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기준을 하나의 잣대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잣대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의 가르침, 그분의 삶 일거수일투족이 삶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단순히 그분을 신뢰한다는 입술의 고백을 넘어 그분의 숨결, 말투, 몸짓, 생각을 나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재현하는 일이 신앙한다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를 따른다는 말이다. 그런 우리를 우린 스스로를 제자라 부른다. 제자는 스승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담아내어 그 고결하고 치열한 정신을 이어가야 비로소 제자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라는 큰 정신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제자의 길을 걸으며 써 내려온 사도행전의 역사는 2천년이 흘렀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모든 스승이 갖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소망일진데,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정신은 스스로 제자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더 깊어지고 무르익었는가?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제시하며 2천년간 이어온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2천년 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파하며 사랑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초기 제자들은 예수의 삶을 재현하며 세상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 인구(79억) 중 기독교 인구수(26억. 전체 33% -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023년 1월호)가 제일 많음에도 예수의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 물론 기독교가 행해온 선한 영향력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였고, 세상의 온갖 갈등과 분열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예수께서 지금의 교회를 보시며 ‘이게 아닌데...’ 하고 한탄하고 계시지 않을까?
앙꼬 – 사실 앙꼬는 ‘餡子(あんこ)’에서 온 일본말이다. 우리말 ‘팥소’로 바꾸어 쓰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서 관용구처럼 통용되고 있어 여기에서는 그대로 사용한다 - 없는 찐빵. 예수를 잃어버린 기독교. 이것이 지금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어왔던 예수를 믿어온 것은 아닐까? 마치 출애굽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다’라고 하며 예배했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가 포장해온 예수는 세상에서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던 분을 우린 박제해 놓고 눈물 흘리며 우러러 보고 있는 것이다. 아! 이 우매함이여!
<욕쟁이 예수>.. 욕쟁이 할머니는 많이 들어봤어도 욕쟁이 예수는 어딘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책 내용을 읽어보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 불온하게 여겨 매우 불쾌해할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온화하고 사랑 많고 인자한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어쩌면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예수, 우리의 기대와 소망으로 만들어낸 예수가 아닐까? 박총 목사는 우리의 이런 우매함과 편협된 신앙을 일깨우며 2천년 전 팔레스틴 땅을 누비며 땀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살 비비며 살았던 꾸며지지 않은 예수를 마주하게 한다. 이런 예수를 정직하게 마주할 때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정직해진다. 날 것이 본질에 더 가깝다. 더해지고 부풀려진 것은 가식에 불과하다. 예수는 우리에게 안락하고 평온한 길을 제시하신 적이 없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언제나 자기희생이 따르는 길, 불편하기 짝이 없고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길을 가리키셨다. 내가 죽어야 네가 사는 길, 거기에 참사랑과 평화가 싹튼다는 것을 죽기까지 보여주셨다. 그러한 과정은 때론 매우 거칠고 우악스럽기까지 하나 그런 길 마다하지 않고 본질을 붙잡으려 애써온 것이 바로 예수의 삶이었다.
박총 목사가 전하는 예수의 22가지 모습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며 무어라 답할 수 없었던 답답함을 시원히 뚫어준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교양과 상식 너머, 길들여 지지 않은 예수의 맨얼굴’이라 소개한다. 예수의 맨얼굴이라.. 난 그 얼굴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거칠지만 삶에 치열하게 다가섰던 예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예수, 불의한 것들을 마주할 때면 불같이 화를 내며, 욕도 섞어가며 거칠게 저항했던 예수의 민낯이 그립다. 고양된 예수로는 더 이상 질펀한 이 땅의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대학원 시절 ‘역사의 예수’에 탐닉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책에 소개되는 22가지의 예수의 면면은 박총 목사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예수상이다. ‘욕쟁이 예수’, ‘양다리 예수’, ‘술꾼 예수’, ‘겁쟁이 예수’, ‘모노태스커 예수’, ‘블로거 예수, 이어폰 꽂은 예수’, ‘찍사 예수’, ‘순결남 예수’, ‘연인 예수’ , ‘철수 예수’, ‘창조영성가 예수’, ‘켈트 예수’, ‘파티보이 예수’, ‘원조복음집 예수’, ‘반골 예수’, ‘세속국가주의자 예수’, ‘스님과 함께 일하는 예수’, ‘투표하는 예수’, ‘동네 예수’, ‘웰빙 예수’, ‘유색인 예수’, ‘목수집 큰애 예수’.. 예수를 수식하는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단순히 감상적인 의미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서를 바탕으로 이 시대에 통용되는 가장 적절하게 붙인 수식어들이다. 어떤 표현들은 기존 그리스도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내용들이 다수 있지만, 성서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그러나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그래서 낯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그 모습들은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한 단면인 것이다.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 유난히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이 바로 <욕쟁이 예수>다. 예수의 맨얼굴을 마주할수록 복음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지고, 신앙의 품은 더욱 넓어지며, 우리가 품는 인생의 비전도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의 신앙이 삶과 괴리된 지 이미 오래. 교회와 세상의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는커녕 그리스도를 이용해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욕심이 더해지는 우리들의 민낯. 우리의 맨얼굴과 예수의 맨얼굴을 비교해보자. 많이 닮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인가? <욕쟁이 예수>는 예수의 맨얼굴을 보여주지만, 정작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고 만다.
신앙의 여정은 늘 낯섦과 마주하던 여정 아니었던가! 우리에게 길들여 지지 않은 예수, 그래서 오히려 더 본질에 가까운 예수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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