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생존 수단으로써의 ‘정경’과 그 해석(미드라쉬)
1. 유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에 의해 강해졌고 솔로몬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지만 솔로몬 사후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대로 분열되었다. 그 후 두 왕국은 다양한 혼란 속에서 유지되다 결국 기원전 7세기에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6세기에 남유대가 외국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끌려가 약 50년간의 포로 생활의 고통을 경험한다. 기원전 538년 근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의 종교적 지식인들은 그들의 생존과 존속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한다. 성전을 다시 건립하려고 시도하였고, 유대의 율법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통한 유대인의 통합이 강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민족적 생존도구로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문자’를 통한 유대인의 정체성 강화와 종교적 단합이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이 외국의 힘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와 어리석음의 결과 때문에 그들의 신이 패배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관점을 통해 그들은 과거부터 전해오던 민족적 신화와 문학적 전승을 종교적 정경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하였다. 민족적 생존을 위한 그들의 분투가 결국 ‘히브리 성경’을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2. 과거의 전승에 대한 당대적 해석을 통한 정경들의 생성과정은 제2성전시대라 불리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제2성전시대는 보통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 이후부터 기원후 일어난 유대봉기의 처참한 패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유대적 패러다임과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형성된 시기였으며 ‘글’을 통해 자신들의 현재적 의미와 미래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고 농축되던 시기였다. 자신들을 신과의 특별한 계약을 통해 선택된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언약적 율법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와는 다른 신의 개입을 통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묵시론적 종말론 또한 강력한 흐름으로 등장하였다. 이 두 개의 종교적 전통은 다양한 문헌을 통해 구현되었다. 새로운 책이 등장하였고 기존의 문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다. 특히 ‘해석’은 유대적 종교의 특징을 구성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3. 유대인들이 남긴 문헌에 대한 인식은 중세의 ‘마소라 본문’이 유대의 정경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과거의 유대인들이 공유했던 정경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엄격한 계승을 통하여 중세에 완벽하게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발견된 <사마리아 오경>이나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의 가치는 조금 폄하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7년 사해 부근 쿰란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문서는 유대인들의 ‘문자’를 통한 사고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었다. 쿰란 문서들은 마소라 본문 뿐 아니라 사마리아 문헌 그리고 그리스 문헌과의 유사성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유대에 하나의 정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판본이 서로 경쟁하면서 유통되고 활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유대의 문헌에 대한 원본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다양한 문헌이 공존하였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더 중요한 것은 유사한 내용에 대한 그들의 다른 표현과 접근의 차이점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작업을 통해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문자를 통한 종교적 생존투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4. 제2성전 시기는 현재 히브리 성경에 포함된 문서 뿐 아니라 다양한 문헌이 생산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새로운 내용에 대한 글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과거의 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추가된 것이었다. 각각의 문헌에 담긴 기본적인 관점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것들에는 공통된 가정이 있었다. 먼저 많은 글들이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표면적 내용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숨겨진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각각의 내용을 당시적 관점 뿐 아니라 후세에 대한 계시로 이해하여 현재적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비록 모순되고 혼돈된 내용이 충돌을 보이는 경우라도 그것을 깊이 해석하면 단일하고 통일된 메시지라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결국 이러한 문헌은 신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확신이었다.
5. 이러한 가정을 통해 기존의 문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추구되었다. 서로 모순된 내용이거나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절이거나 신의 완전성에 대한 의심이 드는 부분을 해석을 통해 수용가능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한 것이다. 이것은 훗날 ‘미드라쉬’라 불리는 독특한 유대적 성경해석법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 방법은 성경구절 속에서 독특한 단어나 구절에 주목하여 그것을 성경에 있는 다른 부분과의 연관을 통해 다시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에 오르는 <창세기>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러한 불편함을 수많은 해석가들은 <욥기>의 사탄을 인용하거나 특정한 부분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합리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 해석자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나 위-필론의 저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코 속이지 않았으며 이삭 또한 신의 명령을 기꺼이 수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6. 신의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확신한 글들의 모순을 제거하는 해석적 활동은 이후 유대교의 가장 핵심적 작업이 된다. 종교로서 규범화된 ‘유대교’는 70년 유대봉기 이후 확립되기 시작하였고 유대교는 ‘랍비’들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국가와 성전이 사라진 민족, 구체적인 물질적 토대가 사라졌을 때 유대인들은 ‘종교’를 통한 생존을 추구했다. 신과의 언약을 믿는 한, 신이 약속한 회복을 포기하지 않은 한, 유대인들의 삶은 지속될 수 있다는 확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성경과 문헌에 대한 ‘미드라쉬’적 해석이었다. 랍비들은 성경의 구절들을 현재적 규범과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재구성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합리화시켰다. 그것은 다른 문화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모순적이고 억지스럽고 허황된 느낌까지 들지만 그러한 문자적 작업은 유대인들을 통합시킨 핵심적인 힘과 원리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역사을 보면 그들의 독특하고 반항적인 기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군사적으로 힘이 부족했다. 그러한 열세를 종교적 허상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허상은 강력한 실체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2000년 이상 국가없이 그들을 생존시킨 힘이 되었다. 그 생존의 힘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문자’를 통한 사고의 형성과 정체성에 대한 합리화였다. 그러한 생존의 힘이 배타적으로 작용했을 때, 우리는 이웃을 파괴하는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현재 이스라엘과 중동국가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을 지켜낸 ‘문자’와 ‘해석’을 통한 생존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특별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 생존의 힘이 배타적으로 작용했을 때, 이웃을 파괴하는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