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은 서일이 총재로 있는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이후, 왕청이 아닌 밀산으로 이동. 서일 총재와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서로군정서의 지청천과 함께 독립군 개편에 참여하였다. 그 후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갔으나 무장을 해제하고 자유시(스보보니드)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밀산으로 돌아 왔다. 1925년 영안현에서 북로군정서 잔존 부대원과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들과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그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졸업생들과 신민부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산시에 소재한 김좌진 장군 기념관(1930년 1월 24일에 박상실(공도진)에게 암살당한 자리에 세우짐)
기념관 앞에 펼쳐진 너른 평야(정미소를 운영할 만한 곳이다)
기념관 주변의 마을 집들
기념관 가는 길에 있는 집들
기념관 앞 조선족광장 좌측 앞에 있는 논과 농가들
기념관 정문
1928년 2월 신민부 군정파의 리더로서 영안현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
1928년 12월에는 남만주 참의부 리더들과 함께 혁신의회를 조직에 참여.
그러나 민족주의 계통의 단체들과 사회주의 계통 단체들의 주도권 싸움으로 실패.
1929년 북만주지역 민족유일당으로서 한족총연합회 창립.
1929년 한족총연합회 사업의 일환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중에
1930년 1월 24일에 정미소에 위장 취업을 한 공산주의자 청년 박상실(공도진)에게 저격을 당하였다.
기념관에 들어 가지 못하고 담장 위로 바라 보며 묵념하였다.
목단강시에서 밀산, 당벽진까지 만해도 267km이다.
분홍색 동그라미를 친 곳이 산시, 해림, 목단강시,영안시, 목릉시이다.
이 지역은 1920년대 북만주에 자리잡은 신민부 군정단과 한족총연합회의 할동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