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트레킹 네째날(2015년 4월 15일, 수요일)
천계(天界)가 이런 곳일까? 천지가 순백이다.
ABC 건물의 유난히 눈에 띄는 파란색 지붕과 간간이 튀어나온 시커먼
바위들, 눈보라를 맞지 않는 설산들의 경사진 벽면을 빼고는 태고의 순결함을 그대로 간직한 천계에 도착한
것이다.
신기루처럼 하얗게 일어나는 안개와 내리는 눈이 뒤섞여서 땅과 하늘조차도 구분하기 어렵다. 인간의 흔적인 ABC만 빼고는 태초에 신(神)이 창조한 형태 그대로 이리라.
처음 본 ABC에 대한 소감이다.
안나푸르나 여신 품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듯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어제 밤은 데우랄리(Deurali, 3,200m)에서 보냈다.
데우랄리 숙소 로지를 한국인 두 사람과 함께 사용했는데, 어제가 70세 고희(古稀)를 맞이한
분과 올해 23세 군입대전의 대학 휴학생 청년이다. 나처럼
각자 혼자서 여기에 왔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서로 나이차이가 나지만 수 만리 이국 땅으로 날아와서 트레킹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70세 분은 이미 일에서 은퇴를 하신 것으로 자신의 버킷 리스트로서 꿈꾸어 왔던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20대 초반의
청년은 군입대전에 트레킹과 외국여행 경험을 통하여 어려운 군대생활을 잘 극복하고 앞으로의 인생길에도 도움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여기에 왔다는
것이다.
각자의 일정과 계약한 포터가 있어 더 자세한 얘기는 나눌 수 없었지만, 여행은
또 다른 우연한 마주침일 것이다. 거기서 또 다른 나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70세 나이에 히말라야 도전,
대단하다. 나는 그 나이되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6시에 아침으로 라면을 먹고 6시
반에 데우랄리를 출발했다.
앞으로 남은 길은 MBC(Machapuchre Base Camp,
3,700m)와 목적지인 ABC(Annapurna Base Camp, 4,130m) 뿐이다.
데우랄리에서 MBC로 가는 길 주변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하고 키 작은
잡목들과 갈대처럼 누렇게 말라버린 들풀,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산의 절벽이나 바위틈에 달라붙은 황토색
이끼뿐이다.
적막감마저 감도는 고요한 계곡 속에 일어나는 소리는 어디선지 모르게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만년설이 녹아서 형성되어
계곡을 흘러가는 급류의 굉음뿐이다.
돌 투성이 땅은 척박하고 길은 험하여 도저히 사람이 주거하며 살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온 것이다.
숲이 없기에 날씨가 흐려도 4~5천 미터 이상 되는 설산들이 파노라마처럼
장엄하게 펼쳐지는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곳곳에 커다란 눈사태가 나서 길을 막아도 인간의 의지와 집념은
길을 내거나 만들면서 대자연을 이기려 한다.
어떤 때는 하얀 안개가 순식간에 설산의 파노라마를 삼켜 버리기도 하고 다시 그 모습을 되돌려 놓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다.
이른 아침인데, 짐꾼 몇 명이 어깨에 커다란 배낭을 지고 눈사태가
난 길을 헤치고 내려온다.
8시쯤 되니 백인 남녀가 내려온다.
‘나마스테’ 인사를 하고, ABC에서 오냐고
물으니, MBC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일출을 보았냐고 물으니, 안개가 끼어 보지 못 했 단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데우랄리가
3,200m, MBC 3,700m, ABC 4,130m로 거의 천 미터를 올라가야 하니 계속 오르막일 수밖에 없다.
MBC도착 직전에서 첫날 만났던 중국 청년을 만났다. 어제 ABC에 도착해서 자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한다. 출발속도는 나보다 늦었지만, 첫날 시누와에서 숙박하고 올라갔기 때문에
하루가 빠른 것이다. 젊은 녀석의 체력이 다르다. 나에게 ‘Good Luck!'을 빌어준다.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MBC부터는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
해발 3,700미터! 주변은
대부분 하얀 눈밭이다. 햇볕이 강하게 비치는 곳은 눈이 녹아 시커먼 물기를 머금은 흙과 돌, 잡풀들로 하얀 눈밭과는 구분이 확실해진다. 여기까지는 간간이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과 잡풀과 이끼들이 서식하고 있다.
눈의 산이고 눈의 계곡이 펼쳐진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곳부터는 선글라스를 끼는 게 좋다.
사르키는 단련이 되었는지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다. 내가 여분으로 가져온
것을 빌려준다고 해도 사양한다.
저기 위쪽에서 백인 청년들이 눈 장난을 하고 있다. 엉덩이에 비닐
같은 것을 깔고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며 환호성을 지른다.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지만 이 순간을
누가 제지할 수 있으랴?
나는 트레킹 준비가 빵점이라, 아이젠도 변변한 등산화도 없이 눈길을
오르고 있다.
사르키가 동료 포터의 아이젠을 빌려준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그 사람도 아이젠을 착용해야 한다.
이 구간부터는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부에서 만난 한국 분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미끄러운 눈길은
사람들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가면 안전하다고 했던 말.
천천히 반 걸음씩 발을 떼기로 했다. 고산병 때문이다. 해수면의 산소 농도가 100이라면,
4,130m인 ABC는 60, 8,848m인
에베레스트 정상은 33으로 산소 호흡기를 착용해야 한다.
아까 MBC부터 머리가 쑤셔오고, 속이
거북해지는 느낌이다. 최대한 호흡을 길게 하면서 평소 보폭의 절반으로 줄였다.
어떤 이는 ABC를 눈앞에 두고 너무나 머리가 아파서 하산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고산병을 약을 좀 먹을 걸...
데우랄리를 출발할 때, 만약 내가 고산병 때문에 견디지 못하면 ABC에 도착 즉시 하산하자고 사르키와 의논해 두었다. 사르키는 걱정마라고
한다.
이러한 천계의 눈길을 오르는 길의 광경은 어떻겠는가?
우리가 방송이나 영화에서 보는 히말라야 원정대가 눈길을 헤치고 갈 때처럼, 설산들의
파노라마이다.
신들이 사는 천계(天界)로
가는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니겠는가?
사르키는 나에게 말한다. 비스따리(Slowly),
비스따리...
저 멀리 파란 지붕이 몇 개 보인다. ‘There is ABC!' 사르키는
나에게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말해준다.









ABC나 MBC에는 밤부, 도반이나 데우랄리처럼 트레커들이 잠잘 수 있는 숙소 로지, 식당들이
몇 개 있다. 여기서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차량이 다니는 시와이에서부터 사람들이 짊어지고 오기 때문에
상당히 값을 치러야 한다.
ABC에 도착하니 오전 11시밖에
안되었다. 데우랄리에서 5시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내일 아침까지 점심과 저녁을 먹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따뜻한 밀크
티를 몇 잔 마시고, 잠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고, 아침을 먹고 내려가려면 대략 3천루피 정도는 필요하다.
너무 일찍 도착했지만 머리가 아프고 속이 거북하다. 고산병 증세다.
사르키는 점심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소화할 자신도 없고 배도 고프지
않다.
마침 졸음이 몰려온다. 숙소에서 침낭 속에 들어가서 누우니 몽롱하니
금세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니 오후 두 시 반이다. 세
시간동안 잠을 잔셈이다. 여전히 머리는 쑤시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 졌다. 배도 고프다.
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토스트와 밀크 티를 시켜 먹으니 요기가 된다.
ABC에 도착한 트레커들 대부분은 추위를 피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식당에 앉아서 함께 온 동료끼리 혹은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대화에 빠져든다.
'나마스테'라는 세계 공통어의
인사말로 시작하는 대화는 끝이 없다. 대부분 자신이 어디 출신이며 이번 트레킹은 어떠했고, 네팔과 히말라야에 대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아니면 창가에 앉아서 자신이 올라왔던 눈길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이도 있다.
밖은 함박눈에 안개까지 끼어 있다. 식당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야 함께 체온을 나눌 수 있다.
밖이 아무리 추어도 불을 피울 땔감도 없고 음식을 만들 가스와 밤을 밝힐 전등에 쓸 전기뿐이라 난방이 되지 않는다.
저녁으로 갈릭 수프와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갈릭은 고산병 완화효과가 있다했는데,
의외로 맛이 있다. 갈릭 수프는 사르키의 추천이다.
어두운 밤에 하늘이 맑아져 별을 볼 수 있었지만, 별 사진을 찍기에는
하늘의 별이 너무 적다. 어쩌면 내일 동이 터기 전에 별과 함께 설산들을 촬영할 수 있는 여신의 은총을
받을 지도 모른다.
내일은 6시에 아침을 먹고 하산하는 것으로 사르키와 얘기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잔 두통이 계속되어 스마트폰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옛날 팝송들을 두 시간정도 들었더니 많이 완화되어 기분도 좋아진다.
이어폰이 없어 폰의 스피커로 들었는데 식당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른다.
비틀즈의 Hey Jude,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 존 레논의 Imagine,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 사이몬과 가펑클의 Bridge of Trouble
Water, Sound of silence,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 비틀즈의 Let it be, Yesterday,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의
Perhaps Love, 모리스 앨버트의 Feeling, 아바의 Dancing Queen, I have a Dream,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휘트 니휴스톤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등
이런 노래들을 한 밤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한 식당에서 추위를 피해 모여서 체온을 나누고 있는 세상 각 나라에서
온 트레커들과 그들을 데리고 온 네팔리 포터들과 함께 듣고 따라 부른다.
아바의 Dancing Queen이 나오자 어떤 백인 여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이 한 때 마치 Dancing Queen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신나게 춤을 춘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음악을 들려줘서 ‘Thank you very
much!'를 연발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저 아래 지상에서는 흔하게 듣던 음악인데도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ABC까지 올라온 지친 트레커들에게는 흔한 노래들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영혼과 지친 육신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청량제가 아닐지...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았는데.








첫댓글 자연의 위대함에 압도되네요...고산병때문에 고생하셨다구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현대에 입사해서 신입사원 연수로 설악산 정상에 올라가본 것이 가장 높게 올라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