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詩]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ㅡ백은선.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ㅡ백은선.
이 글은 자신이 삼차대전으로 핵이 터진 후 남겨진 사람들과
공동 셸터에서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소녀의 기록이다.
그녀는 아홉 살이 되던 해, 반복적인 망상과 발작으로 처음
내원했고 열다섯이 되던 해 병동에서 투신했다.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했고 병증의 이해를 목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부분을 발췌하여 보관한다.
2086년 3월 5일
연구소장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단 말이야?
작아진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이건 꿈이구나
꿈인 줄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다
철창 너머에는 잘린 손과 유리병이 있다
종이 울리고
이렇게 깊은 창속으로
이렇게 어두운 집 속으로
빛과 유사한 소리가 흐르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어
사냥꾼이 잡아온 두 아이를
철창에 가두고
아름다움에 대해 토론할 때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오 층을 향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느낌도 가끔 들어
얼마나 더 써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써댈 수 있냐고 스스로 묻는다 스스로 묻고 여기에도 적어놓는다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추위를 대비해 열매와 땔감과 마른풀을 모았다 얼마간은 이렇게 생존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철창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잘 보고 서로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누군가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도록
너는 밤과 낮이라고 한다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
아니야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릴 것이 없어질 때까지
고층 건물이 세찬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본다고
네 비밀을 내가 다 알면
내 비밀을 네가 다 알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우린 잠든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꿈에서 등을 돌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천막 위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투둑투둑 천장과 바닥이 호응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누워 기다린다 열매가 떨어지기를 땔감이 모자라기를 마른풀이 전부 젖어버리기를 우리를 관통하는 물방울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창들을 보렴
이토록 커다란 텅 빔을
끝이 끝과 연쇄하는 꼴을
다 지워버릴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저 불쌍한 손들을 이미 씌어 진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차가운 마디를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니 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고 그 꿈을 믿어 그래서 더 큰 기다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해
이것은 언어가 아니고 이것은 빛이 아니고
이것은 거울이 아니고 이것은 칫솔이 아니고
이것은 향기가 아니고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엎드린 너희가 포개져 있을 때
나는 인생이란 뭘까 생각해
빨간 십자가가 멀리 깜박거리고
아무도 엿듣지 않았지만
계단 위로 계단을 구기며
들통 난 거짓을 다시 꾸며 말하려고 해
아무 의미 없이
의미 없는 표정을 지으며
너희가 발악하며 철창을 쥐고 흔들 때까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네 옆에 누워
마지막 말은 뭘까 마지막 말은 뭘까 생각해
철창 안에 철창이 있고
철창 밖에 철창이 있고
이런 것도 있고
갑자기 눈이 먼 늙은 여자도 있지
배운 적 없지만 우리는 보살펴야 하지
철학적이고 무심한 듯
철창에 대해 이야기하고
거울 뒤에 숨어 얼굴을 훔쳐본다
내 눈을 의심했어
왜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
끝도 없이
가라앉는 섬들을 옥상에 올라가 지켜봤어
등대가 하나둘 마지막으로 반짝, 잠겨버릴 때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모든 것을
미친 듯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정확히 두 달이 되었다 노래는 빛을 이길까 네가 물었어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모르는 일을 질문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 가라앉을 때도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첫 장을 펼쳐 다시 읽어본다
너는 내게 진실만을 말했으면 좋겠어
진실만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철장을 가운데 둔 채 벽에 등을 붙이고 마주 않아 우리는 두 아이에 겹쳐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기로 했어
너는 치즈, 소금, 얼음이라고 말했어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어
왜 사라진 것들뿐이니
구름, 바람, 비라고 내가 대답했어
그렇다면 도처에 사랑이 있겠네
빈정대며 네가 말했지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사냥꾼이 두 아이를 철창에서 꺼냈어 이 녀석들은 한입거리도 안 되겠군 더 마르기 전에 끝장을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자 눈먼 여자가 웃었어 차라리 나를 먹지 그래요 아니면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
여자가 점점 크게 눈, 눈, 눈 하고 외쳐댔어
너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지
나는 귀를 틀어막고 옥상으로 갔어
엘리베이터는 오 층에 있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매 층을 스쳐 지나가고
영원히 올라갈 것처럼
나는 물에 잠긴 어두운 도시를 바라봤어
검은 눈이 내린다
우리는 사랑을 나눈 적이 없어
우리는 비유 단지 비유로만
눈발을 뒤흔드는 비명
내 귀를 의심할 수 없었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때 우린 어떻게 될까
나는 무섭다 나는 나라는 말이 무섭고
네 서툰 다정함이 무섭고
서로를 끌어안고 울던
두 아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게
그걸 적어놓기 위해 일지를 펼치는 나의 두 손이
♠백은선시집<가능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