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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일 | 시위장소 | 참가인원 | 주 요 사 항 |
3. 18 | 강화읍 | 1-2만명 | 강화읍 장날을 기해 각지에서 모여 든 군중이 참여. 일본군 보병 1개 소대(40명)출동,진압,시위 주모자 63명 체포 |
3. 21 | 교동읍 읍내리 | 80명 | 교동읍 주재소 앞에서 시위 |
3. 22 | 교동읍 읍내리 | 100명 | 교동 주민들 이틀째 시위.시위현장 에서 35명 체포. |
3. 23 | 교동면 읍내리 | 100명 | 수정면 서곳리.동산리.주민들이 읍 내리로와서 시위.경찰 2명,헌병 6명 파견 진압 |
3. 24 | 교동면 읍내리 | 100명 | 교동 부근 주민들이 모여 공자묘,면 사무소,구군아문(구군아문)으로 몰 려 다니며 시위 |
3. 27 | 길상면 온수리 | 2,000명 | 길상면 주민들이 면사무소 습격.발 포하여 해산.시위자중 부상 1명 |
4. 1 | 송해.하점. 양사면 | 300명 | 송해면.하점면.양사면 주민 각 1백 명 정도가 밤중에 봉홧불을 올려 시위 |
4. 7 | 삼산면 석모리 | 10명 | 유경식,이안득 등이 밤에 봉화시위 |
4. 8 | 선원면 냉정리 양도면 인산리 외 | 900명 | 냉정리,인산리를 비롯 강화의 9곳에 서 밤중에 봉홧불 시위. 냉정리에서 부상 2명 |
4. 11 | 양도면 길정리 | 15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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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3 | 불은면 두운리 | 5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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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3월 11일 다시 모여 거사 날자를 사람들이 잘 모일 수 있는 강화읍 장날, 3월 18일로 정하고 거사 장소도 길상이 아닌 강화읍 시장으로 정하여 강화의 많은 주민이 참여하는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
o 준비는 극비로 이루어짐. 3월 1일 만세시위를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은 강화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경찰과 헌병들을 긴장하게 하였고, 감시심함. 그러나 준비장소가 변두리 지역인 길상면 시골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당국에서 전혀 눈치 못챔.
o 당일 배포할 유인물을 제작하기 시작
- 황도문이 서울에서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황유부의 집에 있는 등사기로 수백 장을 인쇄.
- 이와 별도로 ‘한일병합(韓日倂合)에 대하여 無稽한 사실(事實)을 날조(捏造)하여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의측(依則)하여 국권(國權)을 회복(恢復)하고 독립(獨立)하여야 할 취지(趣旨)’로 ‘국민회보(國民會報)’를 작성하여 인쇄.
-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은 ‘강화인민(江華人民)에게’란 제목으로
“조선인(朝鮮人)은 거국적(擧國的)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열광(熱狂)하고 있다. 아(我) 강화군에서도 사(死)를 결(決)하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여야 할 것이니,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면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은 자연히 기약(期約) 될 터이다.”라는 내용의 유인물 제작.
- 이 외에 <獨立報>를 인쇄하는 등 모두 4종의 유인물을 제작.
o 유인물이 만들어지자 지휘부는 많은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강화 본 도는 물론 섬지역까지 돌아다니며 호소하였는데, 유봉진은 주일인 3월 16일에는 주문도에 가서 교인들에게 ‘열변을 토하며’ 시위를 권면하고, 지휘부는 거사계획을 치밀하게 점검하고 준비.
o 3월 15일에는 선두리 염성오의 집에서 황도성, 황일남(黃日男), 황윤실(黃允實), 유학서(劉學瑞) 등 수 십 명이 모여 3월 18일 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단하였고,
o 거사 전날인 3월 17일 직산리(稷山里) 장윤백의 집에서 황일남, 황윤실, 유희철, 장윤백, 장명순, 조상문 등이 마지막으로 모여 만세시위 방법으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를 것과 참여 군중을 지휘할 계획을 점검. 이날 밤 그들은 일사불란한 행동과 거사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모두 함께 자고 3월 18일 장날 아침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각자 흩어져 강화읍으로 잠입.
o 한편 제작한 유인물을 강화읍으로 옮기는 일과 배포하는 임무는 강화읍교회의 전도부인 김유의가 자원. --- 여자이기 때문에 일경의 감시를 쉽게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 전날인 3월 17일 길상에서 유인물을 가져온 김유의는 치맛속에 숨겨, 다니면서 전부 배포.
o 3월 18일 강화읍 장날 아침, 강화 각처에서 모여드는 인파는 여느 장날과는 달랐다. 며칠 전부터 비밀리에 마을마다 연락하여 약속한 사람들과 김유의가 뿌린 유인물을 보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보통 때와 같이 나뭇짐을 진 나무장사, 봇짐장사, 광우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 등 장꾼들의 모습이었으나, 속내는 만세시위의 설레임으로 가득찬 사람들이었다.
o 12시쯤 되자 강화읍 관청리 향교에서 견장을 두르고 대기하고 있던 길상에서 온 유희철, 황일남, 황윤실, 장동원, 장명순 등 결사대원들은 우체국에서 울리는 12시 인경소리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되었던 결사대원들에 의해 봇짐과 광우리 속에 숨겨왔던 태극기가 웃 장터, 아랫 장터 할 것 없이 온 장터에 휘날렸다.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소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울분의 함성이었다. 목마를 탄 사람, 태극기가 펄럭이는 대로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사람, 격분해서 울먹이는 사람 한결같이 모두 ‘만세!’소리를 외쳤다. 향교에서 결사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시위 군중은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로 흐르는 시내의 돌다리(石橋) 부근에서 집결하여 시위를 고조시켰다.
o 시위가 시작되자 즉시 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병력에 의하여 시위를 주도하던 유희철씨와 길직에서 올라온 장상용(張相用), 그리고 강화읍교회 교인으로 자기가 만든 태극기 10여 개를 나눠주며 시위에 가담하였던 조기신(趙基信)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끌려갔다. 이때 시위대를 이끌던 결사대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군중이 잠시 혼돈에 빠졌다.
o 그 순간 유봉진 권사가 어깨에 ‘결사대장’이라고 태극기를 두르고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백마를 탄 ‘결사대장’ 유봉진이 나타나면서 시위 군중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유봉진은 시장 가까이에 있는 강화 종각(鐘閣)에 올라가 종을 쳐 군중을 모았는데, 경찰은 당시 모인 인원을 10,000-20,000명으로 추산하였다.
o 돌다리에서 유희철, 조기신, 장상용을 체포하여 경찰서에 인치한 경찰은 다시 출동하여 유봉진을 체포하였으나 에워싼 군중들의 위세에 밀려 풀어 주었다. 그리고 군중사이에서 시위를 이끌던 조상문도 체포되었다가 군중들의 힘으로 풀려났다.
o 유봉진을 비롯한 시위군중은 오히려 한국인 순사 김덕찬, 염이선, 유재면, 김순덕 등에게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촉하였고, 이에 경찰들은 불리함을 깨닫고 경찰서로 철수하였다.
o 유봉진이 계속해서 시위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鐘)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고, 다시 향교를 거쳐 경찰서로 향하였다. 군중들은 앞서 체포당한 유희철, 조기신, 장상용 등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세시간에 걸친 경찰서 앞의 농성으로 체포되었던 세 사람이 풀려났다.
o 만세행열은 계속행진해서 다시 장터로 모였다. 결사대 대원들은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결사대장 유봉진과 고익진 등이 ‘비겁하게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연설로 기세를 올렸으며, 이 시위는 자정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경찰은 군중의 위세에 눌려 주동자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은밀히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주동자들의 인상착의와 신분을 파악하기만 할 뿐이었다.
o 3월 19일 아침 일본 경찰의 요청으로 파병된 일본군 보병 1개 소대(40명)는 강화읍 치안을 장악하였고, 그 가운데 경찰은 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모두 63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시위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병이 들어서 시위에는 직접 가담하지는 못하고 대신 자기 집 문앞에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였던 김영돈(金永敦) 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o 대부분의 주모자들은 체포되었으나 결사대를 지휘한 유봉진을 비롯한 염성오, 유희철, 황도문 등 주모자들은 탈출에 성공.
- 유봉진은 포위망을 뚫고 마니산 속으로 피신해 한 달간 숨어 있다가 경찰이 그 부모를 연행하여 악형을 가하므로 결국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염성오는 장봉도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체포 됨.
- 유희철도 장봉도로 피신하였다가 화도면 내리로 옮겨 숨어 있다가 체포 됨.
- 황도문만 제물포를 거쳐 제주도까지 갔다가 3년 동안 강원도 산골에 숨어 지내 체포를 면함.
o 이로써 강화읍의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다른 지역의 시위는 계속 됨.
o 3월 21일부터 나흘 간 교동에서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3월 27일에는 길상면 소재지 온수리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 됨.
o 그러나 4월 들어서는 일본 헌병과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지자 낯의 시위는 끊어지고 대신 야간 봉화 시위로 이어 짐.
- 4월 8일에는 강화읍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유경식(劉瓊植)이 삼산 교인들을 규합하여 석포리 성공회 성당 뒷산에서 야간 봉화시위.
- 4월 22일 밤에는 송해면 솔정리에 사는 성공회 교인 고성근(高成根)과 손진수, 정수근, 이식구, 유수현, 유석현 등이 솔정리 뒷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 화도면 내리에서도 성공회 전도사 유치정(兪致貞)이 주도하여 동산촌(東山村)에 모여 만세 시위. 이때 유치정 이하 주민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 남.
o 이로써 강화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부터 4월 22일까지 계속되어 횟수가 총 11회에 달하며, 참가한 인원은 14,000- 24,000명이며, 시위 과정에서 부상자가 3명 생겼으며, 체포된 사람은 98명에 이름.
3. 교회청년들의 지하 항일운동
o 4월까지 계속된 시위는 일본당국의 감시와 경계가 심해지자 점차 지하운동화 되어 감.
o 서울, 인천 등지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강화읍교회에서 집회를 갖고 비밀조직을 결성.
o 주동인물이 조구원(趙龜元)이었는데, 그는 ‘결사대장’ 유봉진과 인척 관계였으며, 감리교인으로 ‘예수교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매일신보》기자로 활약.
o 오영섭(吳永燮), 고제몽(高濟夢), 조봉암(曺奉岩), 구연준(具然俊), 김영희(金永禧), 주창일(朱昌日), 김한영(金漢永) 등 8명과 함께 강화읍교회에서 집회를 갖고 비밀조직.
o 그리고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격문을 만들어 벽에 붙이거나, 일본인 경찰관, 철시하지 않은 상인들에게 공고문을 발송하였으며, ‘자유민보’(自由民報)등 10여 종류의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들은 경찰당국에 의해 4월 20일에 모두 체포되었는데, 일본 당국은 이들에게 『공범8인조』(共犯八人組) 이라는 별명이 붙였으며, 또 『예수교도 8인조사건』이라 불리기도 함.
o 이들의 활동상황을 보면,
- 조구원은 강화경찰서 경무과장 이해용 앞으로 그의 자필로 ‘당신도 조선사람이니 조선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운동자를 검거하지 말 것이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참살시키든지 아니면 불을 지르겠다.’는 취지의 문서를 발송.
- 고제몽은 잡화상 유진식 앞으로 그의 자필로 ‘조선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그 운동을 전개키 위하여 점포를 폐쇄하라’는 문서를 발송.
- 오영섭은 강화경찰서 순사부장 일본인 기희의안(紀喜義安) 앞으로 ‘조선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검거하면 각오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발송.
-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조봉암, 주창일 등은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서로 공모하고 자유민보 외 수십종의 유인물을 작성하여 강화읍내에 살포.
o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조구원, 고제몽에게는 곤장 90대를, 오영섭에게는 곤장 60대를 언도하고,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조봉암, 주창일은 증거가 불충분한 이유로 무죄 판결 됨.
4. 강화중앙교회 교인들의 3.1운동 참여
o 강화읍교회 교인들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 함.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 갈 때 김우제 전도사를 시작으로 홍승하 전도사, 손승용 목사로 이어지는 목회자의 기독신앙과 이동휘․ 김동수․ 김남수․ 유경근 권사 등 뜻 있는 애국지사, 즉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 교회로 몰려 온 지식인 평신도들의 애국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교회가 발전. 기독신앙이 곧 나라사랑으로 승화되었으며, 강화읍교회 교인들을 축으로 민족사상의 전통을 형성해 감.
o 강화 3.1운동과 관련된 대표적인 강화읍교회 교인은 전도부인 김유의(金有義), 고익진(高翊鎭), 조기신(趙基信), 주성일(朱聖日), 김영돈(金永敦)과 시위를 총 지휘하였던 결사대장 유봉진 그리고 ‘예수교도 8인조사건’을 주도하였던 조구원, 오영섭, 조봉암, 고제몽, 김한영, 주창일, 구연준 등.
o 이들은 3.1만세운동의 핵심 주모자로 체포되어 일본 당국에 의해 재판을 받은 조선총독부재판소의 기록에 나타난 명단을 발췌한 것에 불과하며, 20,000여 군중 속에 포함되어 시위에 앞장서 가담하여 이끌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단순히 가담하여 시위하였던 교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음.
o 강화3.1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은 모두 98명이며, 그 중 주모자 급으로 분류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3명이다.
o 출신 지역별로 분석하면, 전체 43명 중 길상면 사람이 24명으로 55.8%를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강화읍에 위치한 부내면 사람이 11명으로 25.6%가 되어 이 두 지역 사람이 81.4%나 차지하여 강화의 3.1운동을 주도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음.
o 특히 교회지도자들이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바 길상의 조종렬, 염성오, 유봉진 등이, 부내면의 김유의, 고익진 등이 포함되어 있음.
o 성별로 살펴보면, 43명 중 여성은 2명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앞에서 말한바 있는 강화읍교회 전도부인 김유의와 시위를 총 지휘했던 결사대장 유봉진의 아내 조인애(趙仁愛). 김유의는 권신일목사의 동생 권청일 권사의 처이자 권성집 목사의 어머니이며, 강화중앙교회 권종순 권사의 할머니이다.
o 종교적으로 분석하면, ‘예수교인’이 28명으로 전체의 65%이며, ‘천주교인’ 3명까지 포함하면 기독교인이 72%나 차지한다.
o 만세 시위에 참가한 주모자 급 43명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구녹서, 강문호, 조종렬, 장기홍은 ‘면소’판결을 받고 풀려났으며, 나머지 39명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1919년 12월 18일에 열린 1심에서 최창인, 장덕기, 신태윤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36명에겐 벌금형으로부터 징역 2년에 이르는 형이 선고되었다.
o 다음은 그에 대한 선고 내용이다.
유봉진 : 징역 2년(미결 구류일 180일 가산)
염성오 : 징역 1년에 벌금 20원(미결 구류일 180일 가산)
유희철, 권태철 : 징역 10개월(미결 구류일 각 180일,210일 가산)
장동원 : 징역 8개월에 벌금 30원(미결 구류일 210일 가산)
김용순, 이봉석, 이사국 : 징역 8개월(미결 구류일 210일 가산)
조인애, 김유의, 정홍문 :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 150일 가산)
김형주, 방 열 : 징역 5개월에 벌금 20원(미결 구류일 150일 가산)
장연실 : 징역 4개월에 벌금 20원(미결 구류일 120일 가산)
고익진 : 징역 3개월에 벌금 20원(미결 구류일 90일 가산)
장상용, 이윤문, 조종우, 조기신, 계기봉, 조재옥, 황일남, 황윤실, 최공섭, 유경식, 유학서, 황용근, 장흥환, 장명순, 신태의, 황도성 : 태형 90도
김갑규, 김영돈 : 태형 60도
주성일, 채공일, 장삼수 : 벌금 20원”
o 후에 대한민국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유봉진 등 강화3.1독립운동 주도자들과 함께 3.1독립운동 유공포상을 추서 받음.
o 강화군민들은 그 거룩한 애족정신과 애국운동을 길이 기리고자 1996년 8월 28일 강화읍 관청리 견자산 공원에 「강화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움.
o 고익진 --- 신문리 40번지에 거주하는 51세의 남자로서 일정한 직업은 없었으나 지도력이 있어 사람들이 잘 따랐다. 만세시위 군중을 열렬하게 이끌다가 체포되어 ‘징역 3개월에 벌금 20만원, 미결 구류일 90일 가산’의 형을 선고받음.
o 조기신 --- 신문리 244번지에 거주하며 포목상을 경영하는 젊은 청년교인이었다. 조기신은 자기가 경영하는 시장 포목점에서 미리준비 하였던 태극기를 시위 군중들에게 주어 태극기를 흔들게 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던 죄목으로 일본 당국의 재판에서 ‘태형 90도’의 형을 선고 받음.
o 김영돈 권사 --- 신문리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김영돈 권사. 그는 32세의 젊은이 였으나 마침 병환 중에 있어 밖에 나가 시위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위대를 도왔던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태형 60도’를 선고받았다.
o 주성일 --- 22세의 청년 교인 주성일. 그는 신문리 144번지에서 살면서 시장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청년이다. 혈기왕성하였던 주성일은 3. 1만세 시위가 발발하자 장사를 중단하고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도왔다. 그는 ‘결사대장’ 유봉진이 시위도중 검속 된 유희철, 조기신 등 결사대원을 구출하기 위해 강화경찰서 문 앞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지휘할 때 군중 속에서 시위 세력을 부지한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벌금 20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o 김광국 목사 --- 김 목사는 우리 교회뿐 아니라 강화읍구역을 담임하면서 1915년부터 강화지역에서 한창 불이 붙었던 마리산 부흥회의 지도자로 활약하는 등 강화지역 신도들의 신앙적 구심점인 동시에 또한 기울어진 나라의 광복을 바라는 민족운동가들의 정신적 지도자 이기도하였다.
o 유봉진 전도사 --- 3. 1만세운동 당시 강화남지방 길직교회에 시무하면서 마리산 부흥회를 이끄는 교회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본래 강화읍교회 교인이었다.
o ‘예수교도 8인조사건’의 주인공 중 김영희를 제외한 7명이 모두 강화중앙교회 교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 교회가 위치하고있는 신문리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18세부터 33세까지의 젊은 청년․학도들이었다. 조구원은 예수교학교 교사겸 매일신보 기자였으며, 고제몽은 생명보험회사 모집원, 구연준은 교사이고 김한영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특히, 조봉암은 해방 후에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냈으며, 오영섭은 합일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주창일은 우리 교회를 창립한 주역 중의 한 한 사람인 주선일(朱先一)의 둘째 아들인데, 형 성일(聖一)도 3.1만세 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5. 위기를 극복하는 교회
3.1운동의 여파는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3.1만세운동과 관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형을 받았으며, 교인들 대다수가 이 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일본 당국이 우리 교회를 보는 시각은 매우 따가웠다. 특히 목회활동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민족정신을 불러 일으켰던 김광국 목사와 교인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많은 교인들이 교회 출석을 회피하였다. 3. 1운동 이전에 평균 출석교인 수가 300여 명이던 것이 이후 출석교인수가 30여 명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김 목사와 전도부인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교회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3. 1운동 후 1년이 되는 1920년에는 교인출석수가 80여 명으로 불어났다.
o 또한 교회 청년운동 조직인 엡웟청년회도 매우 활동적인 사업을 전개하였다. 강화읍교회 엡웟청년회는 ‘자선연극단’을 조직하여 1920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1주일간을 공연하였다. 이때 얻은 수익금 2,300여원 중 지난해 3. 1만세운동으로 수감중인 가족의 구제금으로 1,300원을, 합일학교 유지금으로 1,000원을 기부하였다.
o 강화읍교회의 민족정신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지역에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는 강화감리교회가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구 한말의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볼 때 민족과 나라를 구할 길은 바로 교회뿐이라고 생각한 민족주의 지도급 인사들과 성경중심의 순수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어우러진 교회의 힘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다. 또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혹독하게 단련시킨 후 가나안을 정복케 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게 더 큰 승리를 위하여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