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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필창작아카데미 26기-3차시 습
작품 (3월 16일 월)
1. 나의 꽃, 산당화 /임미림1
1 정월 대보름을 지낸 쌀쌀한 날이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대청마루, 겨우내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넓은 마루에는 '월남치마'라 불리는 긴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둥글게 모여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담요 위에 윶까치를 던져 상대편 말을 잡거나, 모나 윷 같은 '한살이'가 나오면, 같은 편이 우르르 몰려나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부엌에서는 녹두부침이 지글거리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마당에는 떡시루가 놓여있었다.
2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몰래 구석에 자리 잡고 눈으로 엄마를 찾았다. 조무래기들과 내 또래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며 놀고 있었다. 낯익은 언니들 두엇은 음식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마치 잔칫 날 같았다.
3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한 판이 끝났는지 엄마가 다가와서 "얼른 집에 가라"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여기 있는데 왜 나만 가라고 해!"
집에서부터 오지 말라는 다짐을 받은 터였다.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도 계속 서 있었다. 눈은 내리깔고 입을 내밀고~
4 잔치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 싫었다. 가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마당을 지나, 뒤 쪽 별채로 가 쪽마루에 앉았다. 이 집 딸 소현이와 놀던 곳이다. 올려다본 하늘과 산과 언덕은 황량했다. 내 마음도 그랬다.
4 내려오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앙상한 가지에 잎도 없이, 대여섯 송이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와 풀이 누렇게 변한, 아직 추운 날씨다. 단번에 눈이 동그레 졌다. 신기하고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음이 환해졌다.
5 며칠 뒤 새 학기에 엄마가 상아빛 스탠드를 사 왔다. 주름 진 갓 옆에 플라스틱 투명한 사각기둥 장식이 있었다. 그 안에 며칠 전에 본 빨간색 꽃이 피어 있었다. 겨울에 핀, 나를 위로해 준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 모습으로 나에게 왔다. 이름도 모르지만 내 꽃나무가 되어 날마다 함께 하게 되었다. 밤에도 불을 켜면 은은히 피어났다.
6 세월이 흘러, 타향인 경기도의 아파트에서 똑같은 꽃나무를 발견했다. 이름이 '산당화'인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해당화'와 관련 있는것 같아 더 좋았다.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살아나 오며 가며 관심을 가지고 살폈다. 이른 봄에 진홍색으로 피는 꽃이 처녀를 설레게 한다고 하여 '아가씨 나무'라고도 부른단다. 꽃잎은 매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붉은 색이 진하고 두께가 훨씬 두껍다. 후에 대구 수목원 '분재원'에서, '명자나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모습을 봤다.
7 올해 첫 약속은 부지런하고 활력 넘치는 순이 언니의 연락이었다. 정초 집에만 있던 터라 운동삼아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역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죽은 듯이 서있다. 갈라진 나무껍질이 바람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8 무심코 바라본 길 옆 낮은 울타리에, 빨간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쩌다 철없는 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대장을 따르는 부하들처럼 온 나무에 작은 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 같이 줄 서있는 예닐곱 그루가 다 같은 모양이었다. 하늘도 쨍하고 코 끝도 쨍한 날이었다.
9 꽃이 궁금해서 며칠 뒤에도, 그 뒤에도 가보았다. 꽃잎은 냉동되었는지 보름 넘게 피어있었다. 봉오리들도 좀 자랐겠지만 그대로였다. 사전에는 산당화 꽃이 4-5월에 핀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2월의 꽃이었다.
10 식물은 온도, 일조량등 자기 조건이 되면 개화한다. 하지만 옆의 매화나무도 주위의 다른 나무들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산당화는 왜 벌도 나비도 없는 엄동설한 1월에 꽃을 피우려 할까. 조금씩 단련하여 자기 리듬으로 시간을 앞당겨 추운 겨울의 불꽃이 되고 싶은 건가. 외롭고 위험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투사처럼 산화하고 싶은가!
11 산당화는, '발전하는 삶을 살면 자신을 얽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라는 '로랑 구넬'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주위의 방해를 의식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여 자유로워졌다.
12 그 꽃이 나에게 묻고 있다. 너는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어? 노력은 해 봤어?
13 산당화는 최초로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나무이다. 소박한 채송화, 분꽃이 피고 감꽃, 살구꽃이 흔한 시절이었다. 겨울에 진한 빛으로 청초하게 피어 나에게 온기를 준 꽃이다. 어려워도 물러서지 않고 제 속도로 나아가는 꿋꿋한 나무가 되었다. 나도 용쓰고 싶다. 보상이 없어도 존재의 흐름으로 남고 싶다.
2. 바람개비 / 황무선1
1. 바람 앞에 바람개비가 서 있다. 바람에 얼굴을 맞고 있는 처연한 바람개비이다. 마치 추위를 이겨내는 동장군처럼 듬직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영혼에 이름 모를 미소가 핀다. 인간은 새털처럼 가벼운 바람개비의 영혼을 닮고 싶지 않을까?
2. 오래전 농촌에서 가뭄이 시작되면 풍년을 기원하며 기우제를 지냈다. 기상 관측소가 없던 시절에 바람개비가 돌면 농부는 축복의 비가 올 것이라 믿었다. 기다리는 백년손님이 바람개비였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홀씨 되어 흩어진다. 환경에 도태되지 않고 희망을 꿈꾸는 바람개비 철학이 대지에 퍼진다.
3. 시골에는 놀이 문화가 드물었다. 물질은 풍요롭지 않아도 마음이 따스한 바람개비가 있다. 색종이가 귀한 시절 오빠는 마분지에 크레파스로 빨강, 파랑, 노랑의 색칠을 한다. 색을 칠한 종이를 접고 오려서 날개를 만들고 나뭇가지에 못으로 고정한다. 정성이 담긴 바람개비를 들고 달리면 최고의 놀이터가 된다. 바람개비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하늘을 향해 걱정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4. 바람개비는 세차게 돌아가기도 하고 천천히 돌아가기도 한다. 바람개비의 세기에 따라 세차게 돌아가기도 하고 천천히 돌기도 한다.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아갈 때는 무언가 쫓기듯 급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천천히 돌아갈 때는 비둘기처럼 평화롭고 여유롭게 보인다. 저 바람 앞의 바람개비가 내 삶의 모습을 닮았다.
5.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 때는 내 젊은 시절 삼십, 사십의 시절인 것 같다. 나는 평생 직장생활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생활을 병행하고 육아를 하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정말 바람개비가 돌아가듯이 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팽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야만 되는 삶이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짓고 아이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또 거의 뛰다시피 숨을 헐떡이면서 달렸다.
6.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 사이에 치이며 치열하게 현장을 이겨내야만 했다.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양손이 빠지도록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준비하고 잠시 쉴라치면 빨래를 돌려야 한다.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고 바람 앞에 바람개비처럼 세차게 돌아가는 생활이 내 청춘 삼십, 사십 대의 시절이었다.
7. 그런데 어느 날 바람개비가 멈추는 날이 있었다. 바람개비가 멈추는 날 나는 정말 절망을 안았다. 바람개비가 돌지 않고 정지했다. 정지할 때, 나는 직장에도 갈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람개비가 멈추어도 직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곧장 바람이 불어도 그렇게 세차게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그리울 때가 멈추어 있을 때다. 멈추었을 때는 지난날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던 바람개비가 그리웠다. 바람개비는 돌아야 본연의 의무이며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8. 바람개비가 멈추었을 때가 좋은 줄 알았다. 바람개비가 멈춘 건 남편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 남편은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갈비뼈에 시린 통증이 왔다. 대학병원에서 갈비뼈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양성인지 악성인지 수술을 집도해야 알 수 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나는 아이들과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었다. 남편은 젊다는 생각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과로를 달고 살았다. 걱정했던 결과가 예상대로일 때, 인간은 바람개비의 날갯짓을 멈춘다.
9. 나는 집과 병원을 드나들며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살았다. 무엇보다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고 봐야지’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남편의 갈비뼈에 하얀 막으로 형성된 작은 암이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죽음의 그림자인 암 덩어리는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로 말끔하게 제거했다. 바람개비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미하게 고개를 떨군다. 바람개비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가 희망적이다. 돌지 않은 바람개비가 멈추어 있을 때, 그 시련을 오롯이 견뎌냈다. 멈추었던 바람개비가 조금씩 조금씩 바람을 맞아서 돌아가는 바람개비였다.
10. 그래서 예전 삼십, 사십의 시절처럼 세차게 돌지 않는다. 그 이후에 바람개비는 아주 세찬 바람이 불거나 여린 바람이 불어도 아주 균일하게 평균적으로 평안하게 돌아간다. 이제 퇴직하고 세찬 바람이 불어도 바람에 따라 시련에 따라 내 바람개비는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해서 내 바람개비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산책하듯이 서서히 돌아가는 평안한 바람개비이다.
11. 바람개비는 폭풍우가 몰아치면 공장의 기계처럼 쉼 없이 돌아간다. 몸체는 자연과 동화되어 물레방아처럼 쉬지 않고 움직인다. 나는 바람개비가 빨리 돌아갈 때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서 눈치채지 못했다. 바람개비가 멈추었을 때, 가족들과 자신을 온전하게 살피게 되었다. 바람개비는 바람의 풍향에 따라 웃고 우는 인생이었다.
12. 삶 또한 바람개비처럼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조용히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무탈한 가정생활과 비슷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바람개비는 산들바람의 세기에서도 재채기를 한다.
13. 바람개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와 비슷하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한 방향을 향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역할을 다할 때, 가정의 바람개비는 푼푼하게 돌아간다. 가족 구성원이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면 규칙적으로 돌던 바람개비가 작동을 멈추게 된다.
14. 바람개비는 즐거움과 고통의 교훈을 보여준다. 삶에서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난다. 오르막은 발보다 몸이 뒤로 젖혀지고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마치 바람개비가 멈추어 있을 때다. 내리막은 발보다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려서 몸을 유지하며 천천히 걷는다. 바람개비의 환경처럼 삶을 방어하는 동작이 달라진다. 바람개비의 눈으로 방향을 조절하면 삶의 끈도 삐걱거리지 않을 터이다.
15. 바람개비의 일상은 돌아가는 것이고 돌아가는 건 부러지지 않는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천천히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오히려 강하다고 가르친다. 잘 돌아가던 바람개비가 멈추었을 때, 삶의 어두운 터널이 보였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다.
16. 우리의 삶은 무대 위의 연극이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진흙 구덩이 속에서 피어나는 수련도 살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을 친 바람개비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17. 어릴 적 놀이터였던 바람개비와 눈을 맞춘다. 바람개비는 나에게 와서 “틀려도 괜찮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면 돼”라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3. 바닥짐 / 임성림 2
1. 제주여행을 끝낸 나는 우도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맨 먼저 할 일은 자동차를 배에 싣는 일이다. 청정한 섬에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은, 제주의 여름날씨에 호되게 고생한 탓이다. 주차직원의 호각소리는 내가 수하물칸 적당한 자리를 찾을 때까지 여러 번 계속된다. 능숙하지 못한 운전에 주눅이 들어, 이마에 굵은 땀이 절로 맺힌다.
2. 지하 이 층쯤 되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선실로 올라가려는데 함께 간 딸애가 바닥을 쿵쿵 발로 치기 시작한다.
"엄마, 이 배는 평형수가 충분하겠지? 여기 밑에는 분명 그걸 저장하는 탱크가 있을 것 같아. 그걸 옛날에는 바닥짐이라 했대."
갑자기 평형수는 뭐고 바닥짐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잘 모르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쓰는 딸애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게 느껴졌다.
"넌 평형수를 어떻게 알아?" 시원한 선실에 들어서자 말자 내가 물었다. 딸애는 세월호 침몰이 너무 충격적이라, 사고의 원인을 자세하게 알고 숙지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문단속이나 대피요령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아이였다.
3. 딸은 자신이 리포터라도 된 듯 내게 또박또박 말을 건넨다. 조타장치가 고장 나 배가 기울었는데 원상으로 돌아가는 복원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유는 불법으로 증축되어 배의 무게 중심이 높았을 뿐 아니라, 노후된 배에 화물이 기준보다 과다하게 실렸으며 그것을 제대로 고정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기준치에 미달된 평형수도, 배의 원상복귀를 막는 원인이라 한다. 진도의 조류만이 유일한 자연적 이유일 뿐, 이익추구를 위한 많은 인위적인 원인들이, 어이없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딸은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출항을 앞두고 점검이 가능한 평형수라도 제대로 살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4. 바닥짐의 존재는 배를 만들 때부터 필요 했을 듯하다. 속이 빈 배 바닥에 짐을 채워 무게 중심을 낮추는 일, 좌우의 평형을 맞추는 일은 바닥짐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물에 뜬 배의 무게를 알맞게 유지하고 항해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짐'으로는 돌이나 모래, 쇳덩이가 쓰였다. 무연기관이 끝나고 증기기관의 시대가 되자, 짐으로 물이나 바닷물을 쓰기 시작했다.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바닥짐이나 평형수에 왜 의미를 두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5. 바닥짐의 임무는 무게감을 주는 것과 균형을 맞추는 데 있다. 몸무게가 다른 두 사람이 널뛰기를 할 수 있는 건 널밥이 있기 때문이다. 널 밑에 받쳐놓는 고이개로부터 널밥의 크기를 조정한다면, 두 사람은 충분히 무게의 균형을 맞춰 뛸 수 있다. 누가 양보하거나 희생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조화로운가. 시소도 그렇다. 시소의 중앙에 하중을 견디는 받침대가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양쪽의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 이다. 아이는 시소 뒤쪽에 엄마는 앞쪽에 앉는다면 충분히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균형은 마치 중용이란 말처럼 조화롭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6. 바닥짐을 알고 난 뒤, 나는 세상을 유지하는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근원을 생각해 본다.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되려면 모든 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권력의 균형이, 경제적인 시선으로 보면 빈부와 배분의 균형이 요구된다. 청년과 노인이 이루는 세대 간의 균형도 중요하다. 청년의 이상과 모험을 노인의 경험과 실용적인 논리로 아우르는 것을 기대한다. 자유와 책임에 관한 의식의 균형도 민주주의 제도에선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무게들이 있기에, 세상이라는 험난한 항로에서도 배는 굳건하게 나아간다.
7.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누구나 살면서 흔들리고 위태로운 순간들이 닥친다. 그럴 때마다 바닥짐 같은 존재가 있어 흔들림 없이, 균형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젊은 날, 집이 싫어 나가 살 때 귀가를 결심하게 한 아버지의 눈물 어린 편지 한 통. 일찍 돌아가셔 늘 그리운 어머니가, 갓난아기인 나를 꼭 끌어안고 찍은 낡은 사진 한 장. 꿈은 간직하며 늘 깨어있자던 친구의 생일 카드. 수험용 연필에 시험 잘 보라는 문구를 일일이 써 붙여 보낸 소포상자. 신혼의 꿈을 덮기에 부족하다며 수를 놓은 공단이불을 보내온 큰언니의 사랑. 그런 애틋한 마음들은 곧바로 바닥짐이 되어, 나의 슬픔을 위로하고 허기졌던 마음을 자존감으로 채우게 했다. 그것은 인생을 항해하는 나의 배가, 거센 파도나 모진 비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버텨주는 바닥의 짐이 된 것이다. 연신 셔터를 누르며 바다를 찍는 딸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나는 무게감 있는 든든한 바닥짐으로 살았는지 되돌아 본다.
4. 어머니의 징소리 /고영숙1
1. 그날, 팔공산 굿당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운율에 맞춰 광광광 징이 울렸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굿당을 가득 채운 기운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단한 일이 곧 벌어질 것만 같은 징소리가 두렵고도 무거웠다. 그해 겨울, 팔공산 골짜기를 울리던 그 소리는 내 운명을 가르는 절박한 울림이었다.
2.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조건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대는 태산처럼 쌓여만 갔다. 딸의 마음이 완강하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끝마다 부딪혔고, 집 안 공기는 점점 숨 막히게 굳어져만 갔다. 어머니의 징이 울리기 시작했다.
3. 사실 나 또한 운명을 걸 만큼 그 사람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구처럼 말이 잘 통했고, 선한 눈빛이 좋았다. 길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주 마주쳤다. 우연이라 하기엔 고개를 갸웃할 만큼 잦은 만남이었다.
4. 무더운 여름날, 수성못 호반에서 네 사람이 만났다. 익히 알고 지내던 남자가 데려온 친구 한 사람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ROTC 단복 명찰에 새겨진 특이한 이름, 길에서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가며 기억해 둔 그 사람이었다. 속으론 많이 놀랐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했다. 인연의 끈은 그렇게 조용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5. 두 남자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내게는 멀고도 어려운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결국 나는 편안함을 택했다.
6.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내가 먼저 말했다. “결혼해요.”
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친구에 대한 부담이 그의 망설임 속에 들어 있었음을. 오기가 생겼다.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 보자던 그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기다리던 대답을 들었다. 꽃 한 다발을 사들고 나갔다. 꽃향기가 사방으로 번졌다.
7. 어머니는 다른 혼처를 이리저리 알아보고 계셨다. 나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때부터 숨 막히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콩 볶듯 나를 다그쳤고, 나는 더 굳게 버텼다. 서로의 마음속에서 징이 세차게 울렸다.
8. 어느 겨울 아침, 어머니는 산에 가자고 뜬금없이 말씀하셨다. 집 앞에는 봉고차가 서 있었고, 차 안에는 동네에서 굿을 한다는 오보살이 앉아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차는 한참을 달려 팔공산 기슭에 멈춰 섰다. 겨울 산은 쓸쓸했고 공기는 차가웠다. 재촉하는 음성을 따라 산을 올랐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곳은 굿당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사랑의 방식으로 마지막 그물을 던지신 것이다.
9. 굿당 한가운데 앉으라는 말에 순순히 자리를 잡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두려웠지만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징이 터지듯 울렸다. 공기를 찢는 쇳소리가 산을 흔들었다. 오보살이 오방기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오방기는 내 머리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고, 징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10.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의식과는 다른 결의 침묵 속으로.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굿판이 한참 이어졌지만, 신은 끝내 다른 답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오보살이 오방기를 휙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는 지 뜻대로 결혼해야 됩니다.”
굿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11. 함께 할 수 없는 두 마음이 소란스러운 굿당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왔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길게 흔들렸다. 뜻을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그림자였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필요한 말만 오갔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미움도 깊었으리라.
12. 세월은 많은 것을 잠재웠다. 나 또한 내 딸이 걱정이 되어 날마다 징을 울려대는 늙은 어미가 되었다. 내가 딸을 위해 징을 칠 때마다 어머니의 징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자식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다. 고집을 부리던 딸자식도 이제야 뜨거웠던 당신 사랑을 깨닫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날의 소리를 떠올린다.
“네가 힘들 때마다, 건너지 못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징이 되어 울려주마.”
팔공산 굿당에서 널리 울리던 그 소리는 어머니의 또 다른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오늘도 마음속 어디선가 조용히 징이 울린다. 그 울림 위에 나는 뒤늦은 효심을 얹어본다. 눈을 감으면, 겨울 산을 가르던 그 소리가 여전히 맑게 번져온다.
5. 섣달그믐날에 태어나다 / 김창남 1
1. 오늘이 내 생일이다.
2. 며느리가 미역국을 끓여 왔다. 아들이 분가한 뒤로는 생일 미역국은 언제나 며느리 몫이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는 생일 축하를 겸해 가족 외식을 하잔다. 번거롭다고 집에서 간단히 먹자고 했더니 아내가 “출근하는 며느리 고생시키려고 그러느냐” 하며 펄쩍 뛴다. 정작 내 생일인데도 내 의견은 늘 뒷전이지만, 그렇다고 서운함을 드러낼 나이도 지났다. 내 생일을 핑계로 온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3 내 생일은 본래 음력 섣달그믐날이다. 그해 음력 섣달은 스물아홉 날로 끝났고 나는 그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큰어머니 댁에서 설 차례에 쓸 전을 부치던 중 해거름에 산통이 와, 아래채 할머니 방에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세상에 나오던 순간부터 나는 늘 ‘차례 준비 중’에 끼어든 존재였던 셈이다. 태어나는 날부터 남의 손이 바쁘고 집안이 분주했다는 사실이 훗날까지 내 생일의 운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4.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어머니는 고향 큰아버지 집으로 피난 와서 얹혀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해, 어머니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 무렵 할머니는 유난히 어머니를 편애했다고 한다. 아들 없이 딸만 낳은 큰어머니는 자연스레 할머니 눈 밖에 나있었고, 형에 이어 나까지 아들을 둘이나 낳은 어머니에게 할머니의 정이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집안의 정과 미움이 그렇게 갈라지고 섞이는 와중에 나는 조용히 태어났다.
5. 그해 설 명절은 어머니의 출산으로 큰어머니가 명절 준비와 차례를 도맡게 되어, 불평이 잦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큰어머니에게 미움을 산 셈이 되었다. 방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산후조리는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아들만 쑥쑥 낳는 며느리가 복스럽다며, 아가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태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부담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명절의 소란 속에서 호불호가 섞인 존재였던 셈이다.
6.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생일이면 고깃국을 먹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내게 생일은 나만을 위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점심을 거르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명절 선물로 여기저기 청주를 한 병씩 보냈고, 그 심부름은 늘 내 몫이었다. 심부름을 가면 집집이 부치고 있던 전 쪼가리나 썰다 남은 가래떡을 조금씩 맛보라고 내주었다. 그게 점심이었다. 어머니도 명절 준비에 바빠 점심을 따로 차릴 겨를이 없었고, 이것저것 주워 먹어 배도 고프지 않았다.
7.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생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궁핍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날이 생일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일이었다. 별난 추억이었다. 아이들 생일상을 차릴 때마다 그 얘기를 꺼내면 아내는 “또 그 얘기냐”라며 이제 그만하라고 손을 내젓는다.
8. 결혼하고 첫해 맞이한 생일은 어머니가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명절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새며느리를 본 기쁨 때문이었는지 상은 제법 그럴듯했다. 온 가족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나는 처음으로 ‘생일다운 생일’을 누렸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평소 혈압이 높던 어머니는 내 생일을 지내고 열이틀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아내와 나는 곧바로 분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생일상은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였던 셈이다.
9. 분가 후 처음 맞이하는 설 전날이자 내 생일날, 설을 쇠러 형님 집에 갔다. 형수와 아내는 차례 준비로 분주해서, 내 생일은 자연스레 잊힌 듯 넘어갔다. 오후, 무료해진 나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낮술을 했다. 저녁 무렵 돌아와 마루에 오르다 댓돌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형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생일인데도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서운해서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나는 다친 데도 없고, 술 때문도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집안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형수는 얼굴을 들지 못했고, 아내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생일은 그렇게 또 한 번 집안의 골을 만들었다.
10. 결혼 후 세 번째 맞이하는 생일을 앞두고 아내가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어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하니 양력 생일은 해가 바뀐 51년 2월 5일이었다. 그해는 음력 생일보다 보름이나 앞서있었다. 바꾸고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처음으로 아내와 둘이 오붓하게 외식을 하며 생일을 보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생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생일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11. 내친김에 아내 생일도 양력으로 바꾸었다. 아내의 양력 생일은 공교롭게도 결혼기념일과 겹쳤다. 아내는 두 번 축하받을 일이 하나로 줄어,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라 했지만, 나는 경사가 겹쳐 더 뜻깊지 않으냐고 달랬다. 사실은 아내 생일을 잊어 혼났다는 친구 얘기가 떠올라, 겹치면 잊을 확률이 줄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아이들까지 모두 양력으로 생일을 지낸다.
12. 언젠가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미우니 고우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게 무어냐”고 일갈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문득 생일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그렇다. 생일은 그저 태어난 날일 뿐인데, 명절과 겹치면 어떻고 꼭 제날이 아니면 또 어떤가. 그동안 나는 생일이라는 이름의 작은 의식에 너무 많은 마음을 써 온 것은 아닐까. 이제는 안다. 생일은 축하받기 위해 존재하는 날이 아니라, 그저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조용히 돌아보고 고마워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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