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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무석,소주,상해를 가다 2011.9.23~26 (하)
제3일차 무석의 볼거리-삼국성(三國城) 어제 태호(太湖)의 여호(蠡湖)에 있는 서시와 범려가 거닐었다는 정원인 여원(蠡园)을 산책하 면서 춘추시대 철천지 원수간인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미인계와 와신상담으로 점철된 인고의 세월,그리고 결국은 완벽한 복수로 오나라를 패망시키는 역사를 되새기며 고전을 공부하는 계 기가 되었다. 무석에서 자고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다시 태호 인근에 있는 삼국성(三國城)으로 향했 다. 삼국성 안에는 '삼국연의'의 하이라이트 '적벽대전'의 셋트장이 단연 주목을 끌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는 많은 전함배들이 각기 깃발을 펄럭이며 떠 있다. 오나라 수군진영에서 오나라와 촉나라가 연합하여 위의 조조와 대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제 갈량호에 탔다. 제갈량호는 촉나라 배이다. 오나라 '주유호'도 인기가 있다. 근 1시간반을 배를 타고 유람했다. 2500년을 회귀한 기분이다.
현재 공사중이라 보지 못했다. 대신 셋트장으로서 완벽한 감로사를 이곳 삼국성 안에서 구경 했다.감로사는 산문,불당,종주와 전탑으로 구성된 지금 중국내에서 유일한 한나라 시대 양식 의 불당이다. 삼국지의 토막극인 '유비가 데릴사위 되다'는 이야기가 바로 옛 감로사에서 있었 다. 손부인을 맞이한 곳이다. 오나라 왕이자 장인인 손권의 모친 왕태후가 예불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삼국성에서는 84부작 드라마 가운데 ‘유비가 손부인을 맞이하다(劉備招親)’ ‘적벽대전(火燒 赤壁)’ ‘짚단배로 화살을 빌리다(草船借箭)’ ‘제갈량이 동남풍을 부르다(諸葛亮祭風)’ 등 10여 편의 주요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삼국성은 실감나는 영상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공헌 이외에 지금은 7,000만위엔에 달하는 투자금을 몇 해 전에 회수했을 정도로 지역 관광산업의 효자노 릇도 하고 있다. 양산박을 무대로 한 수호지의 촬영장도 이 곳에 있었다. 포와 싸우다(三雄戰呂布)’라는 공연이었다. 호뢰관(虎牢關)에서 여포와 유비, 관우, 장비가 마 주쳐서 한꺼번에 싸우는 이야기를 재현한 것인데, 그러싸할 분장의 배우들이 공연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말을 다루고 창과 칼을 휘두르는 솜씨, 마상(馬上)에서 부리는 재주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깝다.처음엔 용맹의 표상인 장비(張飛)가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여포와 일합을 겨루지만 승부가 나지 않자 관우(關羽)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협공을 하게 되고, 그래도 제압하지 못하자 끝내 유비가 쌍칼을 불끈 쥐고 이에 가세하여 결국 방천화극의 여포를 패퇴 시킨다. 다음 찾은 곳은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을 극화한 공연장이다. 원형 공연장에는 공연시간 전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세 장수가 복숭아 핀 정원에서 의형제를 맺는 장면을 무술공연과 함께 보여주었다.역시 삼국지의 주인공 세 의형제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 듯, 관중이 많았다. 삼국성에서의 관광일정을 모두 마치고 소주로 향했다.
소주(蘇州)는 물,정원,비단,미인의 도시 다.또 정원의 도시이다. 소주에만도 200개가 넘는 정원이 있다. 비단과 미인의 도시이다. 소주에 올 때마다 누에고치로 실크를 짜는 공장견학을 하게 된다.
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좋아 곡식과 물고기가 많이 생산되어 어미지향(魚米之鄕)으로 불리 는 소주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상(商)대 말기에 주나라 왕에게는 세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어 했다. 이를 눈치챈 맏아들과 둘째는 강남의 매리로 내려가 머리를 깎고 왕위에 욕심이 없 음을 알렸다. 이들은 선진문화와 농업기술을 현지인에게 전파하였고 그곳에서 맏이 태백은 군장(君長)으로 추대받아 국호를 균오(勻吳)라 했는데 균오가 바로 오나라이다. 19대 왕 수몽은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 소주로 기원전 561년 도읍을 옮겼다.
가 취향대로 맵게도 덜 맵게도 요리하면서 먹는다. 사천식이라 역시 얼큰하게 맵다. 마르코폴로가 천산산맥을 넘어 실크로드를 따라 소주 항주까지 와서 그의 견목록에 '하늘엔 천국이, 땅에는 소주.항주가 있다'고 하면서 동방의 신비한 중국을 소개했다. 그리고 오나라 왕 합려가 묻혀있다는 중국의 피사탑 호구사탑을 관광한다. 마지막으로 소주 운하를 배를 타고 가면서 주변경치를 감상한다.
삼국성 입구 강남논어반 친구 중국 문화탐방팀 일행
광고-中國地
오나라 수군진영 주유호에 탄 관광객들 배를 타고 유람하는 동안 공연도 있다. 적벽대전(火燒赤壁)
감로사 가는길
무량한 공덕을~
대웅보전과 종각 삼웅전여포 공연을 위해 호뢰관으로 여포와 겨루는 장비 유비관우장비의 합세에 의해 달아나는 여포 漢의 깃발과 삼국(위,조,촉)의 진영 깃발 도원결의장 도원결의 공연장에는 관중이 많다. 유비,관우,장비의 형제결의 장면 소주(蘇州) 톨게이트
한산사(寒山寺)와 풍교야박(楓橋夜泊) 장계는 과거에 두번이나 낙방하고 귀향하던 중 이곳 한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산사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감회에 젖어 지었다는 이 "풍교야박'은 소주(蘇州)의 명물이 되었다. 풍교야박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단풍과 고깃배 불빛이 시름에 잠 못 이루게 하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들린다. 자유산책시간이 주어졌다. 철령관(鐵嶺關)중수비가 시선을 끈다. 북쪽 오랑캐를 수어하고 백 성들을 편한하게 보호하는 목적으로 철령관을 세웠다. 인공운하로 소주 시내를 감싸고 도는 하를 잇는 아치형 돌다리인데 옛날에는 밤이 되면 뱃길이 봉쇄됐기 때문에 이곳은 좋은 휴식 지가 되었고 후에 장계가 이 다리를 배경으로 '풍교야박'이라는 시를 쓰면서 풍교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다. 풍교야박은 많은 서예가들이 벽이나 돌조각으로 작품을 남겼 는데 그 중에도 명나라 초기 유명한 서법가인 심도(沈度)가 쓴 "楓橋夜泊" 전문이 벽면에 새겨 져 있어 그의 명필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산사 안으로 들어가 절내를 구경하였다. 중국 10대 사찰 중의 하나인 한산사는 양나라 때 지 어졌지만 당나라 고승 한산이 주지스님으로 머문후 한산사로 불리게 되었다. 한산사 종소리가 인용되기도 한다. 당나라 때 대표적인 탑이지만 원래 중국식 탑은 아니다. 한산(寒山)스님의 어릴 때 친구인 습득(拾得)은 결혼전 같이 도를 닦았다. 한 여인을 두고 두
입구에는 포대화상이 일행을 반긴다. 향로에 향을 피우고 안으로 든다. 중국 절에서는 향이 유난히 크고 양도 많이 태운다. 연기가 자욱하다. 홍법당을 지나 종루에서는 돈을 내고 종을 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타종하면 복이 온다고 믿는다. 한산,습득 두스님의 한습전설 (寒拾傳說)이 전해오는 가운데 사찰 안의 '한습전(寒拾殿)'에는 벌거벗은 발에 배가 드러나고 호리병을 차고 웃고 있는 한산과 습득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한산종원 풍교승적 다리를 건너며 설명시간 장수를 기원하다 풍교(楓橋) 입장을 기다리며 서예대가 沈度선생이 쓴 풍교야박 심도선생 소개 철령관 운하 옆으로 한산사와 풍교 관광지가 있다.
철령관 중수비와 유람선
풍교대박의 작자 장계선생 동상/다리 위로 시제와 시문이 걸려 있다. 한산사 입구에 포대화상이~
홍법당/佛頂尊勝陀羅尼石幢
寒拾전설 聽鐘石 소원풀이/동전으로 종맞히기 부처님
無上淸凉/普明寶塔
보명탑원
요의 아홉번째 아들/후원석등
한산사 종/萬法歸宗
寒拾(한산과 습득)유적
유네스코 문화유산-사자림(獅子林) 한산사와 풍교관 관광을 마치고 사자림(獅子林)으로 향했다. 1342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대 승려인 천여선사(天如禪師)와 그의 제자가 그들의 선생인 중봉 신승(中峰神僧)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원이다. 원래 중봉선생이 절강 천목산 사자암에 살았 고, 원내에 사자모양을 한 바위가 많아서 이름을 사자림이라 지었다. 정원의 전 면적이 약 1헥 타르로 영롱한 태호석으로 이루어진 석가산(石假山)이 그 중 가장 유명하다. 어 있다. 또 정원 둘레에는 회랑을 둘렀는데, 사면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위아래에 굴곡이 있 고, 회랑벽에는 67개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송대 4대 서예가인 소식(蘇軾), 황정견(黃庭 堅), 미비, 제양(祭襄)이 쓴 것이다. 또 문매각, 과폭정, 와운실, 하화정 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조형이 서로 달라 서로 다른 정취를 풍긴다. 대충 눈으로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더욱 관관객이 많은 모양이다.
호구사탑(虎丘寺塔) /합려의 무덤 하얀 호랑이가 지켰다는 중국의 피사탑 이어 찾은 곳은 호구(虎丘)로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합려왕의 묘로 알려진 언덕이다. 실제로는 어디에 묻혔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호구산풍경구 소개 간판에는 일본말과 한글도 적혀 있어 한국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려준다. 호구는 호구산,해용산이라고도 부른다. 경구내에 암벽이 기이하고 가파르며 숲과 샘이 수려하고 맑다. '오중제일산(吳中第一山)'의 평가를 가진다. 역사에 따르면 오나라 왕 부차는 부친 합려를 이곳에 묻고 3일을 지낸후 백호가 언덕 위에 나타났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호랑이 모습 같다고 하여 호구 라 명명했다고 한다. 해발 34.3m에 불과하지만 운치가 좋은 명승지로 북송의 시인 소동파는 '소주에 와서 호구를 유람하지 않으면 유감이다'라고 했다.
호구산으로 오르면서 처음 보이는 것은 동그란 우물샘이다. 감감천(憨憨泉 hanhan spring)이 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 양梁 나라 때 고아가 된 봉사가 절에 들어왔다. 처음 온 동자승은 산 아래 물을 길어 산 위 절까지 나르는데 힘든 일을 정성으로 하는 어린 봉사를 바보라고 사람들 이 감감(憨憨)이라 했다. 憨은 어리석다는 글자이다. 신령이 열두 살 봉사에게 천안(泉眼)을 주었고 물 나올 자리를 알게 된 꼬마가 맨손으로 우물을 팠다. 답답하게 지켜보던 승려 하나가 여기에 물이 나오면 내가 두꺼비가 되겠다고 했다. 과연 우물에서 물이 나와 이 물로 눈을 씻 은 소화상은 눈을 뜨고 고승 감감(憨憨)이 되었고 똑똑하던 승려는 돌 두꺼비가 되어 우물 옆 에 웅크리고 앉아 우물을 지킨다. 실제 두꺼비가 된 돌이 있어 흥미를 돋군다. 열녀비 성격의 고진양묘(古眞孃墓)라는 아담한 비각을 지나니 시검석과 호구검지가 나타났다.
검을 시험한 바위 라는 '시금석(試劍石)'이 눈길을 끈다. 길이 2m, 너비 1.5m 가량의 둥글넙적 한 바위에 칼로 내려친듯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시금석에도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오왕 합려는 평소에 보검 욕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칼을 찾을 수 없어 노심초사하 고 있었다. 더군다나 라이벌이었던 이웃 월나라에는 천하의 명검을 만들기로 유명한 구야자 (歐冶子)가 살고 있었기에 더 더욱 합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그러던 중 소주 성내에 간장 (干將)이라고 하는 대장장이가 합려를 찾아와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보검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합려는 100일 안에 가장 좋은 보검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간장은 100일 내에 혼신의 힘을 다해 당대 최고의 보검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보검을 합려에게 바치면 이런 보검이 또 다시 만들어질 것을 두려워한 합려가 분명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짐작했다.
간장은 또 다른 검을 만들어 앞의 검은 간장검이라고 하고 후에 만든 검은 막야검이라 명명한 후 마침 임신을 하고 있던 부인에게 간장검을 주어 피신시키는 대신 합려에게는 간장검이 아닌 막야검을 바쳤다. 그때 마침 호구를 걷고 있던 합려는 기뻐하면서 그 칼로 옆에 있는 큰 돌을 치니, 돌은 두 쪽이 났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하였다. 만족한 오왕은 간장의 추측대로 이와 같은 훌륭한 보검이 또 다시 세상에 만들어질 수 없도록 간장의 살해를 지시했 다. 남보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장이 비명횡사한 지 18년이 지난 어느 날, 합려는 복수를 위해 간장검을 차고 온 간장의 아들이 휘두른 간장검에 의해 죽고 간장검과 막야검은 청룡과 적룡으로 변해 청년은 청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곳이 바로 시검석이라는 갈라진 돌의 유래이다.
시금석을 지나면 거대한 너럭바위가 비죽비죽 놓여있는 천인석(千人石)이 있다. 이바위는 합 려왕의 무덤을 만든 후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동원된 천명의 인부를 살해한 곳이라고 한 다. 이어 조금 더 오르니 합려의 무덤이 있다고 추정되는 입구에 연못을 파서 물로 채워 막아 놓았다. 검지(劍池)라는 붉은 글씨가 뚜렸하다. 명검을 좋아했던 합려 무덤에는 3천개의 보검 이 묻혀 있다는 설을 들은 진시황이 이를 도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진시황 또한 정작 자신의 무덤이 발굴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져 무덤 속을 지키던 병마용이 전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부터 달러를 벌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참을 걷다보니 호구의 정상이 보인다. 호구 정상에는 동방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는 호구 의 사탑이 비스듬하게 서 있다. 호구탑을 운암사탑(雲岩寺塔)이라고도 한다. 운암사탑 중수비 가 서 있다. 탑의 높이는 47.3m, 모두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15도 가량 기울어진 까닭에 꼭대기와 아랫부분이 약 2.3m의 차이가 난다. 호랑이 모습을 닮았다는 호구에 꼬리 부문이 없 어 꼬리모양의 사탑을 세움으로써 완벽한 호랑이 모습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평면 8각형의 모습의 벽돌로 만들어진 이 탑은 소주시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서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이 어머니를 위해 세웠다는 북사탑과 함께 소주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운하에 배를 타고 소주 도시 전체를 안고 흐르는 외성하(外城河)는 소주를 살찌우는 젓줄이다. 소주 사람에게는 단순한 운하만의 의미를 넘어 생활의 근거지였다. 일행은 운하에 배를 띄워 약 30분간 유람을 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지닌 고 건물이나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 강에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어 산다는 말에 고대와 현대의 시간차를 잊어버린다. 중국의 역사상 운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운하 양 옆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서 푸른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운하는 수나라 양제가 이룩한 역사물로 당시에 버드나무가 아름다워 저게 무슨 나무냐고 물은 것이 인연이 되어 수양버들이 되었다고--이 운하는 북쪽으로 이어 져 실크로드로 연결되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오늘의 바쁜 스케쥴도 마지막 실크공장을 방문함으로 막을 내린다. 만드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쇼핑에 관심도 없고하여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한테는 중요한 과정이므로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간이 걸리는 걸 보니 매상이 제법 되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식당에 프랑카드도 걸고 특식도 시켜 푸짐한 메뉴로 모처럼 호화스런 식사를 하였다. 여행사측이 특별회식을 준비한 것이다. 노선생의 인사말과 여행사,가이드의 노고에 다같이 박수를 보냈다. 내일은 상해로 가서 마지막 스케쥴을 보내고 서울로 가게 된다.
사자림 사자림 연못 오중제일산
입장문/호구산풍경구 안내 호구산 출입문앞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감감천(hanhan spring)
감감천과 두꺼비석상 고진양묘 시검석 천인석 호구검지 검지 호구탑
소주 운암사탑(호구탑) 소주 운하에서 배를 타다
운하 유람선과 선장
운하주변의 풍경 수양제로 인한 수양버들
마지막 밤의 만찬 제4일차 상해의 하루 5성급 호텔 춘신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춘신이란 이름이 생소하지 않아 알아 보았더니 초나라 재상 춘신군을 뜻하는 이름이다. 강같은 호수가 붙어 있는 호텔이다. 호수 이름이 춘신 호이다. 예전 춘신군의 땅이었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날씨가 흐리다. 여태껏 날 씨가 좋아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끝까지 비가 오지 않고 좋았으면 싶다. 상해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상해는 비록 화려한 역사는 없지만 짧은 시간에 최고의 경제발전을 이룬 대도시이다. 인구가 2500만이나 되고 도시의 경제로는 첫째가는 부유한 도시이다. 아편전쟁후 남경조약에 의해 5개의 항구도시가 개방되면서 상해는 동방의 파리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78년 등소평 이 시장경제를 도입할때는 상해는 제외되었었다. 1993년 상해개혁으로 20년 가까운 시간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다.황포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포동,서쪽은 포서지구로 나뉘는데 신개발지 포동(푸동)지역은 빌딩숲을 이룬다. 우리가 일정에 넣은 관광코스는 우리나라 임시정부청사 를 방문하고 이어 상해역사박물관을 찾기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청사 상해의 임시정부청사는 당시 프랑스의 조계지 안에 있었는데 이곳은 프랑스의 사법과 행정, 경찰력이 지배했기 때문에 일본이 마음대로 독립투사들을 체포,감금할 수가 없었다. 현존하는 청사는 마당로에 있는 3층 벽돌건물로 1992년부터 새롭게 단장되었다. 1층에서는 화면으로 독립운동과 현 건물을 상영하고 있다. 2층부터는 회의실과 집무실등과 각종 자료를 진열하여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근지역은 몇년전부터 신개발지역이 되어 고층건물이 즐비하 였다. 청사지역도 철거계획이 있었으나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골목안 의 다른 건물도 역사적인 유물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상해박물관 크다란 원형건물이 시선을 끈다. 상해역사박물관이다. 상해박물관은 상해의 중심지인 인민광 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건축양식을 따라 위는 둥근 원형건물이고 아 래는 사각건물이다. 12,000평방미터의 진열면적을 갖고 1층은 중국고대 청동관과 조소관이 있고 2층에는 고대 도자기관이 위치한다. 3층에는 서예관,회화관 새인(옥쇄,도장)관이 있다. 4층에는 중국고대 옥기관(玉器館)과 역대 화폐관,명청대 가구관,소수민족공예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이 적어 충분히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여러차례 상해를 방문했지만 박물관은 처음이라 관심이 많았다. 요즘 서예를 배우고 있어서 필요한 자료도 얻어왔다.
상해박물관을 나와 점심식당으로 갔다. 마지막 식사는 한국 음식점인 잉비곰비(迎彼恭彼)에서 가졌다. 모처럼 된장찌개 김치 상추에 불고기 등 한국음식을 먹으니 입이 개운하였다. 식사후 일행은 짝퉁시장으로 향했다. 우리나라도 한때 전세계의 명품을 가짜로 만들어 파는 시장이 유행했지만 요즘 중국은 가히 짝퉁의 전성기라고 할만하단다. 도대체 얼마나 유명한 시장인지 궁해해졌다. 그런데 막상 4층건물에 도착하여 상가를 돌아보니 마치 규모가 작은 동 대문 시장건물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나중에 들으니 관심을 갖고 깊이 물으면 안으로 모시는데 안쪽문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는 없던 명품들이 나온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좀처럼 그냥 빠져나오기가 힘든다고 하니 정말인지--
소주 춘신호텔에서 마지막 잠을자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간판 임시정부청사 출입문 상해박물관
민속관과 가구관
서예관
국쇄,도장관
부처와 나한상
임시정부청사 인근의 신개발 건축물/중국오성기가 펄럭이는 시청건물가 상해역사박물관 앞에서 코리아타운 거리 짝퉁시장 건물
상해푸동공항
공항으로 가는 길에 농산물을 파는 가게를 들렀다. 참깨를 사려는 일행이 많았다. 참깨를 사다가 한국에서 참기름을 짜면 속지도 않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잘 못 사면 내용이 안좋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어느핸가 흙먼지가 많은 채로 포장된 것을 잘 못 사서 고생한 경험도 있다. 3박4일의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들렀다. 항상 그렇지만 늘 바쁜 스케쥴 이 있을성 싶다. 빨리빨리 문화의 잔재다. 아무래도 지역상 가까운 중국여행은 자주 하게 되는 데 그래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막상 현지에 오면 알아듣지 못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으 니 헛공부가 아닌가? 그래도 길가 간판의 간자체는 전보다 많이 알게 된 점이 나아졌다고나 할까? 논어반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 네명이 동행하여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여행사와 가이드 모두 수고 많았고 노선생께도 감사를 드린다.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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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국 관광지는 하루가 다르게 단장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