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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우 목사 010 - 8722 - 9185
야고보서 2장 14절로 20절 말씀
행함이 있는 믿음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모두 네 명이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있고요, 주의 형제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라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중에 유다서라고 유다서 1장 밖에 없는 아주 짧은 서신서입니다 마는 이 유다서를 쓴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아버지도 이름이 야고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고 있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일컬어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부르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야고보서를 쓴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는 처음부터 좀 복잡하죠? 그런데 복잡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것이다라는 것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의 이름이 쭉 나옵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 밖에 여동생들도 줄줄이 있었다고 그럽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은 다들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식사도 안하시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만 미쳐있으셨거든요.
사실은 식사를 안 하신 것이 아니고 식사를 못하신 거죠.
마가복음 3장 20절 말씀에 보면,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다고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밥도 안 먹고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니시면서 복음만 전하시는 그 열정을 사람들은 미쳐서 그렇다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떼, 밖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찾아온 거예요.
예수님에게 제발 집으로 가자고 그러려고 온 거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저기 밖에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좀 보자고 왔는데요?”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앉아있는 제자들을 가르키시면서 “여기에 있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봐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들이요, 내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이 모두가 다 예수님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한 배에서 태어났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자매라고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여동생들도 다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동생들 중에서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까지 되었는데요, 그 야고보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읽고 있는 이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예수 안에서는 /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 무식해도 유식해질 수 있습니다.”(할렐루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좀 보세요!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고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야고보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있으면 사람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에서 요절이 되는 부분을 같이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요절은 14절과 17절 말씀인데요, 제가 14절을 봉독해 드리면 여러분들은 17절 말씀을 크게 읽으시면 됩니다.
제가 먼저 14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 다같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행함’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거예요.
맞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씀을 하셨거든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소위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어요.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달라요.
너희가 ‘믿음, 믿음’ 그러는데, 그 믿음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말예요.
너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를 쳐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봉독해 드렸잖아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우리 주위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 북한의 어린이들이나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또 전쟁이나 지진 같은 재난으로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 중에서 먹지 못해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30초에 한 명씩이라고 그러던가요?
수많은 어린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서 죽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 앉아서 ‘에구, 그거 정말 안됐네! 저런 저런 그거 정말 딱한 일이네! 저렇게 굶어죽어서 쓰나? 뭣 좀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믿음은 좋습니다. 신앙생활을 너무나 잘 해요. 주일도 잘지키고 십일조생활도 잘 하고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은 머리에서만 머물러 있고, 손과 발은 꼼짝도 안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기아대책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고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도 매달 3만원씩 후원을 해서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식량을 보내주는 일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믿음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사(動詞)입니다.
지금도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께서는 많이 복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특정 상품이기 때문에 이름을 거론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마는 지금은 워낙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다들 아실 거예요.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삼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삼각산은 아니고 다른 각산인데, 아주 고운 분말로 만들어진 약인데요, 기침이나 가래와 같은 기관지 계통의 질병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애용하시는 약품입니다.
그 약을 선전하는 문구가 뭐예요? 이 말 저 말 다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소리 없이 일하는 것, 소리 없이 작용하는 것, 그것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광고 글귀를 만드는 사람들을 ‘카피 라이터(copywriter)’라고 하는데요, 말 한 마디가 정말 대단하잖아요?
말 한마디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삼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도 2천년 후에만 태어났으면 대단한 카피라이터가 되었을 거 같아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7절 말씀은 아주 유명한 요절이거든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약간의 패러디를 해 본건데요,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 말씀은 야고보의 머리 속에서 나온 말씀은 아닌 것 같고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신 말씀인데요,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인데요,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저를 따라해 보세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다만 하늘에 계신 /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 들어가리라!”(아멘!)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미혹되기 쉽습니다.
신천지,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 안산홍 증인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교회, 통일교, JMS… 등 이단 사이비 종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이단인지 삼단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열매가 열릴 수가 없고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아무리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래요.
다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이 사람 저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주님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을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꼼짝도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호통을 치실 거랍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몰라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대로 실천하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집을 든든한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부딪힐지라도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 그래요? 이 집은 주추를 반석위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와서 그 집을 강타하면 그 집은 한 순간에 폭싹 주저앉고, 바람에 날아가고, 창수에 떠내려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흔적도 못 찾아요.
하나님께서 싹 쓸어버리실 때에는 마른 지푸라기처럼 다 태워버리실 거라고 나훔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나1:10)
그러나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은 확실한 믿음이어서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해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삶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는 겁니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예요.
행함이 없는 믿음, 열매 없는 신앙,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믿어도 손과 발이 움직여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9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가복음 3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서 부르짖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살고 있던 귀신들린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옷도 입지도 않고 집에서 살지도 않고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살면서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 땅으로 오셨을 때에 귀신 들린 그 친구가 예수님을 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오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귀신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하시니까, 그 귀신이 대답하는 말이 “예,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라는 거예요.
그 사람 속에 귀신이 한두 마리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떼거지로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
마침 그곳에 돼지들이 산 위 언덕배기에서 쩌덕쩌덕 뭘 먹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에게 명려하시기를 “이 더러운 귀신아, 그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로 들어가라!”라고 하시니까 그 수많은 귀신들이 다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놀라서 산비탈로 내리달려서 갈릴리 호수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그 귀신들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뭐였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귀신들이 귀신같이 예수님을 알아보잖아요?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점치는 귀신이 들어간 여자 아이가 밤낮으로 사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그러는 거예요.
“어허, 물렀거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어허 물렀거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바울 일행이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만날 그렇게 떠드는 거예요.
그날도 바울 일행을 졸졸졸 따라오면서 또 그러는 거예요.
“어허, 물렀거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이 하도 성갓시고 귀찮아서 뒤에 쫓아오는 그 여자 아이를 보고서 명령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사도 바울이 명령하자마자 그 즉시로 귀신이 떠나가고 점을 치던 그 여자아이는 정신이 멀쩡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점을 못 치게 되었는데, 그 여자 아이 속에 들어있던 귀신도 바울일행을 보고서 금방 알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다. 너희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알면 뭐해요? 알았으면 믿어야죠. 그리고 정말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있으나 마나라는 것입니다.
참회 없는 지식이나, 회개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는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수레바퀴가 하나면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겠죠?
‘믿음과 행함’은 수레바퀴처럼 두 개가 온전하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장 27절과 28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주겠노라 하지 말며…”
여러분,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힘도 있습니다. 마음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난 받는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돕지 않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주장하는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득의’(以行得義)와 바울 사도가 주장하는 믿음으로써만 구원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는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무지한 이방인들에게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고, 야고보 선생은 행함은 없이 단지 지식적으로만 믿고 거기에 만족해 있는 유대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행함이 없는 믿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온전하고 튼튼한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뿌리가 든든하게 박혀 있어야 하고요, 그 다음에는 행함(선행)이라고 하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잘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금이 녹지 않고 맛을 낼 수가 있을까요?
한 자루의 양초가 자기 몸을 태우지 않고 빛을 낼 수가 있겠어요?
“내가 세상의 소금이지, 그래 맞아 난 세상의 소금이야!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데, 그렇지 나는 세상의 빛이지!”
그렇게 머리로 생각만 하고, 몸은 꼼짝도 안하고 있으면 그렇게 해서 세상의 소금이 되겠어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먼저 실천해야 세상의 빛도 되고 세상의 소금도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