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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이곡과 공의 자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며 서애 류성룡의 외손주이신 한산이씨 수은 이홍조의 대기제사가 있었다.
수은 이홍자가 광해군 폐모사건을 보고는 삼강이 무너졌구나 하고 외조부 서애 류성룡을 따라 안동에 정착하고 우리는 영가인 즉 안동인이 되었다.
수은공 이홍조의 후손중 많은 훌륭하신분이 계셨고 맏이이신 통덕랑 휘 효제의 자중 석자 항렬은 무려 일곱분이나 되신다. 또한 수은 이홍조의 차남도 있으나 너무 범위가 넓어져 다음으로 미루어 본다.
요즘은 하도 개인정보하니 필자의 직계 이야기 이외에는 사실 올리기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성주이씨 한개마을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한 불천위 배향인으로 판서를 하신 응와 이원조가 찬한 스승이신 한산이씨 설죽공 이병은의 묘갈명을 올려두고자한다.
소퇴계 대산 이상정의 손주 중 맏이이신 면재공 이병운의 면재집이 번역되었고 면재집의 하이라이트는 아마 면재공을 찬한 만사 9수로 우리 수은공파 문중의 큰 어른이 돌아가신 슬픔을 찬한 족제 설죽공 이병은의 만사 일것이다.
그래서 9수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며 오늘은 성주 한개마을 불천위 응와 이원조의 찬으로 가고자한다.
오늘은 수은 이홍조 할아버지의 대기제사라서 웃을 수는 없지만 사실 내 평생 가장 기쁨이 가득한 하루이다.
소호에서는 소일할배로 이야기해야 다안다는 종고모의 이야기도 있었고 필자가 직계이신 가문의 설죽공의 묘갈명을 90프로 가깝게 한문번역을 하고 한문 독학한지 2-3년만에 최초로 혼자의 힘으로 번역을 해보았다.
필자가 사실 한산이씨 이야기를 쓰기를 시작해야 되겠다 마음 먹은지 십년이 되어가는것 같으나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당연히 자랑스런 한산인 목은아카데미 대표이신 안유재 흥복 박사님이시며 또한 세무공무원을 하시고 대학교 교수생활을 정년퇴임 하신 자랑스런 운계 희준 교수님이다.
아울러 항상 부족한 부분을 서로 토론하고 부족한 자료는 리서치나 조언을 해 주시는 미국에 있는 족친 주원 형님이 있어서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분이 계시지만 일일이 나열하기가 힘이 든다.
최근에는 항상 밀어주시는 숙부님이 있어 좋고 안동화수회의 카페지기 성원형님이 있으니 더욱 좋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큰 행사뒤에 창복 아제가 보내주는 사진 또한 고마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소리없이 종택이나 종가를 지키는 수은종손 대산종손 소산종손이외에 가장 큰 석자항렬의 종손도 있으니 일일이 글로 감사함을 전해본다.
오늘 번역본을 마주하고 보니 세상에서 내 평생 최고의 기쁜 날이지만 안동의 수은공파 시조이신 수은 이홍조 할아버지의 대기제사다 보니 어쩌면 한편으로 슬픔이 밀리어 온다.
부족한 번역 부분은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凝窩先生文集卷之十九
雪竹堂李公墓碣銘
설죽당 이병은 묘갈명
응와 이원조
1859년에 고산서원에서 스승인 설죽공 이병은과 남아서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였다.
은후시를 차운하여 주시고 헤어졌다. 그동안이 오래되지 아니하여 공의 부고가 이어졌다. 다시 그 차운한 만시(애도하는 소리)에 따라 소리가 울리였다. 설 전후(前後) 추위-세한-을 서로 기약하는 뜻을 부쳐왔는데 마침내 하늘에서 부르는일 생겼구나
슬프도다 !
공의 자 고독한 수영이 말하였다. 소매자락에 들었던 족친 이돈우 시독관이 올리는 행장을 보여주며 나에게는 묘지에 새길 명을 청하니 어찌 차마 피눈물나는 분에 넘치는 묘갈명을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행장을 슬픔에 차서 만져보니 공의 휘는 병은이요 자는 질여로 한산인이다.
세상에 가정목은선생 두분이 계셨으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대사간을 지낸 윤번과 연안부사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된 희백이 있었다. 휘 홍조는 전 회인현감으로 조정의 어지러운 난(폐모사건)을 보고 외조부 서애 류성룡을 따라 남하하여 안동에 정착하였다. 호는 수은이며, 고조는 휘 석보이며, 증조는 휘 재화이다.
모든 것을 전부 갖춘 숨은 덕이 있었으나 벼슬을 하지않았다.
조부는 휘 현정이며 홍문관교리이며 재종형인 대산선생에 나아가 학문하였다. 호는 약와이다.
부친는 진사를 지낸 경이다. 선과 의를 좋아하였으며 배위는 경주최씨 처사 흥호의 따님이다 부인으로서 덕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조 임인년 (1782년) 8월 4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강개하였고 기억(記憶)하는 힘이 좋으셨고 보통(普通) 사람보다 뛰어 나셨다. 관례를 하고나서는 족숙 면암공 이우에게 배웠다.
공은 대산선생의 학규를 한결같이 준행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공은 가승을 이어받아 학업에도 게으리지 않으셨다. 형인 신암공 이병하와 함께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서로 매진하였다. 선배의 큰 덕망은 모두 기대했던 것에 이르러 영향을 주었고 과거 공부도 틈나는 대로 행하였다.
크고 작은 향시에서는 여러번 나가서 과장에 들어가서는 매번 장원하였다.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의 글씨를 대신 써 주던 사수가 뇌물을 쓰도록 암시하였는데 공이 물리치고 남의 지식을 이용하지 말라 하였다.
계유년 (1813년) 5월4일 부친이신 진사공 휘 경이 돌아가시니 예를 행하는 데 어그러짐이 없었다. 맏형 신암공 가에서 손님접빈과 제사 잘 치르셨고 공이 몸소 책임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애쓰셨다.
계미년(1823년) 문소(의성)에 살았다. 관례후 옛 본집( 맏형 신암 이병하)과 오리거리에 떨어져 살았다. 매일 틈이나면 한결같이 어머님이 계신곳을 살피었다. 특별한 맛나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봉양하였다.
무자1828년 천간 넷째 화(火)에 속하면서 여름이 무르익어서 최대한 꽃이 핀 날에 돌아가셨다. 공은 이미 쇠할하였고 상앞에서 몹시야윌 만큼 모친의 죽음을 슬프하였다.
마을의민간풍속에따라 치장을 맡기고 처음들어같을때와 틀어져서어긋났다 오래지나 의복을 입고 반드시 묻고여쭐일이 있을지로다. 한결같은 사우( 선비 ) 공은 그 마을의 가을 제사를 지날 때 문밖의 야인들이 평안하지 않다고 물으니 마주하며 이미 문벌가문의 제사가 삼일이 되지 않았도다 말했다. 그리고 책읽는 것을 그치지 않으셨으며 독서로써 한집안의 지체를 매우놓은 곳에 이끌어다고 칭송하였다 .
병신년 1836년 돌아왔으며 맏형 신암공을 만나서 근심을 이야기 하였으며 모든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갔으며 공은 해가질 무렵경치에 분리하여 떠남을 한탄하였고 늘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신(제사)에는 가서 참석하였으며 힘을 다하여 제수(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음식)를 도왔으며 노년에 근력이 강하지 못하게 되었고 곧 가정의 예도에 따라 자식과 제사의 규칙을 나누었고 제사를 합장하여 가을제사를 지내셨고 혈족들 앞에 조부 제위가 평온하지 못하다 하시고 마을의 웃어른들께 의 논하여 여쭙고 정식으로 시행하였다.
족제 병화와 더불어 가을 제사를 지내다. 음양의 태어남을 논하였다 모두가 비로소 아래에서 시작된다 공은 양의 태어남도 아래에서이다 라고 말하였다. 음위에서 태어난다고 하였다 증거로 시경의 나무뿌리를 언급하였다 사람의 의복도 모습이 나온다하였다.
늘 아들과 조카들의 혈족간의 인품의 훈육하였으며 마음의 정은 통하므로 나무의 진액과 같으며, 오행의 하나인 나무에 진액이 없다면 이는 곧 마르게 될 뿐이다. 또 사람의 집은 규범을 유지를 막게 된다.
오로지 예만 존재할뿐이다 부녀가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서는 음탕한놀이말이 있으면 안된다 걸음보를 따를때는 예를 다해 공경하였다 또한 상도가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병자호란 같은 나쁜 실행을 행하니 도리가 아니다 꾸짓었다.
곤충들(출세하고자하는이)은 편안하게 자며 쉬며 출세한다 말하였다 자랑이 아니라 재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일 오랑케 왕을 보는것과 같은 것이다 이곳에 마음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또한 일찍이 한가한 서책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은 편안하게 일생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벼슬을 하지않고 명을 밝히며 흥하는 것이 옳다 재능은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으니 가까이 베게포에 가까이 두고 수건으로 글을 싸고 외우라 하셨다.
주역의 학문 말씀을 이어시고 글을 쓰고 바퀴가 돌아간다는 말을 말하였다 매일 밤 등불없는 시간에는 매우어두운가운데 암송하고 외웠으며 중년이 지나가면서 가계가 떨어지고 쇠락하였으며 채소나현미로 계속이어갈수없었다.
그리고 거처에서 늦게 가고 재물의 이익 말씀을 하지 않았고 손수 학문의 글자를 아끼셔고 일찍기 옛도를 몸소 가르치고 사람을 보면 선하게 대하고 용모 단정히 하였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거절하고 예가 없을까바 더 걱정할뿐이었다 말을 지키고 지조를 지키며 바라보았다.
배우고 가르치는것에 노력하여 옳지않은 허한과실이 없었다 또한 성품이 아름다운 산과 물 같았다 두루 지역내를 돌아다녔으며 남의 마음을 잘모아 조우하였다 마음을 기울여 쏟아부었다 .
시와 문장이 높아서 매우 정교하고 맑았다 떨어지는 나뭇잎에 글을 새기고 펴냈다일찍이 선죽교(절교와 지조가 드높은)를 지나셨고 시로 알리고 가르치고 자식에게 남기셨다.
승국(전대왕조)시 능히 재주가 뛰어났다. 선생은 오랜세월 매우 큰 대학자였으며 천지가 잇는 일교가 어려울시 많은 사람들에게 전서나 고서를 전하였고 세상의 마땅히 따라할글이 거짓으로 병들고 많은 초서가 축적되지 않을시 이것의 방패가 되어준 책이었다 태극 점괘 36궁도일백을 주해(번역)하였다 대게 공은 마음을 다해 연구를 하였다
젊은이(자식)에게 상하완결된편(책)을 보여주었다 옛것을 취하고 지금 격언을 말해 주었고 이것이 가훈이 되다 설죽가 수십수 집필하고 몸소 하늘이 부름이 있어 정황을 덮었도다.
아 슬프도다 공은 옛의 두터운 정분으로 아름다웠고 굽히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 풍속을 따르고 시대에 조류하지 않았도다 작은것도 빈텀없이 모아서 다스렸도다 법도도 절도있게 바르게 하였으며 세상에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도다
그리고 소중함을 다하고 검소함을 다하고 삶을 마치었구나 생각컨대 사문을 지키고 제자들에게는 마을을 다해 가르쳐주셨도다 스승이 잠든 곳에 책상자를 보내오니 저 아름다운경치의 명승에게 마음속에 잊을수 없는 이에게 보내는구나 예학을 논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보내었다. 선조의 뜻에 어긋남없이 나누어 주었고그 근원에 까지 명성이 미쳤도다
그리고 한두번 재차 바라보며 마음속에 굳은 약속 경외하여 맡기어 일찍이 허가해 주어서 만귀정시 보내었지만 시가 도착하기도 전에 선생의 부고가 들리어와서 인생을 마감하시니 원통함이 넘칩니다. 더욱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
1860년 1월 4일에 돌아가시었다. 3월 21일 의성현 북세촌 을원(둘째천간)에 장사지내었다. 배위는 의성김씨이며 숭정처사 표은선생 김시온의 8대 후손 처사 김곤수의 따님이다. 행실이 바르고 고요하면서 아름다웠다. 큰덕이 있어 어긋남이 없었다.
경자년 1780년 1월17일에 태어나셨고 계묘년 1843년 3월 17일 돌아가셨다. 묘는 원동남쪽 묘좌에 있다. 2남 4녀를 두었으며 2남중 남자는 수영, 수문이며 여자는 김영노, 김만우, 김헌유, 류치상에게 시집가셨다. 수영의 1남은 돈대이며, 1여는 아직어리다. 수문은 1남 돈시이며 김영노의 남자아이는 김회림이며 여는 이만성, 류응호에게 시집갔다. 이만우의 남자아이는 중명이며 김헌유는 2남을 두었는데 한명은 수희이며, 한명은 어리다. 여아는 박가수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명은 아래와 같다.
법도있는 행동 높고 높아서
아름다운 말이나 문장 절개가 있었네
절제된 글씨를 즐겼으며
의를 즐기어 가축을 기르듯 실행 하였도다
가학을 실행하였으며
늦은 시간에도 널리 학업에 탐독하고
가난하고 검소함에도 인색하지 않으셨도다
마을의 문을 널리 베포하고
대나무처럼 말고 눈처럼 청명하여
불자 새겨 길이 이름을 남기게 하리라
필자의 6대조 설죽공 이병은을 기리며 수은 이홍조의 대기제사에 최초로 번역을 올려본다.
후손 해은 이대원 삼가글을짓다(번역은 계속 수정예정임)
凝窩先生文集卷之十九 / 墓碣銘
雪竹堂李公墓碣銘
歲己未。余與雪竹李公會話於高山。臨別次隱侯詩以贈。未久承公訃。又次其韻以輓。歲寒相期之意。遂成千古。悲夫。日其孤秀瑩。袖李侍讀敦禹狀。請余墓銘。其忍以老洫辭。按狀公諱秉殷字質汝。韓山人。上世有稼亭牧隱兩先生。入本朝大司諫允蕃。贈吏參希伯。至諱弘祚。以前縣監見昏朝政亂。隨外大父西厓柳先生南下遂家焉。號睡隱。高祖諱碩輔。曾祖諱再知。俱隱德不仕。祖諱顯靖弘文校理。從再從兄大山先生學。號約窩。考諱敬進士。樂善好義。見重於宗黨。妣慶州崔氏。處士興浩女。以婦德稱。健陵壬寅八月四日生公。自幼剛介。記性過人。及冠學于族叔俛庵公。公敎人一遵大山齋居學規。公承受不懈。與伯氏信庵公征邁博約。先輩長德皆期許之。傍治擧業。屢占小大鄕解。嘗入塲屋。寫手吏潛示關節。却不用而亦不使人知。癸酉五月丁進士公憂。執禮罔愆。伯氏家賓祭租稅。公自幹當。不以爲勞。癸未僦居聞韶。距故庄五里。每間日一省慈闈。遇異味必袖進之。戊子丁憂。公已衰而哀毁如前喪。所寓里民俗椎樸。始至齟齬。久而服信。有事必咨稟焉。一士友嘗過其村。問野人以安否。對曰其家不烟已三日。而猶讀書不掇。人以讀書家稱之云。丙申撤歸。而伯氏公遭慽。挈家入山。公以晩景分離爲恨。每往參考妣忌辰。竭力助祭需。至晩年筋力不可強。則依家禮支子別祭例。紙榜行事於家。嘗以祔祭祝式。祖位前屬稱未穩。稟議于門內諸長老。定式施行。嘗與族弟秉樺。論陰陽之生。皆始於下。公言陽生於下。陰生於上。引朱詩以證之。人服其見。每誡子姪曰骨肉之間。情志流通。如木之有液。木而無液則枯矣。又曰人家之維持防範。專在於禮。閨閤之內。不可有戲褻之言。拜揖步趨。亦有常度。而今人胡亂做去。甚非道理。又曰蚤寢晏起。非大罪過。然此可見一日之間。無所用心也。又嘗曰閒坐不近書冊。便是懈意一生。是以公平居牕明而興。纔離枕必着巾帽。係辭庸學心近朱退諸書。輪流上口。每夜無燈之時。暗暗成誦。中年以後。家計旁落。𨓏𨓏疏糲不繼。而處之晏如。口不道財利言。手不書貧窶字。嘗以古道自期。見人不善不能容。以是多忤於人。而亦不敢以無禮加焉。觀於言議操守。學力果不可誣也。性又喜佳山水。遍遊域內。遇會心人。傾倒輸瀉。爲詩文淸高雅潔。刊落枝葉。嘗過善竹橋。詩曰牧老遺孫在。能言勝國時。先生千古大。天地一橋危。人多傳誦。病世之文蹈襲滋僞。所著藳多不畜。只有若干卷。太極爲卦畫圖三十六宮圖及朞三百註解。皆公所留心究賾。示兒上下篇。取古今格言。以爲家訓。雪竹歌數十篇。盖自况也。嗚乎。公好古而不迂。隨俗而不流。綜理微密。節度簡正。可以有用於世。而惜乎其竆約以終老。惟以衛斯文訓後進爲心。送子負笈于坪上。與意中諸名勝。論學論禮。往復期勉。余於公居相遠。未及源源。而一再承覿。猥托以心契。嘗許和送晩歸亭詩。詩未到而訃先至。人世存歿之憾。尤不禁潸然而涕也。以庚申正月初四日考終。三月二十一日。葬于義城縣北細村後負乙原。配義城金氏。瓢隱先生是榲之後處士坤壽女。貞正靜淑。媲德無違。生以庚子正月十七。歿以癸卯三月十七。墓在府南院洞卯坐。生二男四女。男秀瑩,秀文。女金老永,李晩遇,金憲裕,柳致相。秀瑩一男敦大。一女幼。秀文一男敦詩。金老永男晦林。女李晩星,柳膺鎬。李晩遇男中明。金憲裕二男壽煕,次幼。女朴家壽。餘幼。銘曰。
制行之高。修辭之簡。嗜書如歜。樂義如豢。載其家學。施于中晩。惜乎竆約。布褐里閈。竹淡雪淸。余銘弗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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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은 이홍조 할아버지의 대기제사 > 한산이씨 마지막 귀중한 유산이다.
첫댓글 대기제사 에 많은 일가님이 참석 하여 제사를 잘 모셨네
아우님 번역 하느라 수고 가 많았으며 또 한번 배움을 얻어
가네 오늘도 활기차고 보람된 하루 되세게
네 형님 감사합니다 아직 번역이 다소 서툴러 부족한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는 서원 향사만 가다 보니 이전에 부터 있던 출향을 위한 대기제는 사라지거나 간단하게 대체되거나 한 줄 알았습니다. ㆍ역시 이시대 최고의 문중에 마지막 유산 대단하십니다 형님
수고하셨네
덕분에 더 많은것을 알게되어 고맙고
앞으로도 좋은 소식 전해 주시게
http://m.cafe.daum.net/hs5359/gSSi/99?svc=cafeapp
위는 이전 올린 울 할매의 선조되시는 표은선생님 이야기입니다 표은선생은 의성김씨 학봉김성일의 맏형이신 약봉의 후손 계를 이었으며 수은 이홍조의 아들이신 통덕랑 휘 효제의 배위이신 귀봉가에서 출하였으니 결국 똑같은 피를 겹겹 다시 받으셨습니다.
또한 재령이씨 갈암이현일이 우암 송시열과의 논쟁에서 패할때 적극 변호하신 분이 표은선생의 증손 제산 김성탁이며 제산이 유배갈때 끝까지 지킨분이 제산의 아들 구사당 김락행으로 구사당 김락행은 대산이상정과 아주 친하게 지내시고 학문을 넓힌 분이십니다. 공의 후손이 처사 김곤수이며 김곤수는 또한 전주류씨 수곡파 노애공의 사위가 되시니 설죽공이병은의 배위 울할머니는
대단하신 분의 따님이셨습니다. 우리문중이 면암 이우의 만인소로 벼슬길이 막히고 세도정치로 길이 막힌 시대상으로 재야에 있었으나 19세기 중반에 오면서 다시 재기할시기에 또 1855년 만인소가 일어나니 다시 암울한 시기를 보내셨습니다
지조와 절개는 대한민국 최고의 피를 받았습니다. 숙부님 ㅎㅎ 이 모두는 결국 현세 행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즐거운 불금 보내십시요 부족한 번역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