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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은 본래 중국의 주민족인 한(漢)족과 하북지방 유목민족간의 고대 혼혈인들을
그 뿌리로 하여 생겨났으며, 처음에는 동호(東胡)라 불리운 민족이지.
오랫동안 흉노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흉노집단과도 혈통이 약간 섞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흉노, 돌궐, 말갈족 등과는 그 태생의 근원에 차이가 있음.
참고로 동호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선비족과 오환족으로 분열되었으며,
오환족은 모용선비의 연나라 등장무렵 다시 선비족에 흡수되었지.
기원전 2세기, 한무제의 정벌로 흉노족의 세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 선비족은
내몽고지방을 장악하였는데, 이 때부터 차츰 그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함.
세기초, 사마씨의 서진왕조가 팔왕의난으로 무너지면서, 5호16국 시대가 막이 오르고,
선비족도 이 5호 다섯오랑캐 중 하나의 반열에 끼게 되었당.
이 즈음의 선비족은 크게 탁발씨(혹은 척발씨), 모용씨, 단씨, 우문씨, 걸복씨, 독발씨 등 6개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중에서 단씨, 우문씨는 오환족 쪽에 더 가깝고, 독발씨는 탁발씨에서 갈라져 나온뒤 돌궐의 피가 매우 많이 섞인 것에 반해 모용씨와 탁발씨는 가장 혈통적으로 순수 선비족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모용씨는 그 세력 또한 6부족중 가장 강성했음
모용선비와 고구려 사이의 악연은 중국대륙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감.
244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칩입했는데, 이 군대에 모용목연 (모용황의 증조부) 이 이끌던 선비족도 위군을 도와 참전한 것이 그것이지.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을 빼앗기고, 옥저지방까지 도망치는 굴욕을 겪었으나, 2년만에 충신 유유,밀우 등의 활약에 의해,
관구검이 임명한 현토태수 왕기를 사살하고 위군을 격퇴함.
모용목연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모용섭귀가 모용선비의 선우가 되었으며, 모용섭귀는 283년에 죽음.
동생인 모용내가 선우가 되었으나 2년만에 피살되었고,
285년, 숙부인 모용내를 피해 요동으로 도망쳐있던 모용섭귀의 아들 모용외가 돌아와 선우가 됨.
같은 해, 모용외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동부여 의려왕을 자살케 함.
모용외는 고구려와 자주 충돌했고, 고구려 봉상왕때인 296년에는 서천왕의 무덤을 도굴 및 파헤치는 만행을 했을 정도로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으나
결국 수차례에 걸친 모용외의 고구려공격은 고구려의 맹장 북부대형 고노자(高奴子)에 의해 번번히 모두 격퇴.
307년에 모용외는 팔왕의난으로 개판된 서진왕조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선비대선우를 자칭하였고, 주로 우문씨, 고구려
등과 전쟁을 벌이다가, 끝내 요동을 차지함.
319년 고구려 미천왕 을불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고, 모용외를 손좀 봐주려 했으나 승패가 쉽게 안남.
이 후, 미천왕은 선대의 오랜 앙갚음을 하려는듯 정말 끈질기게 공격하여 모용외를 괴롭혔고,
모용외는 그때마다 주로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내 고구려군을 막게하였는데 이 중 아마 모용황도 끼어있었을 듯.
333년 모용외 뒤짐.
아들중에 모용황이 선우가 되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을 하나하나 다 쳐죽이고, 국내정국을 안정화시킨뒤
337년에는 아버지 모용외가 행했던 동진 사마씨 에 대한 종속관계도 끊어버림.
마침내 스스로 연왕을 칭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전연(前燕)임.
모용황은 단씨를 멸망시킨 후조황제 석호와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342년에는 수도를 용성으로 옮긴 뒤
겉으로는 자신에게 동맹을 청하면서도 뒤로는 동진,후조 등과 내통하여 자신의 후방을 교란하던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
고구려 고국원왕 (미천왕의 아들) 사유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정병5만을 아우인 고무 에게 주어
북쪽을 방비케 하고, 자신은 남쪽길에서 지켰는데, 남쪽에서 모용황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환도성을 빼앗김.
다 알다시피 모용황은 모용외시대에 자신들을 괴롭힌 미천왕 을불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까지 가져가고, 왕모와 왕비등
고구려백성 수만명을 포로로 끌고 돌아갔지. 이듬해인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고무를 사신으로 보내 국서에서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는
굴욕을 감내한 끝에 부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나 왕모를 돌려받는데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야 했음.
이후 344년에는 우문씨를 멸망시켜 흡수하는 등 위세를 떨치던 모용황은 348년에 낙마사고로 머리를 다친뒤에 뒈짐.
차남인 모용준이 뒤를 이어 제2대 경소제가 됨. 연왕칭호 내다 버리고 드뎌 황제를 칭했으며 아버지 모용황에게도 문명제라는 시호를 올림.
그는 후조를 찬탈한 염위(冉魏)를 멸망시키고, 부씨의 전진(前秦), 사마씨의 동진 등과 대립하다가 360년에 꼴까닥.
모용준이 죽고, 그의 삼남이었던 제3대 유제 모용위가 즉위했는데 나이가 11살 꼬맹이라 황제의 숙부인 모용각이 섭정을 함.
이 후, 366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황의 동생이자 황실의 어른이었던 모용평이 뒤를 이어 섭정이 되었지.
황제 모용위는 여전히 뒷방 꼬맹이신세;;
근데 모용평은 조카 중에 가장 전공이 뛰어난 모용수(모용황의 5남)를 견제하고 두려워하여 죽이려 했음.
369년에 동진의 재상 환온이 이끄는 북벌군까지 격퇴한 모용수, 더욱 인기가 슈퍼스타급이 됨.
결국 모용평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전연땅을 떠나 전진황제 부견에게로 망명함.
전진의 부견은 전연이 동진의 공격을 받을때 구원군을 보내주었으나 그 보답을 하지 않았다는 쪼잔한 개드립을 구실로 하여
왕맹을 사령관으로 보내 전연을 공격. 결국 370년 전연멸망.
황제 모용위는 장안으로 부견앞에 끌려갔으나 신흥후에 책봉되어 잘먹고 살다가 나중에 부견의 죽음에 관여되었다하여 384년에 살해됨.
세월은 흘러 383년, 당시 화북지방을 통일한 북방의 맹주였던 전진황제 부견은 천하통일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쪽의 동진을 정벌하기위해 100만대군을 일으킴.
이 역사적인 비수대전을 일으키도록 옆에서 부견을 부채질하고 전쟁찬성한 장본인은 바로 모용수;;
결국 비수대전에서 한줌도 안되던 동진의 사현한테 어이없게 개박살나고, 부견은 도망치다가 부하였던 요장한테 붙잡혀 살해됨.
북방을 통일했던 전진제국이 비수대전 참패 하나로 순식간에 와해되자
화북지방은 또 다시 개나소나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기 시작함.
여기에 한몫 가담한 것은 모용선비, 탁발선비 등도 예외가 아니었지.
384년 모용홍, 모용충 형제는 관중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연(西燕)을 세웠고,
모용수 또한 반란진압을 명 받고, 출진하였다가 지 스스로도 반란을 일으켜;;
연왕에 즉위하여 후연(後燕)을 세운 뒤, 부견의 아들 부비가 지키는 업성을 공격하여, 385년에 함락시켰으며,
1년여 사이에 황하이북을 대부분 장악하였고, 386년에는 지 형이 그랬던 것 처럼, 연왕칭호 내다버리고,
중산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를 칭함. 그놈의 연왕은 어짜피 갖다버릴거 왜자꾸 칭하는지 모르겠어;
한편 고구려왕 이련 (고국양왕)은 이 혼란을 틈타 385년에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성, 현도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모용수의 반격으로 반년만에 도로 빼앗김. (여름에 먹은 성, 그해 겨울에 뺏김;;)
모용수의 후연과는 달리 서연은 제위다툼으로 몸살을 앓아 386년 한해동안에 5명의 황제가 살해되는 등 황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막장드라마 연출.
마지막 승자 모용영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또한, 393년에 모용수의 공격을 받아 이듬해에 포로가 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서연은
10년도 못채우고 후연이 꿀꺽함.
395년, 탁발선비를 통일한 탁발규가 세운 북위제국이 강국으로 성장하자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보내 북위를 공격.
그러나 참합피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후연군대는 몰살되었고, 격노한 모용수는 태자를 뒤지게 패고, (아마도..팼을거야..아마....)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공격함.
모용수는 평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긴했으나 지난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자국 군대의 해골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워버림.
이로인해 본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진중에서 사망함.
뒤를 이어 모용수의 4남이자 태자였던 모용보가 황제로 즉위했다.
워낙에 좆밥으로 보였는지 즉위하자마자 북위 탁발규의 침공을 받음.
게다가 황위를 노리고 대장군 모용린이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수도를 중산에서 용성으로 옮김.
북위의 군세가 다소 약화되자 업성을 지키던 모용덕(모용황의 막내아들)이 모용보에게
남쪽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여 모용보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중원쪽으로 남하했으나 중간에 병사들이 모반을 일으킴.
모용보는 자신의 아들중 서장자인 모용성과 함께 용성으로 피신했으나 용성에서 다시 모용농이 반란군에 가담하는 바람에 성이 함락.
아들과 함께 다시 용성을 탈출, 업성으로 향했으나 그 사이에 이미 남연(南燕)을 세워버린 모용덕에 의해 입성을 거부당함.
괜히 군대 끌고 나왔다가 왔다갔다 똥개훈련만 하다 갈 곳이 없어진 모용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용성으로 향했고,
아들인 모용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난한의 꾀임에 속아 성안으로 유인된 뒤, 살해당함.
모용성은 복수를 위해 난한에게 위장항복하였는데, (사적으로 모용성은 난한의 사위였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
지략이 뛰어났던 모용성은 난씨형제들을 이간질하여 불화를 조성한 뒤
반란을 일으켜 난한과 그 일족을 주살하고, 398년에 후연 3대황제로 즉위함.
한편 396년 이후, 후연과 고구려는 우호관계로 전환되어 있었는데,
400년에 이르러 모용성은 광개토왕이 남쪽 신라땅에서 왜군과 싸우고 있는 사이, 고구려의 뒤통수를 때려
수백리의 영토를 넓혔으나 이듬해에 용성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 부상을 입고, 사망함.
모용성이 죽자, 그의 숙부중, 즉 모용수의 아들 중 하나였던 모용희가 즉위함.
그는 400년 고구려공격 당시 선봉에 섰던 인물로써, 그 용맹함이 아버지 모용수에 비견되었다 함.
402년에 이르러 이때부터 고구려 광개토왕은 수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대적인 보복공격을 실시.
고구려군은 숙군성, 요동성, 연군, 목저성 등 후연의 요충지를 하나하나 깨뜨리며, 요동땅도 점령함.
405년, 모용희는 고구려에 빼앗긴 요동을 되찾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또 다시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에 떡실신함.
407년, 모용희의 황후 부씨가 죽었음.
모용희는 용맹하긴 하였으나 성질이 난폭하였고, 사치스럽고 허영심이 많은 황후를 지독히도 사랑하여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국내에 내심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았는데
황후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못한 모용희가 장례식때 직접 상여를 메고 용성밖으로 나갔고, 그 틈을 타서 풍발이 모반을 일으킴.
풍발은 자신과 두터운 친분관계에 있던 모용운을 추대하여 황제로 세움.
모용희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을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결국 모가지 날아감.
새로 황제가 된 모용운 (모용보의 양자) 은 자신의 원래 성씨인 고씨로 다시 성을 바꾸었고
같은 동족인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이때부터를 북연(北燕)이라 함.
본래 고운의 할아버지는 고국원왕때 연나라로 끌려온 고구려인이었으니 선비족이 아닌 고구려인이
연나라의 황제가 된 셈이지. 드라마에 고운 아버지랍시고 나오는 개연수는 그냥 작가의 개드립이고;;
하지만 고운은 불과 재위 3년째인 409년에 총애하던 신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뒤를 이어 풍발(북연 문성제)이 21년간이나 즉위한 뒤, 430년에 죽었음.
한편, 모용덕이 세웠던 남연은 405년에 모용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제2대황제 모용초 (모용덕의 조카) 가
410년에 무리하게 동진을 공격하다가 후에 송나라를 세우는 유유에 의해 격파당하고 역으로 공격당하여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함.
북연에서는 풍발이 죽자, 풍발의 아들 풍익과 풍발의 동생 풍홍간에 제위다툼이 일어났는데,
풍홍이 조카들을 모두 쳐죽이고 승리하여 제위에 오름.
하지만 풍홍은 탁발씨의 북위왕조로부터 압박을 받아 결국 436년에 우호국이었던 고구려로 망명.
고구려로 온 풍홍은 지 과거를 잊지못하고 거만하게 굴었고, 더군다나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
유씨의 송나라와 내통을 꾀했기 때문에 장수왕의 명령에 의해 438년에 가족과 함께 주살됨.
이로써 일괄적으로 연(燕)의 국호를 쓰던 모용선비의 나라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갤함.
모용씨(연)->탁발씨(북위)->우문씨(북주)->수나라->당나라 로 이어지는 중국북부 선비족시리즈 차기 주인공은 탁발씨에게로 바통터치 됨~
뭐 어짜피 최후결론은 한족에 동화됨 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서지방에 남아있던 선비족들은 나중에 거란족의 조상중 하나가 되었다함.
출처: https://hushou.tistory.com/724 [YOU LOOK HAPPY TO MEE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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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편안히 잘 주무셨는지요.
설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되돌아왔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어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알차고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명절 설 연휴를 즐겁게 잘 보내셨는지요?
하루에 300천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해보세요,
인생이 바뀔테니까요, 당신 때문에 힘들어요 보다,
당신 덕분에의 감사합니다. 라고 항상
감사의 표현을 웃음과 함께 전달 할 때 자신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하답니다.
오늘도 감사와 칭찬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