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회 헬機 기총소사
헬기 기총소사는 있었는가, 없었는가.
光州 5.18민중항쟁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쟁점의 하나가 바로 헬기 기총소사 여부다.
헬기기총소사 문제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두 차례의 검찰수사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출동했던 군이나 신군부세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헬기에서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증언과 헬기 기총소사를 뒷받침하는 군의 각종 자료 등으로 미뤄볼 때 `헬기 기총소사'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다"는 데 이 문제의 중요성이 있다.
헬기기총소사에 대해 95년 7월 18일 발표한 검찰의 1차 수사결과 발표문은 이렇다.
"5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와 무장헬기 AH-1J(일명 코브라) 4대를 지원했고 사태 기간중 헬기가 48시간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기재외에 실제 공중사격 실시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헬기가 출동은 했으나 사격은 없었을까.
우선 80년 직후 전교사에 의해 작성돼 지난 89년 국방부가 국회 光州특위에 제출한 `光州소요사태분석'의 항공관련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위진압에 동원된 헬기가 무장을 했었고 다량의 탄약을 사용한 것으로 돼있어 군 기록에 의해서도 헬기 기총사격 사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 분석집은 항공작전의 문제점으로 `불확실한 표적에 공중사격요청'을 지적으로 있으며 세부내용으로 ▲표적지시의 불확실▲요청표적 위치에 아군병력 배치▲공중사격 감행시 피해확대 우려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헬기가 상부로부터 사격지시를 받았고 최소한 사격을 할 의사가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군부측은 물론 검찰까지도 "전교사 교훈집의 `유류 및 탄약의 높은 소모율'이라고 기재된 것은 교훈집 작성시 헬기 사용의 일반적 교리상의 문제를 육군 항공 운용교범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적시해 놓은 것이고 실제 다른 사례에 비해 光州지역에서 유류나 탄약을 많이 소모했다는 것이 아닌 점등에 비추어 헬기 장착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인명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없었다"(검찰 1차수사결과 발표문중에서)는 주장을 펴고 있다.
"탄약의 높은 소모는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작전 기간중(7일) 탄약을 1인당 평균 59발 소모했다"는 교훈집 기록이나 "항공대에 20mm 발칸포 탄약 1천5백발 지급"이라는 충정작전상보 등의 기록과 상치된다.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다른 자료.
95년 7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문 1백16쪽을 보면 "5월 22일 오전 10시45분 31항공단 103항공대로부터 AH-1J(코브라)헬기 2대와 500MD헬기 5대가 도착하여 전교사의 작전통제에 들어갔으며 黃永時 육군참모차장, 金在明 육본 작전참모부장, 李相勳 육본 작전처장은 金舜鉉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서 AH-1J헬기로 조선대 뒷산에 위협사격을 하여 겁을 주어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지시하였으나 항공단의 반대의견으로 실시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헬기가 출동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교사 교훈집에 따르면 "5.18당시 5월 21일부터 29일까지 光州일대에는 항공 제1여단 31항공단과 61항공단 군인 1백8명이 500MD 12대, UH-1H 11대 등 모두 다섯 기종에 31대의 헬기가 동원"된 것으로 돼있다. 병력공수와 선무활동, 무력시위를 위해 운항한 시간만도 무려 8백27시간으로 적고 있다.
이번에는 당시 헬기사격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80년 당시 27세의 승려였던 李光榮씨(43.부식납품업.光州시 東구 山水동). "월산동 로터리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헬기에서 불을 뿜는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지요. 동시에 우리가 탔던 지프에 총격이 가해졌습니다" 李씨가 헬기기총소사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각은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사이. 자신을 비롯 6명이 군용지프를 타고 도청을 향하던 중이었다는 李씨는 월산동 로터리부근에서 갑자기 나타난 헬기에 당했다고 주장했다.
李씨가 주장하는 5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사이라는 시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목격자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시각이 이 무렵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鷄林동성당 신부였던 曺비오신부(현 光州봉선동성당 주임신부)의 증언은 李씨가 증언한 기총소사 시각과 위치를 비교할 때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21일 오후 2시께 금남로의 상황을 파악키 위해 호남동 성당을 막 나서는데 光州시내 사직공원 상공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드드득' 불빛이 번득이며 연달아 세 번 지축을 울렸어요" 호남동 성당쪽에서 바라본 사직공원쪽은 李씨가 주장한 월산동 로터리부근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지난 89년 MBC가 방송한 `어머니의 노래'에서 이 같은 증언을 했다가 당시 무장헬기를 지위한 조종사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던 曺신부는 "본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95년 4월 光州를 방문, 헬기기총소사 목격을 증언한 미국인 피터슨목사의 증언을 보자. 당시 선교사로 있던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저서 `5.18광주사태'라는 체험기를 통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오후 3시15분쯤 헬기가 거리에 있는 군중에게 총을 쏘기 시작한 이후 사상자들이 병원에 매우 급작스럽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30분쯤에 들어온 중학교 여학생이었다"고 밝혀 헬기사격을 주장하며 자신이 찍은 당시 헬기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95년 5월 천주교 光州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공개리에 5.18당시 헬기기총소사 피해자나 목격자를 찾았는데 10여명이 증언해 왔다. 이 가운데 光州시 南구 眞月동에 사는 徐모씨(여.43)는 "당시 光州大앞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살았다. 21일 오후쯤 방안에 있다가 많은 총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한참 뒤 남편이 들어와 모두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 정신을 차려보니 지붕 천장에 구멍이 뚫려 기왓장 틈으로 하늘이 보였고 벽에도 수도 없는 총탄이 박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5월 21일 오후 3시를 전후한 시각에▲주로 도청쪽에서 光州공원이나 사직공원, 또는 월산동 쪽으로 비행하며 총을 쏘았다는 점 등은 공통적이다.
풀리지 않는 쟁점 `헬기기총소사'는 어떻게 풀릴까.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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