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에서 출발한 호반 레스토랑
현재 대구에서 '호반(湖畔)'이란 말이 상호 속에 들어간 레스토랑은 모두 3개가 있다. 팔공산 송림사 옆 유람선 모양의 호반, 수성못 가에는 호반 레스토랑과 호반의 벤치가 있다. 수성못의 터줏대감인 호반 레스토랑은 69년 문을 열어 아직까지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의 역사는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수성못은 동촌, 팔달교 밤숲, 화원유원지 등과 함께 대구의 대표적 유원지였다. 특히 6월의 수성못 일대 벌판은 장관이었다. 누렇게 익은 보리가 바람에 일렁거리는 환상적인 풍경 속에서 연출되는 선남선녀들의 '보리누름 사랑'은 선데이 서울 등의 좋은 취잿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제 때 민족시인 이상화도 '가르마' 같은 들길을 걸으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명시를 잉태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수성못으로 연결되는 길이라곤 수성못 남쪽 법이산 자락에 있는 외인아파트(현재 삼풍 아파트) 앞 편도 1차로밖에 없었다. 시내버스 종점은 수성못 오거리 자리였다. 상호는 '호반 다과'. 현재는 사라졌지만 팔조령에서 발원한 신천 상류의 지류가 수성못 변 3m 폭의 수로 (현재 호반의 주차장 자리)를 통해 못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수로를 가로질러 2.5m 길이의 철책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됐다. 다리를 건너가면 수성못의 풍광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한 포인트가 있었는데 바로 녹수장 여관이었다. 이 여관은 비련의 연인들의 마지막 잠자리 공간으로도 유명했다.
녹수장은 69년 호반의 초대 사장, 박풍씨(66)에게 매각된다. 박씨는 우연히 수성못에 놀러왔다가 장차 행락객들이 폭증해 비전이 밝을 것이라고 보고 녹수장을 인수한 것이다. 현재 경산 하양에 살고 있는 박씨는 봄 가을 행락객을 대상으로 칠성·말표 사이다 수형당과 삼립의 단팥빵, 밤과자, 도너츠, 카스텔라(파란풍차 표), 커피 등을 팔았다. 녹수장은 ㄱ자 건물이었다. 그 무렵 이 일대는 그린벨트 지역이라 건축을 새로 할 수 없게 돼 있었다. 할 수 없이 여관옆에 15평 정도의 그늘막을 달아냈다. 그 그늘로 행락객들이 모여들면서 대구의 명소로 발전하게 된다.
호반의 명물 수령 280년된 떡버드나무
이 노거수는 100명 이상의 손님이 한꺼번에 쉴 그늘을 마련해주고 있으니 호반으로선 '효자수'가 아닐 수 없다. 호반이 겸업한 여관업은 갈수록 경쟁력을 잃었다. 그래서 호반은 70년대초 폐업신고를 하고 곧장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방 10개를 모두 트고 홀로 개조했다. 수성못의 전경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아치형 통유리창을 달았다. 수변에 놓을 간이 의자도 직접 만들었다. 그때 대륜고 미술교사였던 박씨의 아버지 박명조씨(68년 작고)가 미국형 나무의자를 만들어 비치했다. 조명도 새로 설치하고, 전축도 구비했다. 하지만 DJ는 비용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영업 지장받기도 대구로 내려오면 박 대통령은 수성관광호텔 2층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묵었다. 박 대통령이 오는 날이면 하루 전부터 정보형사들이 호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일부 청와대 경호팀은 삼풍 아파트 뒷산인 법이산 정상부까지 수색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호반 박 사장이 연탄재를 길가에 수북이 내놓았다. 한 담당 경찰이 박 사장에게 "각하가 보면 지저분하다고 할지 모르니 당장 집 안으로 갖고 들어가라"며 호통을 쳤다. 그 소리를 들은 박 사장도 경찰에게 막 대들었다. 설마 연탄재를 보고 화를 내겠냐"고 불쾌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러나 경찰은 막무가내여서 할 수 없이 연탄재를 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방송국 스튜디오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 늘 예식장, 다방, 회관, 시민회관 등에서 야외 공개방송을 했다. 그런데 호반만큼 '방송발'을 잘 받는 데가 없었다. 물 속으로 들어간 떡버드나무 가지, 어른거리는 물그림자는 사진작가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여름의 땡볕,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나무 그늘은 햇살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일부 PD들은 일부러 잘 차려입은 여성을 골라 양산을 들고 못둑을 거닐도록 부탁도 했다. 한가로이 나무보트를 젓고 있는 연인들, 물새, 유람선 등 그 모든 게 소품 구실을 했다. 호반은 85년쯤 휴게소 꼬리표를 떼내고 정통 레스토랑으로 변신한다. 높아져가는 손님들의 품격에 호응한 것이다. 93년엔 현재 모습의 노출 콘크리트조로 새건물을 지었다. 그게 신선하게 어필돼 건축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떡버드나무 아래엔 비치 파라솔 50개가 깔려 있다. 호반 레스토랑의 대표 먹거리는 얼마전 들안길 축제 맛자랑 코너에서 수상한 인삼꽂이 안심스테이크.
안개시인…대구시인학교의 교실로도 제공 현재 대구시인학교의 교실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3시~5시30분(주간부), 오후 8시~10시30분(야간부), 두 차례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으며 시 공부를 한다. 박씨는 현재 대구시인학교 교장인 서지월 시인과 대구대 특수교육과 동문으로 수성못 주변에 문화공간형 레스토랑 문화를 보급한 인물이다. 현재 안개시인 옆에 있는 가을의 전설 근처에 있었던 '8과 2분의 1', 상동의 '풍경하나'도 그가 만든 레스토랑이다. 박씨는 서지월 시인에게 부탁해 안개시인이란 상호를 얻었다. 서 시인은 원래 상호를 '산그리메'로 정했다. 그러나 박씨가 좀 난색을 표해 다시 만든 게 안개시인이었다. 안개시인은 서지월 시인이 가장 막막하게 생활한 80년대를 덜 우울하게 보낼 수 있게 한 맘의 안식처 같은 곳이기도 했다.
박씨의 인테리어 감각은 남달랐다. 안개시인도 특이한 정원형 인터리어를 골랐다. 홀 안 한 켠을 잔디가 깔린 정원으로 만들었다. 물론 통유리창 벽 때문에 어느 곳에 앉아도 그곳을 응시할 수 있다. 정원에 장미를 심었고, 토끼와 비둘기도 길렀다. 하지만 지금은 식당에 가축을 기르지 못해 볼 수 없다. 굵직굵직한 외지시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곳으로 몰려와 뒤풀이를 했다. 고은 시인도 여기에 왔고 중국 창춘 지린신문 사장 겸 장백산 문예잡지 주필인 남영전, 석화, 김성우 등 중국 조선족 시인들도 대구 행사를 마치고 여기서 술판을 벌였다.
호반의 떡버드나무 아래에서 지역 시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고은 시인.(서지월 시인 제공)
80년대 중구 공평동에 시인다방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시인'이란 말이 들어가는 지역의 유일한 레스토랑이라서 그런지 5천원짜리 커피 잔을 들고 애잔한 시선을 수성못에 주면서 시작을 하는 문학청년들이 들른다. 현재 호반, 안개시인을 비롯해 호반의 벤치, 가을의 전설, 유리성, 비잔티움, 뉴욕뉴욕 등이 '수성못 레스토랑 벨트'를 형성했다. 2005년부터 황영대 사장(47)한테 경영권이 넘어간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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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흙집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비즈니스
첫댓글 순섭아 부산자랑거리좀 소개혀
수고
다음일요일 팔공산 놀려가자
순섭아대구를니가우찌거리잘아노 대구에어디가제일놀기조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