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남편이 죽은 후, 자식들의 혼사(婚事)도 다 치러 홀가분해진 한씨(韓氏) 부인은 늙고 병든 몸을 추스르며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남편인 김극제(金克悌)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지만, 이들 말고도 남편이 첩에게서 난 아들이 둘이나 또 있었다. 남편은 평소에 술을 잘 마셨지만, 취하면 제멋대로 기분을 내는 편이어서 재산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분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같은 노비를 한씨의 자식에게 주었는가 하면 또 얼자(첩의 자식)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2백 명에 가까운 자기 노비의 얼굴들을 어떻게 쉽게 구분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이처럼 잘못 처리된 재산을 이참에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무엇보다도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봉사(奉祀)의 전답과 노비를 따로 떼어둘 필요도 있었다.
정확한 작성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한씨는 얼자를 포함하여 다섯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였다. 이러한 문서를 분급문서(分給文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자녀들에게 분급한 재산의 목록이 모두 기재되어 있다. 일명 구처문서(區處文書)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한씨로부터 상속을 받은 자식 가운데에는 물론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위는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첨경(吳添慶)으로 1645년(인조 23)의 문과 급제자였다. 그는 급제 후 1년 만에 사망하는 비운을 맞이하지만, 상속 당시에는 아직 급제하지 않았으며, 음서를 통해 관리로 봉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때 그의 아내는 친청으로부터 오라비들과 같은 몫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른바 남녀균분상속이다.
아래의 그림에 보이는 고문서는 한씨가 위와 같이 재산을 분배하고 나서 이 분배에서 빠진 재산이 발견되자 이를 다시 자녀들에게 분급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때는 1642년(인조 20) 12월 13일이었다. 문서의 첫 머리에는 “...三子女處...分給文”이라고 적혀 있어서 한씨가 그녀 소생의 세 자녀에게만 재산을 분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얼자에게도 재산을 분배하였다. 그런데 이들 자식들이 받은 재산을 잘 살펴보면, ‘家翁邊’이니 ‘己邊’이니 ‘母邊’이니 하는 흥미 있는 용어들을 접할 수 있다. ‘가옹변’이란 ‘남편 쪽’ 또는 ‘남편 쪽의 재산’이란 뜻이며, ‘기변’이란 ‘내 몫의 재산’이란 뜻이다. ‘모변’은 물론 ‘어머니 몫의 재산’이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부부간일 지라도 재산 문제에 관해서는 이처럼 그 소유권을 각각 구별해서 행사하였으며, 그래서 당시의 재산 관계 문서에서는 ‘妻邊’이니 ‘父母邊’이니 하는 말들이 위에서 인용한 용어들과 더불어 자주 쓰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씨가 자녀들에게 분급한 전답과 토지 가운데에는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있었지만 자기 소유의 것도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재산의 상당수는 일찍이 친정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으리라. 그 재산은 혼인한 뒤에도 남편의 것이 되지 않고 자신의 재산으로 따로 관리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결혼을 계기로 처가 마을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설령 사위가 된 본인은 이사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대에 와서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를 찾아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이같은 재산 관리의 관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김극제의 아내 한씨가 재산을 자녀들에게 분급하고서 이를 증빙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의 일부
/유호석(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