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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
강화도의 아름다움은 제주도에 버금간다. 제주도는 자연이 압도하지만, 강화도는 역사의 힘이 더욱 세다. 자연도 인간도 아름다운 곳, 강화도의 진수가 전등사에 가면 감지된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전등사
주소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입장료 : 4,000원
방문일 : 2022.10.19.수
2. 돌아보기
눕는 가을 햇빛과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전등사의 조합이 황홀하다. 깊은 함의에 햇빛이 골고루 스며들고 어루만지니 황홀하게 빛난다. 마당에 서 있으니 그 빛이 몸 속에도 스민다.
*전등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幀)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本山)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金之淳)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鞠昌煥)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李智永)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寂默堂)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李普仁)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極樂庵)을 중수하고, 적묵당(寂默堂)·강설당(講說堂)·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金正燮)은 1934년 전문강원(專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安震湖)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對潮樓) 등이 있다.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전등사 철종(보물, 1963년 지정)과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2012년 지정),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2012년 지정)이 있다. 전등사 법화경판은 200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16년 지정 해제되었다. 철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1995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璿源譜閣)·장사각(藏史閣)·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대웅전
대웅전 네 귀퉁이 추녀를 떠받드는 나녀상(裸女像)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각이다.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 주막집 주모와 정분이 나서 나중 함께 살기로 하고, 꼬박꼬박 받은 노임과 여러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것을 모두 가지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평생 벌거벗고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으라고 주모를 본뜬 나부상을 만들어 추녀 밑에 받쳐 놓았다. 불경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라고 한 걸까. 도편수다운 분풀이 방식이기만 했을까.
이 조각이 원숭이상이란 설도 있다. 전생에 석가모니는 원숭이의 왕이었는데, 그 원숭이들의 존경심을 표시하기 위한 거란다. 또 나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도편수 전설의 구체성이 상당하고, 신성한 사찰에 끼어든 이처럼 세속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오히려 신성이 바로 세속임을 알려주는 더 깊은 지혜라고 보는 것이 나을 거 같다.
철종각 뒤의 극락암.
*전등사동종
전등사의 종각에 있는 중국 북송시대의 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몸체에 새겨진 '大宋懷州修武縣百巖山崇明寺紹聖丁丑歲丙戌念三日鑄鐘一顆'라는 명문에 의하면, 원래 중국 허난 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에 위치한 숭명사에 있던 것으로 1097년에 주조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중국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말 군수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철제로 만들어진 종으로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정상에 음통(音筒)이 없고 다만 2마리의 용이 서로 맞대고 있는 용뉴가 달려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복련의 연꽃무늬를 돌렸다. 어깨부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려진 횡선대 사이로 9개의 화판(花瓣)과 팔괘가 장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몸체는 여러 개의 선으로 8개의 방형 구획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완전하게 해독하기 어려우며, 명문에 종이 주조된 지방이나 절·연대·시주인·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원나라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의 개성연복사종(1346)과 매우 유사하며, 11세기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중국 종의 시원적인 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몇 개의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다음백과 전재)
중국의 전성기는 북송까지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은 소식이다. 소식의 기운을 담고 온 거 같다.
나무는 죽어서도 향기롭다. 대강 새긴 듯한 조각이 부처도 같고 시인도 같다. 후자라면 소식 아닌가. 북송의 종을 지키는 소식, 그럴싸한 상상 아닐까. 하지만 달마대사란다. 최근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전등사는 어느 각도에서 잡아도 아름답다.
극락암
명부전
아래는 명부전 내부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보물 1786호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숭정(崇禎) 9년(1636)이라는 뚜렷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각승 수연(守衍)에 의해 조성된 지 13년이 지난 뒤에 역시 수연이 수화승이 되어 제작한 상들이다.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와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이 많다보니 조각승도 12명이나 참여하여 수연의 지휘 아래 제작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상들의 조성을 위한 시주에 수많은 신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전등사 일대의 대대적인 불사(佛事)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장보살상은 방형의 얼굴에 엄중하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이며 양 어깨에 걸쳐진 대의 옷자락은 유연한 주름을 이루며 하체로 연결된다. 양손으로는 지물을 들지 않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감이 우수하다. 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도명존자상은 얼굴표현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며, 장삼위에 가사를 입은 착의형식이 단정하다. 수연 조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 외에도 시왕상과 기타 권속의 여러 상에서 보이는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는 수연 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각기법상의 우수성, 조각가와 조성연대에 대한 분명한 기록, 원래부터 전등사 명부전 봉안을 위해 조성된 상이라는 여러 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큰 상들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은 인조 14년에 조성된 것이다.
*약사전
전등사 대웅전의 서북쪽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9호.
건물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내부에는 평주 양 옆으로 대들보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보가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 한가운데 있는 불단에는 석조약사불좌상이 놓여 있다. 천장은 역시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는 연꽃과 비천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다음백과 전재)
*야사전 내부 석조약사불좌상
*관음전
대조루
이색(李穡) <전등사>(傳燈寺)
蠟屐游山興自淸 납극 신고 산에 오르니 흥취 절로 맑으며,
傳燈老釋道吾行 전등사의 늙은 중이 내 가는 길 인도한다..
窓間遠岫際天列 창밖의 먼 산들은 하늘 끝에 벌여 있고,
樓下長風吹浪生 누각 밑의 긴 바람이 물결을 일으킨다.
星歷蒼茫伍太史 별을 보는 역법을 오태사라도 아득하고,
雲煙慘淡三郞城 구름 안개는 삼랑성을 흐릿하게 한다.
貞和願幢誰更植 정화궁주의 원당은 누가 다시 세울까?
壁記塵昏傷客情 벽기에 먼지 쌓여 나그네 마음 상한다.
적묵당
고려시대 유물이라는 청동수조.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이라 한다.
대웅전 내부 수미단 위의 석가모니 아미타 약사여래 불상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추녀 밑의 나부상. 도편수가 자신의 돈을 가지고 도망하였다는 주막 주인여자를 이렇게 조각하여 지붕을 받치게 하였다. 사람들은 전등사 부처는 몰라도 이 나부상은 잘 안다. 나부상 덕에 전등사가 더 유명해졌다. 신성과 세속의 시너지 효과인가.
처마 네 귀에 모두 나부상이 있는데 청동수조 뒤의 공사 때문에 세 귀의 나부상만 촬영했다.
대웅전
대조루 안에서 그림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범종각
약수. 위로 철종각이 보인다.
범종각과 대조루
대조루 아래 죽림다원. 가을 햇살을 받은 마당과 나무 차탁들이 너무 아름답다.
사찰의 동쪽인 삼랑성 문으로 나가면 경내를 벗어난다.
아래로 들어서면 음식점과 기념품점들이 즐비한 사하촌이다. 사찰도 성벽도 민가도 모두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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