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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
적어도 후기 인도 출전의 인용들에 의거하면 가장 중요한 여래장 계통의 경전은 『승만경(勝?經, ?r?m?l?
dev?si?han?da S?tra)』일 것이다. 『승만경』은 본래 3세기경 남인도(Andhra) 데칸 지역에서 성립된 것으로
대중부(大衆部, Mah?sa?ghika)의 경전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승만경』은 소승의 성자들과 정각을 이룬 붓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묘사하고 있다. 아라한과 독각승은 업을 소멸시키지 못했으므로 윤회하게 될 것이며, ‘열반의
세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Buddhahood; Wayman and Wayman 1974: 80 이하).
여래장은 붓다만의 영역이며, 소승의 성자들은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논리와 사유의 경계 밖에 있는
것이다(앞의 책: 96). 『승만경』에 따르면 “여래장이 번뇌장(煩惱障)에 덮여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여래의 법신(法身)은 이 번뇌장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앞의 책) 법신은 붓다의 법신, 즉 ‘진리의 몸’은 바로 붓다 그 자체, 진실한 붓다이다. 다시 말해서 법신은
일반적으로 (적어도 대승불교에서) 존재의 진실하며 궁극적인 실재 혹은 상태를 말 한다. 법신은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시작도 없고 창조되거나 태어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영원하며
견고하고 평온하며 상주한다. 본래 청정하며 모든 번뇌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갠지스 강가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불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 불성들은 원만하고 자유자재 하며 또한 불가사의하다.
이처럼 여래의 법신이 아직 번뇌장에 덮여 있는 것을 여래장이라 부른다.
(Wayman and Wayman 1974: 98)
따라서 이 경에서 ‘여래장’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번뇌 속의 영원한 ‘법신’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법신’은 아무런 속성도 없는 절대가 아니라 오히려 무수한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승만경』의 핵심 구절을 인용하자면 여래장은 공(空)한 것이지만 이 공은 자성을 부정하는 중관적 의미의
공이 아니다.
오히려 여래장은 추상적이며 해탈되지 못한 지식(혹은 ‘해탈로 이끌지 못하는 지식과는 동떨어진 것’;
Chang 1983: 378)인 모든 번뇌장이 공한 것이다. … 여래장은 원융하며 불가사의하고 갠지스 강변의
모래보다도 많은 불법이 공한 것이 아니며, 해탈의 지혜이다. (앞의 책: 99)
여기서 ‘공하다’는 것은 유식에서 기초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기초는 깨닫지 못한 중생인가
아니면 깨달은 존재인가에 따라 ‘여래장’ 혹은 ‘법신’으로 불린다. 여래장은 불변하고 견고하고, 영원한
실체라고 말해진다(앞의 책: 104-5). 이것은 또한 윤회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예를 들어 『바가바드기타(Bhagavad G?t?)』 같은] 힌두교 전통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
여래장은 실제로 태어나거나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세속의 관점에서는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의 책). 더구나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고통을 피하고 열반을 추구하는 갈망이나 열정 또는 동경이 있을
수 없다(앞의 책: 105).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여래장이기 때문에 열반을 향한 열망의 기반이 여래장인 것이다. 일상적 의식의
무상한 흐름 속에는 경험과 기억(경험을 통한 앎)도 있을 수 없다(앞의 책: 105-6). 그것은 경험을 통합하고
그에 수반하는 정신적인 교훈들을 이끌어 내는 어떤 불변의 존재가 필요하 다는 것을 내포한다. 혼탁한
윤회의 세계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여래장이 바로 윤회의 기반이다.
여래장은 자아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영혼이나 인격도 아니다. 여래장은 자아가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삿된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들, 공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아니다. …
(Wayman and Wayman 1974: 106)
그러나 법신은 “영원함[常 또는 ‘초월적인 영원함’ 등]의 완성, 기쁨[樂]의 완성이며, 자아[我]의 완성이고,
청정함[淨]의 완성을 가진다. 이와 같이 보는 모든 중생은 여래의 법신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앞의 책: 102)
여래장이란 깨달은 상태에서는 완전한 자아를 지닌 법신과 동일한 존재에만 주어진 명칭이기 때문에
윤회하고 이기적인 존재에게는 자아가 아니다. 깨달은 경지에서 보자면 이 동일한 ‘존재’를 진리 또는
초월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승만경』에서는 번뇌에 가려지면 윤회하고 본래의 청정함을 깨우치면 열반인 이 본체가
사실은 본질적으로 청정하며 빛나는 의식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앞의 책: 106-7). 이 의식은 본래
순수하며 결코 오염되지 않지만 그 외면에 있는 오염이 속박의 원인이다. 이것은 붓다나 뛰어난
보살들만이 신비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17) “본래 청정한 의식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본래 청정한 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또한 그 의식이
더럽혀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앞의 책: 106-7)
대승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parinirv??a S?tra)』 ―이름은 같으나 대승경전에 속하지 않는
팔리어경전 『대반열반경 (Mah?parinibb?na Sutta)』과 혼동하지 말 것―은 『여래장경』과 대조 적으로
경전의 성립사가 대단히 복잡하여 다수의 판본이 존재하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이다.
이 경전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현재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기원이 매우
불분명한) 한역 경전의 마지막 장에서 상대적으로 정신적 기반이 전무한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
제4장 참조), 즉 유식에 의하면 깨달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약하고 악한 사람들도 여래장, 그리고
불성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설하고 있다.
모든 중생들은 누구나 (한역 경전에 들어 있듯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중국에 소개되자
일단의 움직임이 특히 도생(道生, Daosheng, Tao-sheng, 360?-434년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에서
나타났다. 도생은 『대반열반경』의 앞장에서 ‘구제불능의 존재로 일천제’를 말했을지라도 이미 모든
중생들은 결국 불성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단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전의
뒷부분이 번역되자 그에 대한 오명이 풀렸고, 그의 지혜와 식견은 칭송받게 되었다.
이 『대반열반경』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여래장, 즉 불성이 자아, 즉 아트만(?tman; 참고 문헌들은
Zimmermann 2002: 83, n. 176을 보라)과 다를 바 없다는 대담한 주장을 편 것이다. 이것은 여타의
경전들이 여래장과 혼동의 여지가 있는 ‘자아’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자아’는 여래장을 의미한다. 불성의 요소는 모든 중생들에게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온갖 번뇌로 가려져 있어서 중생들은 그 존재를 볼 수 없다.
물론 이 자아는 비불교도들 또는 사악한 ‘거리의 부랑자’들이 주장하는 세속적인 의미의 자아가 아니다.
붓다는 집착과 소유의 근본이 되는 이기적인 자아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편 것이다
(Ruegg 번역, 1973: 81-2을 보라).
이처럼 방대하고 이질적인 교설이 섞여 있는 『대반열반경』에서 붓다는 오히려 이교도를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래장을 자아라고 가르친 듯하다. 비불교도인 일부 수행자들은 붓다에게 만일 붓다가
무아를 설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를 따르겠다고 말한다. 붓다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중생이 자아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불성이 자아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나는 허무주의적인 교설을 설하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 붓다가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 부정(不淨)을 설한 까닭은 중생들이 불성(佛性)을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허무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는 실로 무아가 자아이며, 실로 자아가 무아라고 설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중생들을 돕기 위한
방편이다.
여기서 불성은 사실 무아인 셈이지만, 전달의 방법상 자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1) 무아이지만 자아라고 상상하는 것. 2) 자아이지만
무아라고 상상하는 것. 3) 무아에 대해 명상하는 것,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자아가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무아이며, 나아가 여래장이라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상하는 것(147a를 보라).
붓다는 어떤 상황에서는 무아를 가르치며, 또 다른 상황에서는 자아를 가르친다. 그러나 정확히
『대반열반경』에서 말하는 자아는 모든 중생들에 내재하고 있는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이상으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Liu 1982: 특히 82 이하)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중생에게 실제 존재, 영원한 요소[티베트어로는
양 닥 껨(yang dag khams)]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중생이 붓다가 될 수 있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사실 자아에 대한 집착과는 정반대인―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인도 학파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자아에 대한 요구를 다분히 충족시키고
있다.
이것을 실재, 진실 혹은 초월적 자아라고 부르든지 혹은 그런 비물질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흥미 있는
점은 이 경전(비록 일부 다른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과 결합되어 있지만)에서는 특히 이 요소를 ‘자아
(?tman)’라는 말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반열반경』에서 이 불교의 무아적 전통을 적어도 선언적인 표현으로써 상당히 자의적으로
수정하거나 비판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초기불교에서는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常]으로 보는 견해와
고(苦)를 낙(樂)으로 보는 견해, 무아를 아(我)로 보는 견해 그리고 부정(不淨)을 청정으로 보는 네
가지의 주요한 전도(顚倒)된 생각을 비판해 왔다.
『대반열반경』은 여기서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 틀렸음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다시 말해서 아직
깨닫지 못한 부정한 세계와 대비되는 불성의 긍정적 요소를 보지 못하고 영원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낙(樂)을 고(苦)로, 자아를 무아로, 청정을 부정으로 잘못 인식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고전적인 힌두교 문화가 맹위를 떨치던 굽타왕조의 산물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힌두교의 르네상스가 불교에 미친 또 다른 위기의 예들을 볼 수 있다(Nakamura
1980: 213- 14). 이 시점에서 힌두교가 불교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구미가 당길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 영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대부분 쉽게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의 전통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른 전통을 자신의 언어로 의미 있게 재구축할 수 있을 때만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영향을 미친 전통이 그것을 수용한 전통 속에 거의 포함되지만 수용한 전통의
전체적 방향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열반과 붓다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이 불교 전통 속에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며, 이것은 선정에서
발견되는 경험의 핵심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붓다가 비불교 수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대반열반경』의 구절은 이 경전 자체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불교가 반드시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nta)학파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범아일여
(梵我一如)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은 잘못일 것이다. 『대반열반경』에서 실로 무아인 그 자아는
불이(不二)인 브라만[梵]과 동일한 것이 결코 아니며, 게다가 이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아드바이타
베단타학파의 개조(開祖)인 가우다파다(Gau?ap?da, 7세기경)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오히려
가우다파다가 불교로부터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은 확실히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에서 전개된 사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