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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조만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이 사진이 조만식의 최후의 사진이다.
조만식 (曺晩植 1883~1950)
「조선의 간디」로 널리 알려진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음력으로 1882년 12월 24일) 평양 진향리에서 선비인 조경학의 1남 2녀 중 독자로 출생했다. 본적이 평남 강서군 반석면 일리인 부친 조경학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에 6세 되던 해부터 평양 관후리에 있던 한학자 장정봉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후에 그의 기독교 입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한정교 및 김동원이 그의 동창생들이었다. 15세 되던 해 상업에 진출하여 포목상을 경영하였고 얼마후에는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는데,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폭음으로 건강을 잃어 부모로부터 생활의 절제를 권유받았고 동료 한정교의 적극적인 권유로 22세 되던 해인 1904년에 술과 담배를 끊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사업을 정리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평양의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과 민족주의자 안창호 등의 활동과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 해 4월 일본에 유학하였고 도쿄에 있는 정칙영어학교에 입학, 영어와 수학을 배우는 한편 여기에서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평생 그의 사상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1910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고 이때 송진우, 김성수 등 동지를 만났다.
한편 정익로, 백남훈, 김정식 등과 1911년 도쿄 YMCA회관에서 정식 설립된 도쿄한인교회 설립에도 참여하여 초대 영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으며 이 교회가 장로교, 감리교 양교파 연합교회로 전통이 세워지도록 노력하였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즉시 이승훈의 청빙을 받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하였다.
이후 1914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한 것도 실은 이승훈과의 약속에 따라 3.1운동 직후 상해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평양 및 강서지역 만세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그는 훗날을 위해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계획대로 1919년 3월 4일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동지 도인권과 함께 평양을 빠져나가 상해로 가려던 중, 강동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도인권은 미리 몸을 피했다) 평양에 압송되었고,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 되었으며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가 교장 승인을 하지 않아 1년만인 1921년 4월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평양 YMCA 총무로 취임하여 1932년까지 봉직하면서 그의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1922년 산정현교회 3대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그해 오윤선 장로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이미 2년 전인 1920년 8월 평양에서 발족되었고 1922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물산장려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대표적인 운동으로 금주, 금연운동, 폐창운동을 포함한 절제운동을 수렴하였고 국산품 장려운동으로 구체적인 실천강령을 확립하여 그 결과 민족자본 육성이라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3.1운동 이후 강력하게 대두된 사회주의 계열의 교회에 대한 비판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독교 주도의 사회운동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말총모자와 편리화 및 개량 한복 등을 입으며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여 민족자본 축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이 모든 운동은 그가 총무로 있는 평양 YMCA회관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YMCA 내에 장,감 연합 저축조합을 조직하여 자본을 모아 평양 양말공장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손을 잡고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대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여 1922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운동을 벌였다. 비록 민립대학설립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운동 역시 3.1운 동 이후 침체된 민족정신을 일깨워 준 중요한 계기사 되었다.
1925년 4월 그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나 1년만에 다시 6.10만세사건으로 교장직에서 밀려났고 1927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후의 숭인상업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교장승인 거부로 1929년 9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숭인중학교 이사장이 되어 제자인 김항복을 교장으로 앉히고 실업교육을 통한 민족교육 실시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해 기독교와 공산주의진영이 모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도 일제의 방해로 4년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1930년 관서체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숭실중학교 재학시절부터 날파람 및 석전 등 체육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던 그는 체육을 통한 청소년 사기 진작을 위해 이 체육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11월 그는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내분에 휘말린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조병옥, 주요한, 방응모 등과 민족언론지 육성에 주력하여 1933년 7월 방응모를 사장에 앉히기까지 <조선일보> 발전을 위해 전심을 다하였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백선행기념관, 을지문덕장군묘수보회 등을 통해 민간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평양 고아원 및 양로원, 인정도서관 개관에도 중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6년에는 마산에 내려가 오산학교 제자인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로 청빙하였다.
1937년 정월 초하루 평양산정현교회의 제직원 일동사진.
1937년은 그의 모든 사회적 활동이 일제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조선물산장려회가 해체되었고 관서체육회 및 을지문덕장군묘수보회도 해산당하였다. 이듬해에는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었고 이에 항거한 주기철 목사는 수차에 걸친 검속으로 산정현교회가 수난을 입게 되었다.
이때 그는 오윤선, 방계성, 유계준 등 동료 장로들과 일심단결하여 교회를 이끌고 나갔으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가 순시차 평양에 들러 그를 만나고자 했을 때 그는 강서로 피했으며 끝까지 한복을 고수하였다.
1935년 도산 안창호가 출옥한 후 찍은 사진. (왼쪽으로부터) 몽양 여운형, 안창호, 고당 조만식.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어 갖은 악형을 당한 안창호가 별세하자 일제의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장례위원장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장례를 집행하였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이후 학도병 지원유세를 강요하는 일제측의 회유에 끝까지 거부하였고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서 순교하고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울분을 삼키며 1945년 봄 식구를 이끌고 강서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평양으로 나온 그는 8월 17일 동지들과 함께 평남건국준비위원회(세칭 ‘건준’)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어 민족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현준혁의 조선공산당과 평남위원회의 합동을 강요하였고 이에 8월 26일 평남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어 조만식이 그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이라는 서로 합할 수 없는 두 세력의 표면적 결합에 지나지 않아 모든 일에 행동 통일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즈음 소련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나타나 조만식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짐짓 공산당과 민족진영의 중도파인 척하며 그에게 민족정당 구성을 제의하였다.
이에 그해 11월 3일 그를 비롯하여 이윤영, 한근조, 김병연, 김익진, 우제순, 조명식, 이종현 등 민족주의자들이 주동된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김일성의 추천으로 최용건이 부위원장으로 참여한 것이 결국 조선민주당의 불운을 예견한 것이었고 이것일 김일성의 술책이었다.
1945년 8월 평양에서 있은 일본군 항복식에 참석한 고당(왼쪽). 가운데가 일본군 사령관 쇼지 후루카와 중장,
그해(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한국의 신탕통치를 가결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진영과 찬성하는 공산주의진영이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민주당의 결말을 가져왔다.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와 김일성은 수차에 걸쳐 조만식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로써 1946년 1월 5일 소집된 소위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조만식을 축출하고 그는 「친일파」, 「반민족주의자」로 날조 매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이윤영 등 민족진영은 월남하여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함으로 평양에서의 민족진영 운동은 이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 군정집회에 소련장성들과 함께 단상에 서 있는 조만식. 조만식 왼쪽에 있는 세 장성이 (왼쪽부터) 치스챠코프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레베데프 소장이다.
1월 5일 회담 이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조만식은 그를 구출하려는 청년들이나 그를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라며 월남을 거부한 채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였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고려호텔에 머물면서 그를 돌보았던 차남 연창과 사위 강의홍이 6.25사변 전에 강제노동소로 끌려간 후 그는 질병으로 남평양의과대학병원에 옮겨졌고 다시 미림리에 있는 치안국에 이감된 것으로 전해질 뿐 어느 누구도 자세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고당의 학병권유 논설의 진위논란(친일연구자 겸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선생의 글)
조만식은 일제말기인 1943년 조선에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찾아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板垣正四郞)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기도 했다. 그런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자에는 고당 명의로 ‘학도에게 고(告)한다’는 제목의 학병권유 글이 실려 있다. 내용 가운데 일부를 옮겨보면,
“... 우리 반도에도 광영의 징병제가 실시될 것이니 어느 누구보다도 국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전문(專門) 이상 학교에서 고등학문을 배우고 있는 청년학도들로서 어찌 광영을 앞두고 그대로 안한(安閑)히 있을 것인가. 이런 때 분연히 일어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굳은 결의를 가지고 우리 구적(仇敵) 세계 인류의 원적(怨敵)인 미영(米英)을 껴멸하는 결전장으로 달리지 않으면 안된다... 반도 청년학도 제군. 그대들은 어리석은 사나이일 것인가, 비겁한 남아일 것인가.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렇지 않음을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일초일각(一秒一刻)이 바쁘게 그대들이 반드시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 즉 영예의 군문으로 분진(奮進)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매일신보>에 기고자로 ‘조만식’이란 이름 세 글자가 뚜렷이 박혀 있는데,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1995년 5월 필자(김삼웅)는 친일파들이 쓴 학병권유 글들을 모아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를 펴낸 바 있다. 그로부터 4년여 뒤인 2001년 10월 필자는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관계자라고 소개하고는 필자가 엮어낸 책에 실린 고당 명의의 글은 조작된 것이니 정정기사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납득할만한 증거자료를 제시해 줄 것을 요청했더니 그 무렵 <대한언론인회보>에 실린 김진섭(金鎭燮, 당시 83세) 씨의 글을 제시했다. 김 씨는 일제 말기 <매일신보> 평양지사에 특파원으로 근무했는데 , 그에 따르면 문제의 고당 명의의 글은 당시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高永翰)이 날조해 게재한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대한언론인회보>의 ‘그때 그시절…녹취 한국언론사(史) 코너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하루는 고(高) 지사장이 고당 선생을 취재해오라고 지시를 해 고당 선생을 찾아갔더니 선생이 함구로 일관, 그냥 귀사해서 ‘안계시더라’고 허위보고를 했는데 며칠 뒤 고 지사장이 사진기자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취재했는데 사흘쯤 뒤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조작기사였다.… 해방 후 평양지사에 들렀다가 고 지사장의 자살소식을 그의 모친으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당시 그가 고당 선생의 인터뷰 기사 조작 건으로 많이 자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와 유사한 증언은 또 있다. 해방 당시 평양에서 고당의 측근으로 활약한 바 있는 월남작가 오영진(吳泳鎭) 씨도 지난 1952년에 출간한 <소(蘇) 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을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전(田) 모 씨가 매일신보 지국장을 지냈고 경방단의 주요 간부인 고영한과 같이 찾아와서는 고씨를 치안책임자로 적격이라고 추천하면서 그가 친일신문인으로 학도병 지원 때 조(曺) 선생의 소감(所感)을 자의적으로 날조하여 신문에 게재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내용은 비록 증언이긴 하나 당시 관계자들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신뢰할 만 하다고 판단해 필자는 반론성 기사(<대한매일> 2001.10.6.)를 쓴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