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에 있는 송아지를 버려라. / 호 8:1-14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는, 연못처럼 아주 넓은 나이아가라 강이 있는데, 그 강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배가 저절로 폭포 쪽으로 슬슬 떠내려갑니다. 그런데 그 강에는 깃발이 꽂혀 있거나, 줄이 매여져 있는 곳이 세 군데 있습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경계선입니다. 첫 번째 경계선에는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노를 저어야 올라갈 수 있다’고 적혀 있으며, 두 번째 경계선에는 ‘여기까지 왔다면, 모터보트를 타야 올라갈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경계선에는 ‘여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 경계를 넘는다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평균 3-4명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흘러 내려가다가 폭포에 떨어져 죽는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내려갔다가, 아슬아슬하게 돌이켜 올라오는 스릴을 즐기려다, 그냥 폭포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허락된 한계선을 넘어서면 거센 물살에 휩쓸려, 그냥 대책 없이 떠내려가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는 책망도 하고 경고도 하지만,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으로 용납하실 수 없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까지가 너희가 회개할 수 있고, 되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라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한계선을 넘어서게 되면, 은총 밖으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회개할 수도 없게 되고, 돌이킬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가리켜 ‘버려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경고도, 책망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앨버트 까뮈는 ‘나의 친구야, 나는 너에게 큰 비밀을 가르쳐 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날마다 생긴다’고 하였는데, 그냥 버려두는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아직 최후의 심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현재에서 버려짐으로 인해, 최후에 심판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발생적인 관계입니다. 자연발생적인 관계는 출생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무슨 계약서를 쓰거나 도장을 찍지 않아도, 태어나기만 하면 관계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자연발생적인 관계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정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성한 사람이 될 때까지 온갖 투정이나 부족한 것을 다 돌봐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어리고 아무 것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언약의 관계는 서로의 헌신에 의하여 지탱됩니다. 부부 사이의 관계같은 것은 언약의 관계입니다. 부부 관계는 서로에 대한 헌신의 관계입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약한 부분을 돌보아 주지만, 근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헌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서로 헌신적이지 않으면, 그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관계를 헌신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책임은 지지 않고, 무한정으로 용납과 희생을 강요할 때, 그 결혼은 대단히 불행한 결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자연발생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출생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하나님과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헌신의 관계에 들어가야,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행은, 바로 이 관계를 오해한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잘했거나 못했거나, 무조건 부모님이 잘 해주시고 편들어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만들어 낸 신앙이, 바로 사마리아의 송아지 신앙입니다. 이것은 마치 송아지가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희생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조건 잘되도록 해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의 특징은 송아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두 돌비의 신앙입니다. 두 돌비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신앙을, 눈먼 송아지의 번영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 자기들은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야 하고, 그들에게 복주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헌신이 없는, 번영신앙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계약적인 관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행은, 이 관계를 오해한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계약관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하나님이 끝까지 받아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 편들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이 축복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개꿈 꾸고 있는 이스라엘을 깨우라 하십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설교자는 일종의 나팔을 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나팔은 연주용이 아닌 경고용 나팔을 말합니다. 단소리가 아닌 쓴소리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닌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부담 없이 듣고 즐기는 말이 아닌, 회개를 촉구하는 아픈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교자는 인기가 없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설교자를 세워 주셨습니까? 성경이라고 하는 신앙생활 지침서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교회와 설교자를 주신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설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자로부터 어느 정도 신앙의 간섭을 받는 게 유익합니다. 신앙에 있어 독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설교자를 떠나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회중은 설교자가 파수꾼으로서 하나님 앞에 늘 깨어있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나팔은 언제 불어야 합니까?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집 위에 독수리가 떠 있으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독수리는 순식간에 엄마 품에서 멀어진, 병아리나 새끼들을 덮쳐서 낚아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원수가 독수리처럼 어떤 집을 덮칠 수 있는데, 그 집이 다름아닌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원수들이 여호와의 집을 덮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지키시는 집,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집을, 원수가 덮칠 수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호세아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능히 짐작이 갑니다. 호세아는 이런 비신앙적인 예언이요,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하나님의 집이 대적에게 짓밟힌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왜 그런가요? 그들이 잘 믿는데도 괜히 그런가요? 잘 믿는데 더 잘 믿으라고 그런가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운데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생명이고 축복이고, 율법을 저버리고 살면 죽음이고 저주다고 언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통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무렵에는, 율법이 어디 구석에 버려져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요시야 왕 때, 성전 수리하면서 겨우 발견되었습니다.
2절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그런데도 그들은 기도는 뻔질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그러나 이건 순전히 입에 발린 고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를 아나이다”고 고백은 했지만, 실제로는 주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몰라도 한참 몰랐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요일 2:3-4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급한 김에 부르짖기만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3절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사랑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선을 싫어했습니다. 물론 선을 버리기 전에, 선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나면, 사람은 표준을 잃게 됩니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합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도, 태연하게 살아갑니다. 왜요? 삶의 표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이 “이신칭의”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의인은 사람의 행위로 가능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 곧 은혜로 가능합니다. 의인이 되는 방법은 제대로 가르쳤으나, 의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소홀했습니다. 그럼 의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4절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4절부터는 지도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지도자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은 했으나, 기쁘신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걸 왕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모르는 바라고 표현했습니다. 지도자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스스로 지도자가 된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군림합니다. 백성들을 압제합니다.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쁩니다. 여로보암 왕은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해,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게 했습니다. 다음은 잘못 뽑혀져 지도자가 된 경우입니다. 백성들이 뭘 몰라서 잘못 뽑았습니다. 여론이 그쪽으로 몰아갈 때, 자기도 같이 휩쓸려 간 것입니다. 이건 백성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정이야 어떻든 그 사람이 당선되기만 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잘 안 보인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물질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인다면, 물질이 우상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욕망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인다면, 내 욕망이 우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가뒀습니다. 꼼짝 못하게 묶어 두었습니다. 마음대로 내버려두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가져다 놓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 맘대로 하고,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주일에만 제한하려고 합니다. 나머지 6일은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교회로 제한시키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만 나가면 별짓 다합니다. 하나님을 예배로 제한시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내 출장 가 있다가, 예배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분쯤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온 우주입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가정과 직장, 정치와 경제와 문화, 언론과 예술과 인터넷까지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5-6절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를 하나님인줄 알고 열심히 섬겼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한낱 우상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이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잔소리 안 하는 송아지 종교가 너무 편했습니다. 부담이 없었습니다. 회개 안 해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하니까 좋을 것만 같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파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실컷 우상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7절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심은 것보다 더 많이 거둘 때 이를 은혜라고 말합니다. 심은 것보다 더 적게 거두는 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씨앗을 심었을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된 씨앗을 심었습니다. 바람을 심었다고 했습니다. 바람이란 헛된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바람을 정성껏 심었더니, 거두는 것은 풍성한 수확이 아닌 광풍입니다. 여기서 광풍은 파멸을 상징합니다. 우상 숭배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심어도, 줄기가 없고, 열매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혹 어쩌다 열매가 맺혀도, 대적들이 다 빼앗아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되는 게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말짱 헛수고인 인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지면, 광풍을 거두게 됩니다. 말씀의 안내를 따라 신앙의 여정을 정도로만 걷기를 바랍니다.
8절 ‘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결과가, 이렇게까지 비참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도 질그릇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그 그릇들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그마한 흠집이 생겨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그릇을 깨뜨렸습니다. 여기서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은 ‘깨진 그릇’이나 ‘이빨 빠진 그릇’이란 뜻입니다. 어떤 집에 손님으로 갔는데, 만약에 이빨 빠진 그릇에 밥을 주거나 국을 줄 경우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본차이나고 한국도자기고 간에, 밥맛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빨 빠진 그릇을 자기 집 식구들이 사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는 버리거나 개밥그릇으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세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개밥그릇 신세였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왕따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겸손할 줄 모르고 되레 큰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언젠가는 너희들이 큰 코 다칠 때가 있을 것이다고 응수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 알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것이 불행입니다.
9절 ‘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홀로 처한 들나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홀로 떨어진 들나귀를 떠올려 보십시오. 친구 하나 없이 언제나 혼자입니다. 들나귀는 정착을 못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어디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딱 그 신세입니다. 하나님을 용감하게 떠나 보았으나, 바알에게서도, 아스다롯에게서도, 금송아지에게서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쉬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보면 방랑끼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끝없이 유랑합니다. 교회를 옮겨 다니다, 자칫 홀로 떨어진 들나귀 되기 쉽습니다. 한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한 나무가 거목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 이겨낸 후에야, 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거목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뿌리 깊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10절 ‘그들이 여러 나라에게 값을 주었을지라도, 이제 내가 그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지도자의 임금이 지워 준 짐으로 말미암아 쇠하기 시작하리라.’
이스라엘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쳐 생존을 유지합니다. 조공을 바치다 보니, 그 부담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커다란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은 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두고두고 짐이 되어, 결국은 어렵게 된다는 말입니다. 돈은 돈대로 주고, 아부는 아부대로 하고, 치욕은 치욕대로 당하고,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더 그렇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기울어가는 끓는 가마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고 하지만, 원 상태로 돌리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11절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래도 저래도 안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힘을 빌어, 국난을 해결해 보려는 속셈입니다. 본래 목적은 속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속죄제가 아니라 감사제와 서원제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감사로 얼버무렸던 것입니다. 구차하게 질질 짜며 회개하는 것보다, 그럴듯하게 인심쓰듯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비우는 제사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서원제를 더 선호했습니다.
12절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율법을 하나도 아니고 많이 기록하셨습니다. 여기서 “만 가지”는 실제 숫자가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왜, 누구를 위하여 기록했습니까? 분명히 “그를 위하여” 곧 하나님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의 기능이 우리를 옭아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를 복되게 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말씀을 따라 산 후에 다가오는 기쁨은, 그간의 어려움을 능히 불식시키고도 남습니다. 말씀의 굴레를 벗어나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만 없으면 신나게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굽의 굴레가 덮쳐 올 것입니다.
13절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제수용 고기를 먹는 데만 탐욕을 부렸습니다. 정작 예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읽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앗수르에 붙었다가, 애굽에 붙었다가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애굽에 종살이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4절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왕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궁들을 세우고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잊어버리다는 원어로 ‘샤카크’인데, 직역하면 “잘못 놓았다”는 뜻입니다. 항상 쓰는 물건인데, 어느 날 관리를 잘못해서 그 물건이 없어졌습니다. 한번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영원히 망각해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인생을 살 수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제단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 하시지 않는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가 되었고, 하나님 대신 인간적인 수단과 힘을,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송아지를 더 의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워진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답게 사는 것이며, 많은 제단과 많은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예배생활이며, 얼마나 많은 재능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로 하나님만을 인정하면서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보다, 그를 인정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내가 하나님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을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만, 내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내 안에 송아지가 자리 잡고 있는 한,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실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송아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 일에 분주하다고 하나님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이 아무 의미도 없는 종교 생활을 답습하는지 살펴보고, 위선과 가증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번영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며,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해 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