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모든 보살마하살이 가지가지의 인연과 가지가지의 신해(信解)와 가지가지의 상모(相貌)를 하여 보살도(菩薩道) 닦는 것을 볼 수 있었다.1-29
부견제보살마하살 종종인연 종종신해 종종상모 행보살도
復見諸菩薩摩訶薩 種種因緣 種種信解 種種相貌 行菩薩道
1-아직 법화경을 본격적으로 연설하는 상황이 아니고 무량의경을 연설하시는 것이므로, 무량의경에 맞추어서 보살이 닦는 삼종(三種)의 보살도를 설명해야 도리에 맞다.
2-모든 보살마하살이 “무량의(無量義)종종인연”과 “무량의종종신해”와 “무량의종종상모”를 하여 “무량의행보살도”를 볼 수 있었다. 하여야 한다.
3-모든 보살마하살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선인(善因)과 화연(化緣)과,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믿음과 이해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종류의 형상과 모습을 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살도 닦는 것을 볼 수 있었다.
4-중생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보면, 그 마음 역시 헤아릴 수 없고,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 그 선근(善根)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불도에 인연을 맺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중생에게 온갖 방편을 가지고 불도에 들게 한다.”하신 것이다.
5-중생의 근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따라서 중생이 불도에 마음을 일으켜 깨달음의 이해를 얻게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교화를 한다.”하신 것이다.
6-중생의 모습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 보살이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교화할 중생의 동일한 모습을 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아수라를 교화할 때에는 아수라의 몸을 한다.”하신 것이다.
7-먼저 불도에 인(因)이 생겨야 연(緣)이 이루어져 보살과 중생이 함께 불도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종종인연이라 한다.
시방세계에 어떤 중생도 부처님과 보살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그 누구도 불도에 들어오게 되는 인(因)과 연(緣)을 만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요새 사람들은 제 자신이 잘나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 수 있었다는 자만에 빠져, “부처님의 8만4천 가르침의 경문(經文)은 결국에 문자일 뿐이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수단이나 방법일 뿐이니, 경전에 집착하는 것은 손가락을 가리켜 달을 보는 것과 같다.”하니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죄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모든 대승경전에는 공덕이 있어, 부처님이 “00경전을 닦으면 무량한 공덕을 얻는다.”하시는 부분이 낱낱이 있건만 이를 믿지 않는다.
모든 대승경전에는 부처님의 신통력이 있어, 반야경에는 반야불(般若佛)의 신통력이 있고 화엄경에는 화엄불(華嚴佛)의 신통력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모든 부처님이 반야경을 연설하실 때에는 반야의 삼매와 신통과 지혜와 경계에 들어가서, 보고 알게 된 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이니 어찌 그 말씀이 곧바로 반야의 삼매와 신통과 지혜와 경계가 아닐 것인가!
따라서 어떤 중생이 대승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곧바로 그 경전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 경계의 깨달음과 경전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법화경에 이르시길, “이 법화경을 보길 마치 부처님의 사리를 보듯 하라.”하셨으니, 대개 어리석은 이들은 법화경의 글이 문자로 보이지만, 부처님과 보살은 낱낱의 글자가 모두 대승의 일승지(一乘智)를 갖춘 부처님으로 보인다.
8-불도에 들어감에 있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믿음으로부터 깨달음의 이해에 들어가는 일이, 바른 순서임을 알 수 있으니 이를 종종신해라 한다.
요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 사람들을 보면,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의 견해(見解)에 빠져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리라 한다. 이는 어린 아이가 아직 말도 제대도 못하면서 맛있는 것을 달라고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과 같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신심(信心)이 매우 깊은 보살의 일부만 빼고 모두 부처님의 방편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다.”하시었다. 또 이르시길, “보살도 법화경에 들어옴에 있어 믿음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하시었으니 어찌 중생의 얇은 지혜에 있었으랴!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믿음이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마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님이 나를 이해시켜주어야 내가 부모님을 믿으리라. 만약 부모님이 나를 이해시켜주지 않으면 내가 어찌 부모님을 믿을 것인가!”하는 것과 같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인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과 중생 역시 천륜과 같음을 알아야한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나는 일체중생의 아버지가 되느니라.”하시었다.
9-중생을 상(相-업에 의해 타고난 모습)이라 하고, 보살을 모(貌-업에 의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교화할 목적으로 모습을 하는 것)라 한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거사(居士)의 부인의 몸을 해서 교화를 해야 하는 경우 거사의 부인의 모습을 한다.”하시었다.
열반경 서품에서 이르시길, “보살이 여인의 몸을 하여 세속의 법도를 바로 잡는다.”하시었으니, 이는 부성(父性)보다 모성(母性)이 교화에 있어 더욱 뛰어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열반경의 기준임
11-보살에 입각해 삼종(三種)의 보살도를 풀이하면, 방등의 보살은 공(空)과 불공(不空)을 알아차리나 즉공(卽空)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그 인연(因緣)과 신해(信解)와 상모(相貌)가 때가 되어야 중생을 교화해 보살도를 닦는다.
반야의 보살은 공(空)과 불공(不空)이 둘이 아니고 즉공(卽空)임을 알아차리나, 일체공(一切空)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그 인연과 신해와 상모가 쉽고 어려움이 있다.
화엄의 보살은 즉공(卽空)이 일체공(一切空)을 알아차리나 단계별로 닦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그 인연과 신해와 상모가 원만(圓滿)할 때도 있고 원만하지 못할 때도 있다.
법화의 보살은 중생도 중도공(中道空)이고 부처님도 중도공임을 알기 때문에, 법화경 안에서 자신도 성불(成佛)하는 줄을 알고 중생도 성불을 하는 줄로 안다. 따라서 부처님이 중생을 대하듯 중생을 대한다. 따라서 그 인연과 신해와 상모에 있어 반드시 불종(佛種)을 바탕으로 원만한 교화를 한다.
소승의 관점에서 삼종(三種)의 보살도(菩薩道)라는 말 자체가 없다. 따라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인연과 신해와 상모를 이해할 리가 없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모두 교화를 받은 줄로만 알고 다시는 아뉵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하시었고, 또 “보살이 중생을 성취하는 일과 불국토를 정화(淨化)하는 일에 조금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하신 것이다.
12-시방의 모든 중생이 법화경의 종종인연으로 인해 일승(一乘)의 인(因)과 일승의 연(緣)을 만나 불도(佛道)를 이루니, 이를 일승인연(一乘因緣)이라 한다.
따라서 시방의 모든 중생이 일승의 인(因)과 일승의 연(緣)을 만났다면 곧바로 묘법(妙法)의 신(信)으로 인해 묘법의 해(解)를 깨닫게 되니 이를 묘법신해(妙法信解)라 한다.
모든 중생이 중생계(衆生界)로부터 불계(佛界)에 들어가는 것과, 부처님이 불계로부터 중생계로 나옴에 차이가 없기에, 연화(蓮華)의 상(相)과 연화의 모(貌)가 둘이 아님을 알 수가 있으니, 이를 연화상모(蓮華相貌)라 한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온갖 종류의 중생의 몸을 하여 교화를 할 바에야, 교화를 하는 보살의 몸과 교화를 받는 중생의 몸이 함께 법화경에서는 동일한 이익(利益-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얻게 되니, 이것을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의 경(經)이라 한다. 법화경 외에 다른 대승경전을 가지고 일대사인연이라 할 수 없음이 여기에 있다.
-偈頌-
제불의 교화는 동일하시어
성문도(聲聞道)를 닦아 해탈을 해야 하면
성문의 가르침을 주시고,
중생이 보살도를 닦아
해탈을 해야 하면
보살도의 가르침을 주시니,
이는 시방의 중생이라 하여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寶雲法師 信解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