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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동도서기론 |
한자항목명 | 東道西器論 |
유형 | 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중국 시대 | 명청 시기/청 |
<요약>
유교적 윤리질서[東道]를 고수하면서도 서양의 군사‧과학기술[西器]을 수용하자는 부분적 채서론(採西論).
<설명문>
도(道)‧기(器)를 체용(體用)으로 보는 관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기(器)라 한다.”라고 한 데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아편전쟁(阿片戰爭),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제2차 아편전쟁(Arrow호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광(道光)‧함풍(咸豊) 연간의 사회적 격변은 청조(淸朝) 지배체제의 위기와 서양 군사 기술의 탁월성을 청조 위정자(爲政者)들에게 인식시켰다. 또한 태평천국을 정점으로 하는 농민봉기(農民蜂起), 비밀결사(祕密結社)의 반청활동(反淸活動) 등 투쟁을 진압한 후, 체제측의 중심적 과제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자강(自强)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 동도서기론은 이러한 서양 기술 문명의 우위성에 대한 인정과 청조 지배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하여 먼저 ‘중학(中學)’과 ‘서학(西學)’을 조화시키는 이론적 근거를 찾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동도서기론의 본질적 의의는 서양의 충격을 받아서 자기 동질성의 재확인을 강요당한 전통 중국이 그 시련을 견디려고 하는 필사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서양 군사 기술의 도입을 처음 주장했던 사람은 “이(夷)의 장기(長技)를 스승으로 하여 이를 제어(制御)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엮은 위원(魏原)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중학과 서학의 날카로운 긴장은 아직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기(器), 곧 서학의 도입이 그에게는 하나의 제언(提言)에 그치고 있어서, 현실의 절박한 요청이나 서학이 갖는 이질성(異質性)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학, 특히 산학(算學)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중학’과 병치하며 배워야 할 것을 역설한 최초의 문헌은 풍계분(馮桂芬)의 『교빈려항의(校邠廬抗議)』 2권이었다. 1861년 태평천국의 와중에서 쓰여진 이 책은 그 후의 양무론(洋務論)의 원형을 보여준다. 풍계분은 서양의 산학‧중학(重學)‧시학(視學)‧광학(光學)‧화학(化學) 등이 모두 격물(格物)의 지리(至理)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학사(學士)의 수치’라 하고, 서양 제국(諸國)의 부강을 배우는 것을 후왕(後王)에게서 법(法)받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서학을 단지 중학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이후 서학에 대한 중학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학의 근본은 중학으로부터 나왔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중화의식(中華意識)의 한 표현으로서 고식적(姑息的) 절충론(折衷論), 혹은 자기과신의 궤변이라 평(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논리는 서학 도입에 길을 열었고, 동시에 기(器)에 있어서 열등한 위치에 서 있는 중학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동도서기론이 양무(洋務)‧변법(變法)사상의 중심적 이념으로 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동도서기론의 사상적 연원은 실학파(實學派)의 서학관(西學觀)에까지 소급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제기된 직접적인 계기는 제국주의(帝國主義)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응하여 사회의 기본 질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강을 꾀하려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당시 개항 추진 세력들의 시대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82년 윤선학(尹善學)의 상소(上疏)로서 그 내용은 ‘서양의 기술을 배우되 우리의 도를 지킨다.(學器守道)’였으며, 그 이론적 단서는 박규수(朴珪壽)에게서 제기되었다. 점진적 개화론자인 김윤식(金允植)은 “서양의 교(敎)는 나쁘니 마땅히 멀리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器)는 이롭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하여 그 교는 배척하되, 그 기는 배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유길준(兪吉濬) 역시 이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동도서기론은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는 달리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임기응변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채서(採西)의 적용 범위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행(移行)하는 추세를 보였으며, 그에 따라 18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기(西器)로부터 서법(西法)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서제(西制)의 채용없이 자강이 불가능하다는 급진적 개화론(開化論)까지 대두되는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채서의 적용 범위에 상관없이 그 준거(準據)를 유교적 본말론(本末論)에서 찾는 전통적 의식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도와 기를 분리시켜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 현실에 대처하는 자강 정책을 모색함으로써 도기일원론적(道器一元論的) 세계관을 극복한 새로운 의식 성향을 보여 주었다. 박규수에 의해 태동된 동도서기론은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정치 세력 형성기에 이르러 분화되어 나타났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있어서 동도서기론자들은 근대 개화사상 형성에 교량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참조항목>
위정척사론, 중체서용론
동서문화논쟁(東西文化論爭)
한글항목명 | 동서문화논쟁 |
한자항목명 | 東西文化論爭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공화국/중화민국 |
<요약>
중국에서 1920년에 시작된 동서문화의 우열에 관한 논쟁.
<설명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제기된 서양의 몰락이라는 주장에 호응하는 양계초(梁啓超) 등이 서양 문화에 대한 동양 문화, 특히 중국 문화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시작된 논쟁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1915년 『신청년(新靑年)』 창간 이래 진독수(陳獨秀)를 중심으로 하여 서양 고대 문화의 이식에 의해 중국의 근대화를 도모하려는 이른바 신문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서양 근대 문화 일변도의 사회적 풍조에 대하여 전후의 유럽을 살펴보고 돌아온 양계초는 1920년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을 발표하여 서양문화의 말기적 증상과, 그 병폐를 구제하기 위한 중국 문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주장에 공감한 양수명(梁漱溟)은 다음해인 1921년 『동서문화와 그 철학』을 저술하여, 중국 문화가 서양 근대 문화를 이어 가까운 장래에 세계 문화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라며 중국 문화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호적(胡適)이나 오경항(吳敬恒) 등은 자연 과학과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열거하면서 반론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불붙게 된 동서문화논쟁은 결국 5‧4 신문화운동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으로 규정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1923년의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이란, 인생에 관한 문제는 형이상학적 사상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관념론자에 대해 자연과학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이 과학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비롯된 논쟁이다. 이 두 논쟁은 기본적으로 청말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그 후의 중국 본위 문화운동, 신생활운동과 더불어 급격한 서양 문물의 수입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문화의 보존이라는 입장에서 무분별한 서양문물의 추종에 경종을 울렸다는 의의를 가진다.
<참조항목>
양계초
동심설(童心說)
한글항목명 | 동심설 |
한자항목명 | 童心說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명청 시기/명 |
<요약>
동심(童心)을 비평 원리로 인간과 문화를 분석‧비평한 이지(李贄)의 대표적 학설.
<설명문>
이것은 명대(明代) 이지의 『분서(焚書)』 제3권에 보이는데, 그에 의하면 동심은 거짓된 마음[假心], 거짓된 뜻[假意]에 대립된 개념으로, 참된 마음[眞心]이라는 의미로서 ‘거짓없는 최초 일념(一念)의 본심’을 가리킨다.
이지는 많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그러한 장애로 인해 동심을 잃어버리면 언어(言語)‧정사(政事)‧문사(文辭)는 모두 거짓된 사람의 말[假言], 거짓된 일[假事], 거짓된 글[假文]이 된다고 했으며, 이와는 달리 동심에 입각한 것이라면 고금(古今)에 관계없이 훌륭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기본 입장에 의해 『서상기(西廂記)』‧『수호전(水滸傳)』‧팔고문(八股文)과 같은 것 속에도 훌륭한 점이 있으며, 육경(六經)이나 『논어(論語)』‧『맹자(孟子)』 등도 증세에 따른 처방과 같이 당시의 필요에 부응하여 나온 것으로 만세(萬歲)의 지론(至論)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육경 등은 도학(道學)의 구실, 거짓된 사람들의 집합소라고까지 통렬하게 비난했는데, 이는 당시의 교조적(敎條的)인 학풍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다.
동심설은 왕수인(王守仁)의 양지(良知), 왕기(王畿)의 적자지심(赤子之心) 등을 계승한 것인데, 특히 왕수인은 양지를 선악(善惡) 판단에 국한시켜 말했으나, 이지는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동성(能動性)을 동심이라고 하여 그것을 확대‧발전시켰다.
동학(東學)
한글항목명 | 동학 |
한자항목명 | 東學 |
유형 | 개념/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요약>
조선 말기에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제창된 것으로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하여 인간의 주체성과 만민 평등을 강조한 종교.
<설명문>
당시 우리나라는 어린 헌종(憲宗)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 다툼과 알력이 극도에 달하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권이 위기에 처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여기에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 :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한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 암굴 속에서 수도하여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쪽에 있는 나라 조선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도(道)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 천국의 이념과 만민 평등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유교의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천심즉인심’의 원리 역시 하늘이 유덕한 자에게 명을 내려 국가를 통치하게 하며, 그 통치자의 유덕함은 백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교의 민본주의(民本主義)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동학은 신분제도와 적서제도(嫡庶制度) 등에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 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와 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 하여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았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사형당한 후, 교인들은 지하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 숨어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 제도(接主制度)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대도주를 두고, 한편 포주‧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서 조직되었던 동학은 18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혁명의 주체가 되었고, 이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 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때부터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로 분리되었다.
<참조항목>
천도교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
한글항목명 | 문이재도론 |
한자항목명 | 文以載道論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수당 오대 시기/당 |
출전 | 『통서(通書)』 「문사(文辭)」, 『원사(元史)』 「유학전(儒學傳)」, 「집창려문서(集昌黎文序)」 |
<요약>
문장(文章)은 도(道)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이론.
<설명문>
유가(儒家)의 문학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쓰여진 문학 작품의 경향을 재도문학(載道文學)이라고 한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한유(韓愈)인데, 그는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전개하면서 고문(古文)과 고도(古道)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를 이어 소식(蘇軾)은 「조주한문공묘비(潮洲韓文公廟碑)」에서 “문(文)은 팔대(八代)의 쇠미함을 흥기시키고 도(道)는 천하의 병폐를 구제한다.”라고 하여 한유의 입장을 계승하였으며, 같은 입장에 섰던 주돈이(周敦頤)가 『통서(通書)』 「문사(文辭)」에서 “문은 도를 싣는 방법이다.(文所以載道也)”라고 함으로써 이 이론을 문이제도론으로 귀착시켰다. 또한 『원사(元史)』 「유학전(儒學傳)」에서도 “육경(六經)은 도가 있는 곳이요, 문장은 도를 싣는 방법이다.”라는 기사가 보여 이 이론이 중세 중국의 정통적 문학관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이한(李漢)은 「집창려문서(集昌黎文序)」에서 “문은 도를 꿰는 도구이다.”라고 하여 관도론(貫道論)을 표방한 바 있다. 이 이론은 청대 동성파(桐城派)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등 오랫동안 중국 문학에 영향을 미쳐왔는데, 민국(民國)의 학자 주작인(周作人)은 『중국 신문학의 원류』에서 중국 문학사를 왕조(王朝) 쇠퇴기에 있어서 언지 문학(言志文學:문장을 통해 작자의 뜻을 표현한다는 문학관)의 유행과, 왕조 흥성기에 있어서 재도 문학 성행의 교체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주희(朱熹)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문은 도를 좇아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여 독창적인 문종도설(文從道說)을 내세웠으며, 또한 민국에 들어와서 신문학 운동(新文學運動)이 전개될 때는 이 이론이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참조항목>
동성파
문질삼통(文質三統)
한글항목명 | 문질삼통 |
한자항목명 | 文質三統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이칭 | 문질재이복(文質再而復), 정삭삼이개(正朔三而改) |
출전 | 『춘추번로(春秋繁露)』 「삼대개제질문(三代改制質文)」, 『백호통(白虎通)』 「삼정(三正)」 |
<요약>
왕조(王朝)의 교체에 따라 문질이 교체되고 삼통(三統)이 순환한다는 이론을 가리키는 말.
<설명문>
이것은 『춘추번로(春秋繁露)』 「삼대개제질문(三代改制質文)」과 『백호통(白虎通)』 「삼정(三正)」에서 주장된 이론으로 문질재이복(文質再而復:文과 質은 거듭 반복된다), 정삭삼이개(正朔三而改:正月은 세 가지로 교체‧순환된다) 등의 표현으로 요약된다. 문질이란, 은(殷)나라는 질(質)을, 주(周)나라는 문(文)을 숭상함과 같이 왕조의 혁명‧교체에 따라 순환되어 예제개제(禮制改制)의 원리로 사용되는 것을 뜻한다. 삼통이란 하(夏)나라를 인통(人統), 은나라를 지통(地統), 주나라를 천통(天統)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라는 건인(建寅)의 달[月]을 정월(正月)로 삼고 복색(服色)은 흑(黑)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흑통(黑統)이라고도 한다.
은나라는 건축(建丑)의 달을 정월로 삼고 복색은 백(白)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백통(白統)이라고도 하며, 주나라는 건자(建子)의 달을 정월로 삼고 복색은 적(赤)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적통(赤統)이라고도 한다. 이것도 문질과 같이 왕조의 교체에 따라 흑통에서 백통으로, 백통에서 적통으로, 다시 적통에서 흑통으로 순환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적 맹아는 『논어(論語)』 「위정」의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禮)에 근거하였으니 그 가감(加減)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에 근거하였으니 그 가감을 알 수 있다.”라는 데에서 엿보이는데, 마융(馬融)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논어집해(論語集解)』에서 ‘근거한 바’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이고, ‘가감한 것’은 문질삼통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후 이것은 황간(皇侃)의 『논어소(論語疏)』, 주희(朱熹)의 『논어집주(論語集注)』,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등에서도 마융의 학설을 따라 문질삼통으로 해석되었다.
<참조항목>
문질, 문질빈빈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
한글항목명 | 미발심체유선악론 |
한자항목명 | 未發心體有善惡論 |
유형 | 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요약>
조선시대에 발생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주요 논쟁점 가운데 하나.
<설명문>
조선 후기에 사람들이 내재하고 있는 심의 본질적인 측면인 심체(心體)를 순선(純善)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 낙파(洛派)와 선악의 두 속성이 동시적으로 있는 것으로 보고자하는 호파(湖派)가 상호 대립하였는데, 이를 미발심체유선악론 또는 미발심체유선악 논쟁이라고 한다. 낙파의 학자들은 미발의 심체를 순선한 본연지기(本然之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을 주장하였다.
호파의 학자들은 미발상태의 심체에도 장차 악으로 드러날 싹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미발상태에서는 기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악한 속성이 드러나지 않아 심체가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낙파에서는 비록 호파가 미발일 때에는 악한 속성이 작용하지 않아 심체가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미발의 심체에 악한 측면이 선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있다는 주장이므로 옳지 않다고 하며, 호파의 학설을 미발심체유선악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참조항목>
호락논쟁
미언대의(微言大義)
한글항목명 | 미언대의 |
한자항목명 | 微言大義 |
유형 | 개념/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춘추(春秋)』의 표현 양식.
<설명문>
공자가 『춘추』를 필삭(筆削)함에 있어 간단 명료한 언급[微言]을 통해 원대한 정치적 주장[大義]을 드러내는 방법을 취했다고 보는 관점으로, 특히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기본적 관념이다.
<참조항목>
삼과구지설, 춘추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