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주년 삼일절 의열단 국내의거 활동지 답사 1
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의 담사단체인 <김원봉과 함께>에서 삼일절 기념행사를 안내하여 왔다.
[Web발신]
3월 1일 의열단 활동지 답사
3월 1일(금) 오후 2시
모이는 곳 이태원어린이공원(이태원동 288)
회비 : 1만원
신청 : https://lrl.kr/fSxC
이런 안내를 받고 즉시 <참석하겠습니다>라고 답신을 보내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삼일절 날의 기온이 급작스레 떨어져 영하10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종일 길거리를 헤매야 하는데,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역사적인 날의 뜻 깊은 행사에 불참을 한다는 게 추위에 이유를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좀 두껍게 입고 집을 나섰다.
6호선 녹사평 역에서 내려서 3번 출구를 통하여 나가려는데, 녹사평 역의 시설에 놀라게 되었다. 너무 역사가 깊고 시설에 우리나라의 역인가 싶을 만큼이나 색다른 느낌을 주는 역사의 디자인과 으리으리한 모습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에서 내려서 이태원어린이공원에서 모이기로 한 것인데, 바로 이 공원의 자리가 김익상 의사의 동생이 살던 집터인데, 바로 거사 전날 이곳에서 머물다가 거사 장소로 이동을 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상당히 의의가 있는 장소이므로 좀 멀고 찾아들기 힘든 장소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출발을 하기로 한 것이라 한다. 바로 이 골목이 유명한 경리단길이라는 것을 내려 오면서야 발견하고 거리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찍어 오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오늘 해설을 해주실 교수님들을 소개도 하고, 오늘의 행사도 소개를 한 다음에 출발하기 전에 단체 사진까지 찍은 다음에 이제 이곳에서 버스 정류장 3개를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김익상 의사 의거지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4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어서 일부는 다음 버스를 타야 할 정도이었다. 우리 일행이 버스를 내린 곳은 남산 3호 터널을 통과하여 서울 에니메이션센터 앞 정류장이었다. 이곳에는 숭의 학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숭의여자대학, 숭의여고, 리라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침탈한 이후 이토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뒤 이곳에 통감부를 짓고 일본 신사를 설치하는 등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는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1926년 경복궁 앞에 지은 조선총독부 건물로 이사하기 전까지 통감부가 조선총독부가 되었고, 1921년 9월 12일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에게 경고를 날린 최초의 정소이기도 하다. 이곳의 육교 위에서 해설을 맡은 김명섭<단국대교수>님은 이 정소에 대해 통감부<통독부>와 일본인이 가장 숭배하는 노기라는 일본 장수를 기리는 노기 신사가 있었던 곳이라며 자세한 안내를 해주셨고, 내려가서 서울에니메이션 센터에 대해서도 해설을 잊지 않고 해설을 해주시면서 최초의 연국인 유치진과 친일 행동도 설파하시며, 그래서 이 길을 <국치길> 이라 명명하여 잊지 말자고 하고 있다고 덧붙이셨다.
김익상의 의거터
1921년 그는 단장 김원봉의 명령에 따라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일본인으로 위장해 기차를 타고 국내 잠입에 성공한 김익상은 사촌동생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인 9월 12일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 당일인 9월 12일 아침 김익상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2발의 수류탄을 지닌 채 오전 10시 20분 경기도 경성부 왜성대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잠입했다. 조선총독부를 경비하는 일본군 헌병대는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김익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전등을 고치러 온 사람으로 착각하였다. 이렇게 김익상은 유유히 조선총독부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고 2층 어느 방에 폭탄을 던졌는데 조선총독의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비서과였고 설상가상으로 폭탄마저도 불발탄이었다. 뒤이어 그는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이때 던진 폭탄은 폭발했지만 애석하게도 회계과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이 터지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는데 이들과 마주친 김익상은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하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왔다.
결국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총독부가 폭탄 폭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빠져나간 김익상은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당시 의열단원들은 거사 이후 자결이나 사형으로 순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살아서 돌아오자 의열단에서는 그에게 "본분을 다했으니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계속 의열 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곧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정신이 든 일제는 범인을 잡겠다고 한동안 난리를 쳤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김익상이라는 사실이 다음 문단의 사건으로 그가 붙잡히면서 밝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