찬가지로 옥 공업단지 화 되었다. 사람들이 옥에만 집착하고 교역으로 먹고 살았으며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물이 풍부하고 나무도 많으며 초원이 있고 호랑이 곰 늑대 여우 돼지 닭 사슴 등 온난한 곳에 사는 동물과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 모두가 집합해 있었다. 이곳의 기온은 여름에 30도 이상으로 올라갔고 겨울에는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스텝형 기후였다. 그러나 물이 풍부하여 농업, 목축 등으로 살 수 있었으므로 이곳도 자급자족이 되어 외부세계로의 진출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청궁씨 계족이 진출했던 중원은 군사력이 강해지고 진취적으로 성장했지만 군대 자체가 없었던 홍산 문화는 점차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흑피옥의 역사는 1만 4천년 전에 시작되고 홍산문명 옥의 역사는 8~9천년 전에 시작된 것이다.
그 문명이 하가점 문명까지 이어지게 되고 하가점문명은 나중에 상나라까지 이어진다.
역사 공부는 책에 나오지 않는 물길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빙하가 녹은 물이 넘쳐흘러 큰 강이 아주 많았다. 도시에 흐르는 물빛이 아름다우면 성인이 사는 곳이고 물이 더러우면 군주가 게으른 것이다. 고대에 큰 도시는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강이 있는 곳에 건설 되었다. 서안은 고대에 물이 풍부했던 도시이다. 섬서성(陕西省)이라는 명칭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서안 일대는 협곡이 아주 많은 곳이다. 그것은 고대에 많은 물이 흘렀다는 것을 지형이 말해준다. 그 많은 물과 강이 마르고 나서 수도는 낙양으로 옮겨졌다. 물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서안에는 지금도 큰 강과 물이 많다. 하지만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큰 강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에 도읍지가 옮겨간 것이다. 해빙기 때 갑자기 불어난 물은 수원이 고갈되면 자연히 사라지게 되고 물살에 깎여나간 지형만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한 사실을 지금 서안에서 말라버린 옛 강줄기가 잘 말해준다. 고대에는 사통팔달로 흐르는 물길 위에 배를 띄우고 본토에서 서역으로 서역에서 중원으로 중원에서 낙양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다. 물이 넘쳐 났던 시대의 옛 이야기이다.
* 홍산 문명의 태동은 약 1만 2천 년 전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한 유물의 기록으로는 약 9천 년 전부터 시작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물을 연구한 사례는 너무 많으므로 생략한다.
* 홍산 요하 문명을 많이 연구하신 분이 우실하 박사이다. 박사께서 연구한 자료를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에 감사 드리며 홍산 문명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박사님의 연구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대륙의 지형도, 인류는 태극에서 태어났다. 그 중앙에 태극마칸사막이 있다. 사각형 안에 돈황 관중평원 서안이 있다. 해빙기 물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통팔달 세상의 중심이 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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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요하 문명의 멸망
홍산 문명은 곰토템을 가진 문명이었으므로 우리 고조선의 실체를 증명해주었다. 홍산 문명은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파형청동검, 옥 귀걸이 고인돌 등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다. 홍산 문명은 부상국에서 많은 수산물과 농산물 그리고 옷감, 범피, 호피, 물개가죽 등을 공급 받았으며 곰과 호랑이 토템 사상을 전파했다. 웅녀와 환웅 등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홍산 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환웅은 천산에서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부상국으로 곧장 온 초능력자들 이었다. 그후 환웅은 홍산 문명의 부족들과 융합하여 후손을 일구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배달 환국은 홍산에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며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다. 배달환국은 천산에서 직파한 선진 세력이고 비, 구름, 바람을 거느리고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펼치는 문화와 문명을 겸비한 초능력자 집단 이었다. 그 후 홍산 문화와 융합한 것이다. 삼국유사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옛 문헌을 지금까지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신화라 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많은 역사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책이지 그것이 신화였다면 ‘삼국신화’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홍산문명에서 최고(最古)로 오래된 유적은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7000-BC6500)이다.
"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 (우실하)
홍산에서 약 400KM 떨어진 곳에 다링어(Dalinur)호수가 있다. 지금 이 호수의 물줄기를 살펴보면 큰 지류만 5개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홍산 일대에 물을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끊기고 호수만 남아 있다. 물이 끊어진 이유는 사막화가 진행되기 때문이지만 왜 사막화가 촉발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지반 붕괴에 있었다. 북경대 교수 리산해의 말에 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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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의 역사탐험 -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
《동이족의 요하 문명》
이거 아주 중요합니다.
차인표의 역사탐험 -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
《동이족의 요하 문명》
" 홍산문화 시기 후기에 대흥안령산맥이 단층작용으로 끊어졌습니다. 남쪽의 강소성 부분과 북쪽의 심양(요녕성 성도)에서도 역시 단층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지역의 단층작용으로 중국 중원의 평원이 상대적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서부는 끊어진 부분으로 인하여 높아졌고 대릉하(大凌河) 유역과 요녕성 서부 즉 홍산 문화 지역도 상대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런 지각운동으로 결국 대릉하(大凌河) 골짜기의 물도 강물도 계속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물이 마르면 지하수도 감소하게 되고 지하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면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황사도 심해집니다. 이런 지각운동 이후에 사람들도 점점 물이 많고 식물도 많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지요."
당시 비옥한 땅에서 뛰놀던 동물들은 모두 온난한 초원지대에서 자라던 것들이다. 신수도안토기(神獸圖按土器)에 그려진 문양은 돼지, 사슴, 새, 곰, 호랑이, 닭(봉황) 등이 있는데 이들 중 특히 돼지와 닭은 따뜻한 곳에서 키우는 동물이다. 돼지야 말로 사람과 똑같은 식성을 가진 동물인데 당시 동물들만 보아도 기온이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하가점 하층 유물의 특징 : 곰 이빨 . 턱뼈, 개, 호랑이 유적에서 발견 이것은 사람이 살기가 좋았던 시절에 나오는 것이다.
하가점 상층 유물의 특징 : 양, 염소가 나온다. 그것은 기후가 척박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산. 요하문명은 맥이 끊겼다.
하가점 상층 . 하층 문화라는 것은 하가점 지역의 땅을 파고 보니 깊은 곳에서 발견된 문화와 얕은 곳에서 발견된 문화가 많은 차이를 보인 것을 말한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기원전 (2000년~1500) 시대로 본격적인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그리고 하가점 상층 문화는 하층 이후의 것인데 이 시기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사라졌다. 그 때는 상나라가 흥했던 시기인데 이미 요녕성 지역에 고조선도 있었다.
결론하면 요하문명의 마지막 세대인 하가점 문화는 사막화로 인하여 수원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상나라나 고조선으로 이주해버렸다고 생각된다.
빗살무늬 토기는 요하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인데 빗살무늬보다 발전된 형태의 채도 토기는 상나라에서 발견된다. 채도는 빗살이 없기 때문에 빗살무늬토기 보다 더 구워내기 어렵다는 사실로 보면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하던 사람들이 상나라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상나라의 옥기모양과 홍산 문화의 옥기 모양이 똑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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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피옥 문명 시대의 상상도 그림 채희석
하가점 하층 문화는 기원전 (2000년~1500) 시대로 본격적인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그리고 하가점 상층 문화는 하층 이후의 것인데 이 시기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사라졌다. 그 때는 상나라가 흥했던 시기인데 이미 요녕성 지역에 고조선도 있었다.
이렇게 1만4천년전 마고성에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환민족과 홍산문명족 하화족 그리고 神의 나라에서 파견되는 환인족 등의 이동과 흐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부적으로 이 시기에 묘족이 있엇는데 苗는 삼스크리트로 Mi 미 라고 합니다.
정착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묘족(苗族)의 탄생
무인(巫人)에 대해서는 이야기 환단원류사‘님금나무’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님금나무는 별책부록으로 발행 되었으므로 이즈음에서 꼭 읽어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은 혹독한 천계 수련을 거친 사람들이며 몸은 강철과 같으면서도 새털처럼 가볍고, 공중을 나를 수 있으며 장풍을 사용한다. 능히 귀신을 다룰 수 있으니 천국에는 귀신이 도망가고 없다. 神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신인(神人)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많은 초능력자들이 태어났지만 흐르는 세월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아가게 했다. 다시 환란의 시대가 시작 되었으니 지금은 령(靈)들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며 활개 치는 사회가 되었다. 미묘한 氣의 움직임을 느끼는 사람도 령(靈)을 다스리지 못하니 지금은 무인(巫人)이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묘(苗)를 말하자면 인류의 뿌리요. 씨앗이다. 마고성에서 묘(苗)가 나왔다. 뿌리를 내린다. 기반을 잡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고성을 먼저 빠져나간 사람은 묘(苗)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성을 파헤쳤고 묘족의 근거지인 삼위산을 공격하여 묘족의 땅을 빼앗고 대륙 전체로 흩어지게 했다.
[인용문 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
번역 : 김은수
부도지 제 17장
이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 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 번 째의 큰 변이었다.
부도지 제 18장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 살 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인용끝]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묘예(苗裔)는 황궁씨의 후손이라고 못 박고 있다. 풀이하면 묘(苗)의 후손은 황궁씨가 천산주로 이주하여 살던 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도요(陶堯)가 군사를 보내 습격했다고 한다. 이때 묘예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그만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묘예가 쫓겨나 흩어졌다는 말이다. 그곳은 황궁씨가 유인씨에게 물려준 땅이며 임검(壬儉)씨까지 그곳에 살았던 땅이다. 훗날 임검(壬儉)씨께서 동북의 자방으로 황궁씨의 후예 6만을 이끌고 이주했기 때문에 부도가 비어 있는 틈을 타 도요(陶堯)가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임검(壬儉)씨는 단군 님금을 말한다. 단군이 님금이라 하니까 도요(陶堯)도 님금 이라고 한 것이다. 임검(壬儉)이란 북방 임, 검소할 검으로 물과 생명을 다스리는 북극성의 神이라는 뜻이다.
삼신오제본기에 “천하의 주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난다. 이를 북수라 한다.' 라고 했다. 대저 북극은 수정자가 기거하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태백일사 번한세가에는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 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垈)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자 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太子至塗山主理乃會因番韓告虞司空曰予北極水精子也汝后請予
以欲導治水土拯救百姓三神上帝悅予往助故來也“
수정자는 북극성에 계시며 물을 다스리고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神이다. 태자 부루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국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래서 임검(壬儉)이란 말을 쓴 것이다. 임검(壬儉)을 산스크리트로는 님금 이라 하는데 님은 제왕이란 뜻이고 금은 금속을 말한다. 생명력 있는, 오지다. 다부지다의 뜻이다.
“님깜[nimi-kam] : '니미'와 '깜'을 붙여서 발음한 것이다. 님 또는 니미[nimi]는 산스크리트로 왕(王, 帝)를 뜻한다. 깜[kam]은 금(金)과 뜻이 같다. 생명력 있는, 오지다, 철, 구리, 은, 금 등 금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장군 깜 하듯이 우두머리, 제왕의 뜻도 있다.” (강상원 . 조선 고어 실담어 사전)
요는 천산의 남쪽에서 일어났으므로 요가 공격한 부도가 있었던 곳은 천산의 북쪽이며 그곳은 돈황 일대였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산주로 나아가면 결국은 돈황으로 올 수 밖에 없다.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지금도 있다. 구 소련의‘유엠 뿌진’이 쓴‘고조선‘ 이라는 책에도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사서의 기록에는 묘예(苗裔)가 삼위산(三危山)에 은거한 것으로 적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에 삼위산(三危山)이 기록 돼 있다.
" 古天山 東盡境(山海經) 三危山 西三百五十里 曰 天山 漢書 西域傳 西域 南北有大山 通典 始自張掖 而西至于 庭州 山皆周遍 一統志天山一名白山自哈密東北境綿亘而西 …"
" 천산은 동진경(산해경)에 삼위산 서쪽 삼백 오십 리에 천산이 있고 한서 서역전에 서역에 남북으로 걸쳐 있는 큰 산이며 통전에서 말하기를 장액의 서쪽, 모든 산은 천산의 위용이 골고루 미친다. 일통지에 천산은 일명 백산이라 하고 합밀(투루판) 동북 끝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다. "
[인용문]
흠정서역동문지 4권(卷之四)
“'천산남북로산명'(天山南北路山名)에 삼위산(三危山)
의 위치와 천산(天山)의 위치 천산은 일명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고 '대명일통지' 등의 고서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부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환인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인용 끝]
이것은 무엇을 말 하는가?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三聖紀)에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흠정서역동문지에 백산(白山)은 천산이라고 기록 돼 있고 삼위산의 서쪽에 천산이 있다고 기록 돼 있다. 그러니 황궁씨가 천산주로 들어간 이후 환인씨는 천산에서 道를 일으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도요(陶堯)는 삼위산의 남쪽에 있었고 부도는 삼위산과 그 북쪽인 돈황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결론 지어 진다. 임검씨는 돈황 일대에 홍수가 끝나 점점 물길이 막히고 농사지을 토지가 줄어들어 또 다른 길지를 택해 부도를 옮긴 것이다. 그러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는 묘예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문제는 뒷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도요(陶堯)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살펴보겠다.
[출처] 679. 빙하기 이후 황궁씨 계족 천산주 이동 – 해설 2|작성자 집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