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함평 나르다예술단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민요.판소리 스크랩 판소리의 유파와 명창
대인판소리 추천 0 조회 46 13.01.05 21: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판소리의

       유파와 명창














                                      임해권(2003년 여름)

                           





 

 

 

 

 

 

 

 

 

 

 





               차          례


  Ⅰ. 序論

   

    1. 판소리의 의의

    2. 판소리의 개념


  Ⅱ. 판소리의 起源

    1. 시기와 지역 

    2. 판소리의 기원에 관한 연구


  Ⅲ. 판소리의 流波와 名唱


    1. 유파의 개념

   

    2. 판소리의 유파와 名唱

       가. 동편제의 계보

     나. 서편제의 계보

     다. 보성 소리의 계보

     라. 중고제의 계보

    3. 유파별 음악적 기법

 

  4. 명창의 시대적 흐름

     가. 前期 8名唱 時代

     나. 後期 8名唱 時代

     다. 5名唱 時代

     라. 現代



  Ⅳ. 結論



     참고문헌







 

 

 

 

 

 

 

 

 

 


   Ⅰ. 序論

   

  1. 판소리의 意義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 문화를 가지고 있고, 또한 지금도 전승하고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판소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강 알고 있으면서도 내용을 이해하며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판소리는 가깝고도 먼 존재로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판소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 이상이다. 예술이라면 잘 빚어진 형태미와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연상하게 되지만 판소리는 그저 투박하게 생겼으면서도 그 안에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판소리에는 보통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담겨 있고, 역사가 숨쉬고 있으며, 당대 예술과의 교섭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판소리는 전통 사회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지를 제공해주는 문화 첨병이라고 할 수 있다.1) 

  서민 예술의 정화2)이자 음악, 문학, 연극의 여러 특질이 결합되어 짜여진 종합예술3)이며 또한 우리의 대표적인 전승예술의 하나인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아직도 경상도와 충청도 일원에 퇴적되어 남아 있으나 한국의 독자적인 藝能으로 발전되었고,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충분히 지닌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제 판소리는 우리가 내세워 자랑할 만한 ‘민족 예술’로 피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4) 


  2. 판소리의 槪念

  판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판소리’란 말의 뜻을 살펴보자. ‘판소리’란 말은 ‘판’과 ‘소리’가 합해져 된 말이다. ‘판’이란, 놀이판, 화투판, 춤판, 잔치판 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① 다수의 행위자가 ②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③ 필요한 과정을 수행하여 ④ 어우러지는 자리 또는 행위5)가 운영되는 곳이라는 의미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특수한 행위가 운영되는 곳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소리’라는 의미는 ‘서편제’라는 영화에서도 곧잘 등장하듯 전통 음악에 있어서는 곧잘 ‘노래’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즉, 우리 민속악의 ‘성악’을 가리키는 말로 판소리란 ‘이야기를 노래로 하는 우리의 전통적 공연 양식’이라 의미할 수 있겠다.

  김대행은 판소리를 ‘언어문화로서의 판소리’, ‘음악문화로서의 판소리’, ‘공연문화로서의 판소리‘, ‘민족문화로서의 판소리’로 설명6)하였거니와, 우리 예술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 판소리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연극이나 오페라, 영화 혹은 탈춤이 행동과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 예술이라 한다면, 판소리는 음악과 문학을 근간으로 하는 종합 예술이다.  또한 지난날의 전통 음악의 대표적인 제례악이나 연례악이 제례나 의식의 절차라는 객체적인 요소에 따라 기계적으로 調曲이 변화되었지만, 판소리 음악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학의 내용이 바뀌는데 따라서 음악의 조곡이 변화되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예술적인 주체성이 훨씬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7) 판소리는 첫째로 음악적인 면에서 선행하는 모든 음악 유산을 골고루 도입 섭취하여 종합 정리하였다는 점과 둘째로 문학적인 사설에서도 선행하는 모든 문학 유산을 종합 정리하여 신흥 예술로서의 판소리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점, 나아가서는 무대 예술의 하나이기 때문에 연극적인 특징을 아울러 지닌 점으로 판소리는 음악, 문학, 연극의 여러 특질이 결합되어 짜여진 종합 예술이다. 그래서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는 데에는 30년이란 오랜 수련을 쌓아야 된다고 한다.8) 

  



   Ⅱ. 판소리의 起源



  1. 時期와 地域 

  대체로 판소리의 형성은 17세기에서 18세기 초의 시기로 잡는다.9) 이 시기에는 판소리와 무가의 친연성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비가비 광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판소리 광대들이 巫係이거나 무계와 관련이 많으며, 무가와 판소리의 선율이 육자백이 토리(시나위조)로 서로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도 이 점은 증명된다.10) 판소리의 형성과정이 무가와 굿에 관련이 있고, 사회적 기반 또한 농민이나 어민 등 평민층이었다. 판소리 광대가 충원되고 전국 방방곡곡을 무대로 삼게된 데는 조선 후기의 민중의 삶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두 차례의 전쟁 그리고 지주제의 확대로 농민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고 양반의 질적 타락과 횡포는 가족의 해체와 유랑민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들 중 더러는 자신들이 가진 예능, 기술, 곡예를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집단의 성격도 여러 종류일 터이나 특히 판소리와 관련된 집단은 창우 집단이며 이런 연희 집단은 결속력도 강했으며 연희를 세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물론 초기의 그 판소리는 미숙하고 단순했을 것이라 짐작됨은 당연한 것이리라. 판소리를 전승시켜온 것은 倡優이고, 창우는 전국에 두루 있었다. 그러나 巫歌의 선율이 육자배기토리로 되어있고, 무가의 반주로 시나위가 연주되는 지역에서만 판소리 명창은 배출될 수 있었다.12) 

  판소리의 始唱者에 대하여는 結城 崔先達 또는 하은담(河殷潭) - 또는 하한담(河漢潭)이라고도 한다 - 이었다는 전설이 구전될 뿐, 그 생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생존 연대가 비교적 정확히 알려진 사람으로는 권삼득(權三得, 1771 - 1841)이 가장 오래 된 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의 ‘더늠(長技)’이 오늘날에 전해 오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생존했던 시기에 판소리 예술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생존했던 18세기를 판소리 예술의 완성기로 보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를 판소리 예술의 완성기로 잡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만화본 춘향가(晩華本 春香歌)가 판소리 예술로서는 거의 완성된 단계의 것을 채록하고 있기 때문이다.13)

  따라서 판소리의 기원은 호남에서 그 형성 시기는 오늘날 전하는 판소리 작품 중에 가장 오랜 된 것이 1754년에 晩華 柳振漢이 지었다는 만화본 춘향가가 있는14)것으로 보아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15)이라고 볼 수 있겠다.



  2. 판소리의 起源에 관한 硏究

  판소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기원의 연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판소리와 설화가 모두 한국의 구비문학이라는 공통점에서, 그리고 이를 향유한 계층이 대체로 한문으로 문학을 향유하던 사대부 문화에서 소외되었던 대중이었다는 점에서 그 근원을 찾은 설화기원론16)과, 장주근이 발의하고 서대석이 후속작업을 지속한 서사무가 기원론17), 무속인 중에서 무속 제전에서 서사 무가의 가창 형식을 본딴 소리꾼들의 소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 판소리 창자 기원론, 世襲巫 이외의 직업적인 소리꾼들의 소리에서 그 기원을 연구한 창우 집단 기원론18)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신라의 花郞道의 修行上의 하나의 노래였다고 하는 설19),  廣大笑謔之戱의 外延的 형태가 삽입가요와 소설적 서술형태의 영향을 받고 기존 설화를 수용하여 서사적 이야기를 형성했고, 이 이야기가 배뱅이굿의 一人唱의 형태와 같이 판소리의 唱이 되었다는 설20), 祭儀에서 발생하여 오락으로 轉用되어 농어촌의 건설 등을 주제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설21), 숙종대에 時調나 歌辭문학이 창작보다는 歌唱을 위주로 하여 전문적인 가객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설22), 무당의 살풀이가 먼 훗날에 판소리로 변증된 것이다는 설23), 등이 있다.



   Ⅲ. 판소리의 流波와 名唱


  1. 유파의 槪念

  流波란, 지방적인 토후성(土侯性), 사호성(士豪性), 또는 산조 예술의 강태홍류(姜太弘流)?김창조류(金昌祚流) 등, 그리고 판소리의 東便制, 西便制 따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선각자의 藝風을 이어받는 문하생들과, 그 예술 계보의 가문 일파를 ‘유파’라고 한다. 판소리에 있어서의 유파는 唱制를 말하는데, 개성이 두드러진 가락의 흐름과 표현력, 그리고 창법의 대가닥(法統)과 전해져 내려오는 멋진 가락(더늠) 등, 演唱의 종합적인 특성을 일컫는다.24)

  판소리를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유파별로 나누어 서술한 자료로는 정노식이 지은 『조선 창극사(朝鮮 唱劇史)』가 처음이라 생각된다. 정노식은 20세기 전반기까지의 판소리 현장을 조사하여 보고한 이 책의 ‘대가닥조’에서, 당시에 명백히 존재하던 판소리의 유파와 그들 유파의 기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대목을 따져 읽으면 당대에 판소리 창자 및 일반이 가지고 있던 판소리 유파와 기법에 대한 인식의 체계를 알아볼 수 있다. 다음의 인용은 정노식의 주장이다.


  대가닥에는 東便제(調) 西便제 중고제 호궐제가 있으나 대체로 동서로 난우고, 중고 호궐은 極少하다. 東便은 羽調를 主張하여 雄建淸談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고 發聲初가 썩 진중하고 句節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마치로나 내려치는 듯이 하고, 西便제는 界面을 주장하여 軟美浮華하게 하고 句節 끝마침이 좀 질르를 끌어서 꽁지가 붙어단인다. 東은 淡淡然 菜蔬的이라 하면 西는 津津然 肉味的이다. 동은 千峰月出格이라 하면 西는 萬樹花爛格이다. 그 色彩와 製作을 槪略 以上으로 표시하면 근사할 듯하다. 중고제는 非東非西의 그 中間인데 比較的 東에 近한 것이다. 그러면 東西의 由來가 如何히 分流된 것이냐 하면 宋興祿의 法制를 標準하여 雲峰 求禮 淳昌 興德 等地 이쪽을 東便이라 하고 저쪽을 서편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地域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法制만을 標準하여 分派되었다. 중고제 호걸제는 廉季達 金成玉의 法制를 많이 繼承하여 京畿 忠淸間에서 大部分 流行한다.25)  

  

  인용한 글에 의하면 판소리의 유파는 동편제?서편제?중고제?호걸제의 네 가지가 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이 기록은 판소리 전성기에 있었을 다양한 유파와 다채로운 기법을 쓴 것이 아니라 판소리가 이미 소멸의 시기에 들어서 쇠잔한 양상을 반영하는 증언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판소리 유파와 기법에 대하여 해명한 작업은 대체로 정노식이 기술한 이 대목의 확대 부연이라 생각되어, 그간의 판소리학의 성과를 정리하기로 한다.



  2. 판소리의 流波와 名唱

  판소리가 원시 형태의 판놀음에서 벗어나 독립된 예술 형태로 발달한 것은 조선조 肅宗(1675 - 1720) 때의 일이다. 당시의 명창인 하은담(河殷潭), 최선달(崔先達), 우춘대(禹春大) 등이 판소리의 형태를 갖춘 명창들로 꼽힌다. 이 무렵에 판소리 열두 마당의 골격이 만들어졌고, 正?純祖(1777 - 1834)대에 이르러서는 우리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이른바 前期 8명창이 배출되었다.26)

  정노식은 판소리의 유파를 나타내는 말로 ‘제’를 사용하고 있다. 유파는 지역성과 명창의 계통 및 소리 자체의 미학적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노식은 판소리의 유파가 동편제?서편제?호걸제의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편제나 서편제는 지금까지 대립항으로 존재하지만 중고제와 호걸제의 개념은 명료하지 않다. 중고제는 ‘비동비서’라 하여 소리 스타일이 중간적임을 밝히고 있으며, 호걸제는 중고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기?충청 지역의 소리 스타일로 생각된다.

  판소리는 시대를 거쳐 전승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노식은 동편제가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 이쪽’을 기반으로, 서편제는 ‘광주?나주?보성 등지 저쪽’을 터전으로, 중고제와 호걸제는 그 맥락으로 보아 ‘충청?경기’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잇다고 말하여, 판소리 유파가 지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성립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판소리의 유파를 나누는 우선적인 기준은 전승 지역이다. 특출한 명창이 사는 지역이 자연스레 판소리 전승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명성과 교육적 능력을 가진 명창이 아슨 집에 학생들이 와 함께 기식하면서 오랜 시간 학습하였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 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 스타일도 거의 같게 되었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소리를 끌어가거나, 애원 처절하며 기교를 많이 부리는 일을 위주로 소리하는 것은 소리를 독자적으로 수련하여 이뤄낸 특정한 명창의 능력이지만, 이것이 일가를 이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동일한 지역에서 불리는 동일한 스타일의 판소리가 된다.

  그러나 명창이 사정에 따라 이사를 하여 사는 지역이 바뀌기도 하고, 이사한 명창을 따라서 필요에 의하여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유파의 구분은 자연스레 이전의 지역적 기준보다는 명창 자신의 기준에 의하여 유파를 나누게 되었다. 정노식이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파되었다’라는 지적은 바로 동편제나 서편제가 전승지역보다 ‘소리의 법제’에 의한 구분이라는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문을 중심으로 유파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을 법하다. 「송판적벽가」라든지 「박유전제 심청가」「김세종제 춘향가」 등은 가문으로 계승된 소리의 계보이다. 이로 보자면 師承 관계야 말로 유파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 명백하다.


  가. 東便制의 系譜

  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운봉?구례?순찬?흥덕 등지에서 발원하였으며 송흥록이 중시조라 하였다. 동편제에는 송흥록제와 김세종제?정춘풍제 등이 있다. 송흥록제는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남원?구례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해간 유파이다. 송흥록은 ‘모든 歌調를 집대성’하여 판소리를 완성했으므로 ‘歌王’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  송광록 →송우룡┌송만갑 ┬ 김정문  --   박녹주--박송희, 한농선, 신영희

         ?                  │       │  김광순      강도근 

         ?                  │       │  장판개→배설향

         ?                  │       │  박봉래→박봉술→송순섭

         ?                  │       └─김소희

송흥록→ ?                  │      

         ?                  ├유성준┌─정광수→박초월

         ?                  │      │  임방울

         ?                  │      └─김연수

         ?                  │

         ?                  └전도성  -- 김원술

         ?

         ??  박만순--박찬업, 오끗준, 양학천, 유공열, 장판개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다른 가닥으로 분류되는데, 주로 고창의 신재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 집단에서 기왕의 판소리 사설과 음악의 내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정한 것이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기왕의 <춘향가>보다 양반적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우아하고 섬세해진 변화된 모습이 특징이다. 이들 소리의 전승도는 다음과 같다.


       


동편제의 또 다른 계통인 정춘풍의 소리는 다음과 같이 전승된다.


      



나. 西便制의 系譜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나주?보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유파의 소리를 지칭하며,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박유전은 헌종 무렵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한양에서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등 크게 활약하다가 만년에 보성군 강산리로 옮겨 살았다. 판소리에 장식과 기교를 덧붙여 서편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박유전은 정노식의 표현대로 “목청이 절등(絶等)하게 고와서 당시 비주가 없었”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가졌다. 박유전이 애초에 가졌던 소리는 서편제로, 정노식은 “서편조(西便調)의 분류가 박씨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유전은 자신의 본바탕을 서편제 소리로 채운 후에, 한양에서 활도하면서 서편제와는 취향이 대조되는 다른 유파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강산제(江山制)이다. 현재의 <심청가>는 애초의 출발이 박유전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서편제’와 ‘강산제’사이에 공통점이 많다.

      


박유전의 <심청가>는 이날치에게 전승되었다. 이날치의 소리는 김채만에게, 김채만의 소리는 다시 박동실에게 전승되어 서편제 <심청가>의 본류가 되었다.

위의 계통도 가운데 정창업은 박유전 계통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서편제는 다른 계통으로 정창업 계열을 상정할 수 있다. 정창업은 철종?고종 전기까지 활동한 명창으로 전남 함평 출신이다. 정창업은 <흥보가>가 특장이었으며, 이 소리가 김창환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다.

박유전이 정재근에게 전수시킨 <심청가>를 특히 강산제라고 칭한다. 그리고 정재근이 정응민에게 전수시킨 소리의 유파를 ‘보성 소리’라고 지칭한다. 보성 소리는 서편제 가운데서도 특히 19세기 말에 보성을 거점으로 형성된 판소리 유파인 셈이다. 정응민은 당시의 풍조가 슬픈 성음, 계면조만 좋아하고 노랑목에 경도되는 풍조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개탄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고제 소리를 지켜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원칙 대문에 설사 청중들이 계면성음의 노랑목을 원한다 하여도 거기에 영합하지는 않았다. 보성 소리가 추구하는 미의식은 양반층 청중의 취향을 반영하여 형성된 것이다.


다. 보성 소리의 계보

  ‘보성소리’는 19세기 말에 보성을 거점으로 형성된 판소리 유파를 지칭한다. 보성은 민속음악의 여러 명인 명창들이 많이 태어나 고장이며, 수많은 예인들이 학습한 예향이다. 벌교를 지나 보성에 와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의 바다에 닿을 듯한 회천리가 있다. 이곳에 우리 판소리의 한 도도한 흐름인 보성소리의 고향이다. 영천리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두 개 정도 넘어 가면 바로 만년의 박유전이 살았던 강산리가 되며, 이곳에는 강산 박유전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보성 소리 안에는 「김세종제 춘향가」와「강산제 심청가」가 포함된다. 보성 소리에 「강산제 심청가」는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강산제’가 바로 보성 소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성 소리는 다음의 표처럼 구성되어 있다.


      


이 표로 본다면 보성 소리는 <춘향가>의 경우 김세종제를, <심청가><적벽가><수궁가>의 경우는 ‘강산(박유전)제’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자산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성에서 전승되어온 소리 일반을 지칭할 때는 ‘보성 소리’라는 명칭이 적절하며, 그 소리의 원래 계통을 밝혀 말할 때는「김세종제 춘향가」,「강산(박유전)제 심청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최근에 와서는 강산제라는 명칭보다 보성소리라는 명칭이 더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는 보성의 정씨 문중에 전승되고 있는 소리는 박유전의 소리와는 차별성이 있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그 소리는 박유전의 소리에 김세종제 <춘향가>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소리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들은 그냥 산술적으로 합쳐지기만 한 게 아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전혀 새로운 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요즈음에 와서 보성소리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보성소리의 우수성 때문인 것이다. 이는 똑같이 박유전의 소리를 계승했으면서도 이날치 계열의 소리와 보성소리가 달라지게 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보성소리는 전통소리의 판소리 가운데는 가장 완강한, 양반화된 판소리의 미의식으로 짜여져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에서도, 예컨대 춘향과 이도령이 춘향모의 허락을 받고 화촉을 밝힌다거나, “체면있는 춘향이가 서방이별 헌다허고 오리저 삼로 네거리 길에 퍼버리고 앉어 울 리가 있겠느냐. 꼼짝달싹도 못허고 담 안에서 이별을 허는디”라고 개작하여 오리정 이별대목을 부르지 않는다.

  <강산제 심청가>에서도 이같은 양반 취향이 잘 드러난다. 심청이 ‘侍婢 따라’ 장승상 부인 집으로 가는 진양조의 유장한 가곡성 우조와, 세마치 평계면으로 불리는 ‘시비따라’가 그것이다. 원래 강산제 소리는 세마치 장단을 하는 것이 특징이거니와 두 번째 시비따라 가는 대목은 계면을 사용하여 죽으러 가는 심청이의 절망적인 심사를 나타내면서도 세마치 장단으 사용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구할 수 있기에 심청이의 발걸음이 다소나마 빨라졌음을 나타낸다. 이 더늠은 박유전의 강산제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대목이다. 심청의 신분상승을 위하여 우선 그녀가 상대하는 계층을 높일 필요가 있어서 장승상 부인의 삽화가 적극적으로 작품 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심봉사나 곽씨부인의 신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소리하는 창자의 의식의 소산일 뿐 아니라, 당대의 판소리의 경제적 기반인 양반층의 욕구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 보성소리에서는 <흥보가>를 부르지 않는다. 餘他의 판소리가 탈락하였고, 앞으로도 양반적인 미의식에 의하면 탈락할 우선 순위에 있는 노래가 <흥보가>이다. 양반들의 구미에 가장 맞는 소리는 <적벽가>, <수궁가> 등이었으며, 이들도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하거나 보완하여 양반의 취향에 맞게 수정되었다. 이 소리를 고집스럽게 지켜온 것이 오늘이 보성소리가 되었다. 일제시대의 판소리는 우여곡절을 거쳐 민중들의 취향에 부합시키고자 노력했는데, 보성소리는 고집스럽게 우아한 전통의 판소리를 지켜온 것이다.

  보성 소리를 대표하는 명창은 정권진이다. 그는 보성소리의 두 번째 계승자인 정응민의 1남 5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정응민은 이른바 보성 소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정재근의 조카이다. 정재근은 서편제 소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박유전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정권진은 박유전 - 정재근 - 정응민으로 이어진 보성소리 정통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것이다. 정권진은 소리에서  바르고 맑은 마음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리하여 정권진으로 대표되는 보성소리에는 비속한 언어나 행동, 천박한 장면은 거의 없다.


라. 중고제의 系譜

중고제는 헌종 시대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경기?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의 판소리 유파로서 지금은 그 계승이 끊어진 판소리 유파이다. 모흥갑이 경기도 진위 출신이고, 방만춘이 충남 해미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고제 명창으로 추정된다. 모흥갑은 평양 연광정에서 판소리를 할 때 덜미소리를 질러내어 십리 밖까지 들리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할 만큼 성량이 탁월했던 명창이다. 중고제는 염계달과 김성옥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아 전승되었다. 중고제의 음악적 특성은 ‘비동비서(非東非西)이지만 동편에 가까운’ 즉 동편제도 아니고 서편제도 아닌 그 중간이라고 하며, 그러나 비교적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 스타일을 보여준다. 중고제는 지역적 개념과 함께 ‘중고(中古)’라는 시대적 개념도 내포하고 있는 초기 판소리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고제(古制)소리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27) 중고제는 다양한 가계의 다양한 소리제로 전승되어 왔는데, 송흥록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제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중고제 명창의 음반을 면밀히 검토하여 명확히 성격을 구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김성옥은 진양조의 창시자로 유명한데, 서른 살 무렵에 죽었으며, 그의 소리는 아들인 김정근에게 전해졌다.


      




  3. 流波別 音樂的 技法

정노식이 말한 바 동?서편제가 지향하는 음악 기법의 특징과 미의식에 관하여는 앞에서 인용한 ‘대가닥조’의 기록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노식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중고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악조?발성?부침새?시김새 기법과 미학적 지향에서 각각 대조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정노식은 판소리의 악조에 대하여, 동편제가 “우조(羽調)를 주장하여 웅건청담(雄建淸談)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으며, 서편제는 “계면(界面)을 주장하여 연미부화(軟美浮華)하게” 한다고 쓰고 있다. 이 부분을 자칫 동편제는 우조로만 소리하고 서편제는 계면조로만 소리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동편제에서 우조로 부르는 대목은 동편제에서도 우조로 부르고, 서편제에서 계면조로 부르는 대목은 동편제에서도 계면조로 부르고 있어서, 어느 한 족에 우조가 많고 다른 쪽에 계면조가 많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다만 전체적 경향으로 보아 동편제 소리는 우조적 경향을 높이 사서 그 심정적 경향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서편 소리는 반대로 전판을 계면조의 느낌으로 이어가고자 한 인상을 준다.

정노식은 판소리 발성의 시작과 끝에 대하여, 동편제는 “발성초(發聲初)가 썩 진중하고 구절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마치로나 내려치는 듯이 하”며, 서편제는 “구절 끝마침이 좀 질르를 끌어서 꽁지가 붙어” 다닌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내드름에서 동편제는 소리 마디마디마다 엄성이라해서 무거운 발성으로 시작하는 데 비하여 서편제는 가벼운 발성으로 일관한다. 구절 끝마침에서 동편제는 소리의 끝을 들어올려 꼬리가 끊어지는 느낌을 강하게 주지만, 서편제는 소리의 꼬리가 길게 늘어져 지속되는 느낌을 주는데 이 같은 내용에 대한 설명이라 생각된다.

정노식은 판소리의 부침새?시김새에 대하여, 동편제는 “담담연 채소적(淡淡然 菜蔬的)”이라고 하였고 서편제는 “진진연 육미적(津津然 肉味的)”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동편제는 ‘대마디 대장단’ ‘잔가락 없는 장단’으로 운용하고, 서편제는 ‘잔가락이 많고 기교적’이어서 소리 한 꼭지가 몇 장단씩 끌고 나간다. 동편제는 속도가 다소 빠르며, 서편제 장단은 소리에 기교를 많이 부르므로 속도가 늘어져 있다. 부침새와 시김새에서도 동편제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긴 빨래 널 듯 쭉쭉 뻗어내지만, 서편제는 부침새를 다양하게 구사한다. 정노식은 판소리의 장단이나 부침새 기교에 대하여, 채소를 먹듯이 담담한 거싱 동편 소리라면, 고기 먹듯이 쫄깃쫄깃한 것이 서편제 소리라고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노식은 판소리의 미학적 지향에 대하여 동편제는 “천봉월출격(千峰月出格)”이라 하였으며 서편제는 “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라고 말했다. 우뚝 솟은 봉우리에 달이 시원하게 떠오르듯 소리하는 것이 동펴제라면 온갖 나무에 꽃이 화려하게 피듯 현란하게 소리하는 것이 서편제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판소리의 미의식과 연관이 있다.

동편제의 음악적 특징은 웅건청담(雄建淸談)하여, 웅장하고 씩씩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그대로 드러내어 소리하는 특징을 지녔다. 동편 소리는 아니리가 길게 발달하지도 않았고, 발림도 별로 없으므로 오직 목에서 내는 통성에만 의지하는 소리제이다. 동편제가 비기교적이고 건조한 연기로 일관된다는 것은 그만큼 옛스럽고 소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동편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이라는 말과 같이 장단에 소리를 맞춰서 붙여나간다. 물론 선율의 리듬이 특이할 때 북도 그 리듬에 따라가면서 치는 ‘따라 치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동편제는 원칙적으로 대마디 대장단에 충실하다.

서편제의 음악적 특징은 애원처절(哀怨悽絶)하고 연미부화(軟美浮華)한 것으로, 계면조를 주로 써서 슬프고 원망스런 느낌을 처절하게 잘 그려내고,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게 그려낸다. 엇붙임이나 잉애걸이 등 장단의 변화를 통해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기 때문에 흔히 ‘갈 데까지 간다’고 말한다.

중고제의 창법은 창을 할 때 비교적 낮은 음성에서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음성을 낮추어 부르는 것으로서,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불러야 제격인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한다. 성음의 고저가 분명하여 명확히 구분하여 들을 수 있으며, 독서풍의 가류(歌流)로서 노래 곡조가 단조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4. 명창의 시대적 흐름28)

판소리 청중들 사이에서는 흔히 8명창 시대니, 5명창 시대니 하는 用語를 사용하는데, 이는 특정한 시기와 명창을 연결지어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판소리史를 구분하는 이러한 관습에 따라 前期 8명창 시대, 5명창 시대, 그리고 현대로 시기를 나누어 名唱과 더늠29)을 살펴보기로 한다. 8명창 시대를 前期와 後期로 특별히 나누는 이유는, 8명창 시대가 100년에 이르는 긴 기간을 포괄하고 있어서 다른 시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8명창 시대에 해당하는 19세기의 前半과 後半의 판소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 前期 8名唱 時代

8명창 이전 시대의 소리꾼으로는 판소리의 始唱者라고 하는 최선달?하한(은)담 등이 있으나, 이들은 구체적인 더늠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181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우춘대(禹春大)라는 명창이 등장하지만, 역시 더늠이 전하지는 않는다.

전기 8명창 시대는 19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이 시대에 이르러 판소리는 12바탕으로 완성되고, 여러 명의 훌륭한 명창들이 등장하여 판소리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판소리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전기 8명창 시대에 거론되는 사람들은 권삼득?송흥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주덕기?황해천?송광록 등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구체적인 더늠이나 특별한 선율 형태 등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각 지역의 향토 음악 선율을 판소리에 도입하여 판소리가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민족의 예술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판소리의 전성기는 이러한 명창들의 노력과 성과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 後期 8名唱 時代

19세기 후반은 후기 8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 중 8명창에 드는 사람은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김창록?장자백?김찬업?이창윤 등이다. 이들은 前期 8명창들이 개발해놓은 선율형들이 갈고 닦아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더늠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 마침내 판소리는 宮中에까지 침투하였으며, 많은 소리꾼들이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보다 서민적 趣向의 소리인 서편제 소리가 등장하여 큰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신재효가 소리꾼들을 후원하면서 사설이 改作을 하기도 하였고, 전주 대사습이라는 명창의 登龍門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다. 5名唱 時代

이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데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5명창으로 알려진 사람으로는 박기홍?김창환?전도성?이동백?김창룡?유성준?정정렬 등이다.

이 시기의 판소리는 변화되어가는 환경에 살아남기 위한 자체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唱劇化로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는 留聲機의 보급에 따른 레코드 취입도 성행하게 되어, 판소리는 점점 더 일반 대중의 趣向에 의존하게 되었다. 판소리는 대중적 취향과 함께, 계면화(슬픈 가락으로의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 시대 또 하나 特記할 만한 일은, 1920년경에 전국 주요 도시에 권번(妓生組合)이 설치되어, 여기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다수의 여자 唱者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라. 現代

해방 후의 판소리는 대체로 沈滯를 면치 못하였다. 판소리가 基盤으로 삼고 있던 전통사회가 解體되고 산업화되면서 판소리가 설자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명창이 또한 明滅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했던 김소희(1917 - 1995), 박초월(1913 - 1978), 박녹주(1916 - 1981), 등 女流 명창과 임방울(1904 - 1961), 김연수(1907 - 1974) 등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소리꾼들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임방울은 天性의 아름다운 목으로 일제 강점기에 ‘쑥대머리’를 불러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사람으로, 유성준에게 배운 적벽가와 수궁가, 그리고 춘향가를 長技로 삼았다.

김연수는 조선성악연구회 시절부터 창극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인데, 해방 후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새로 짜서 이른바 ‘김연수제 판소리’를 만들었다. 임방울의 소리는 제대로 전승한 사람이 없으나, 김연수의 소리는 많은 제자들에 의해 점점 더 융성하면서 대표적인 현대 판소리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30) 


 












  Ⅳ. 結論


지금까지 판소리 유파와 이들 유파와 기법, 그리고 명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판소리에서 ‘제’는 법제 또는 제작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리 스타일’을 의미한다. ‘제’의 큰 범주로는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유파로 나눌 수 있지만, 작은 범주의 ‘제’로는 ‘더늠’?‘바디’?‘조’를 포괄한다. 이 작은 범주의 제도 유파와 마찬가지로 자체적 전승력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형성 원리같은 것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판소리’라는 예술이 어떤 류의 예술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몇 마디로 요약하면 ‘판소리는 이야기를 노래부르는 구두 전승의 예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견지에 따라, 거기에는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고, 연극적인 퍼퍼먼스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사회가 있고, 역사가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의 견지에서서 바라다보기로 한다면, ‘판소리’는 분명 ‘민족음악학’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며, 특히 ‘민속음악’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민속음악’,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민속예술’로서의 뿌리를 캐고 또 거기에 바탕을 두고 출발할 적에, 우리의 현실을 풀어나갈 어떤 단서같은 것이 잡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31)

  우리의 판소리는 國王으로부터 천민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함께 울고 웃으며 삶의 애환, 기쁨, 해학을 함께 공유하며 함께 나누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三綱五倫에 바탕을 두고 ‘春香의 節槪, 興夫의 友愛, 沈淸의 孝道, 자라의 忠誠 등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非行을 懲戒하고 善行을 勸?하는 내용은 勸善懲惡의 敎化와 移風易俗의 풍자와 천태만상의 조화적 운의가 들어 있어 우리 문화의 한 부문으로 찬연한 광채를 발휘하여 온 것이다.32)   수백 년동안 우리의 사랑을 받아 면면히 이어져 왔고 지금도 우리 예술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은 판소리야말로 한국인의 心性에 가장 맞는 예술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판소리를 연구하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과 예술성을 아는 것이며 판소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심성을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이러한 판소리를 이제 점점 서양이나 현대의 음악의 물결에 파묻혀 박물관의 물건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소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우려는 한 先學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엄격한 신분제 속의 전통 사회, 그리고 식민지적 상황의 질곡을 겪어온 판소리가 어떻게 자생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판소리 자체가 가진 기본적인 응전력과 민족적 독자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있기에, 이에 대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하여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33)

  

  




    參考 文獻


판소리학회, 『판소리의 세계』, 문학과 지성사, 2000.

정병욱, 『한국의 판소리』, 집문당, 1987.

______, 『판소리의 형성과 변화』「판소리 연구」,국어국문학회, 1998.

이국자, 『판소리 연구』, - 80년대 名唱의 판소리를 中心으로 - , 정음사, 1990.

김대행, 『판소리란 무엇인가』, 「판소리의 세계」, 문학과 지성사, 2000.

유영대, 『심청가의 형성과 전승계보』, 한국문화인류학Ⅲ, 1971.

이보형, 『시나위圈의 巫俗音樂』, 한국문화인류학Ⅲ, 1971.

이흥규, 『무가, 판소리, 산조에서 엇모리 가락 비교』, 「이혜규 박사 송수 기념 음악학 논           총」, 한국국악학회, 1969.

______, 『조선 후기 유랑연예인들』, 고대문화20, 1981.

서대석, 『판소리의 기원』, 판소리 학회, 문학과 지성사, 2000.

장주근, 『한국의 신화』, 논총 34. 이대한국문화연구원, 1979.

최남선, 『조선상식문답(속편)』, 삼성출판사, 1972.

김동욱, 『한국가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1.

이혜구, 『한국음악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유  신, 『판소리 예술론』, 삼호출판사, 1992. p 170.

김기동, 『한국 소설 발달사(中)』, 한국문화사대계Ⅴ,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71.

정노식, 『조선 창극사』, 조선일보사 출판부. 1940.

최동현, 「판소리의 명창과 더늠」,『판소리의 세계』, 판소리학회, 2000.

______, 『판소리 명창과 고수 연구』, 신동아출판사, 1997.

최동현?유영대 『판소리 동편제 연구』, 태학사, 1998.

이기우?최동현, 『판소리의 지평 -과제와 전개 - 』, 도서출판 新亞

이기우, 『명창론』, 「판소리」, 신아출판사, 1988.

朴  晃, 『판소리 이백년사』思社硏, 2000.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