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밥벌이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빚은책들 2022.
노동자의 자리는 왜 없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노동자는 경제학 교과서에 언제 등장할까? 노동자는 여가와 소득 사이에서 만족 극대화를 추구하는, 소비자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니면 생산의 3요소, 즉 노동-토지-자본 중 하나로서만 등장한다. 노동을 ‘인적자본(Human capital)’으로 보는 경우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자본을 소유하고 그 자본(노동력)을 투자하여 이익을 얻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벤처 정신을 지닌 ‘기업가’가 되라고 진지하고도 순진하게 충고(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비난이나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다!)하는 정치인이나 자수성가한 기업가는 역설적으로는 경제학 교과서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요즘 대학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각종 창업 강좌가 열린다. 심지어는 정규 교과목으로 열리기도 한다. 그러한 강좌는 물론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그러나 한 학기 내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만 강조하는 강의를 듣다 보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려 한 자신이 마치 루저가 된 듯한 열패감에 젖는다고 호소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실 ‘담론의 정치적 효과’라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숨어 있다.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물론 비정규직이고 불안정한 취업 형태다)을 자산관리 매니저, 파이낸셜 플래너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좋은 예다. 미국의 어떤 은행에서는 그저 일상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결정 권한밖에 없는 중간관리자급 직원에게 부사장보(Assistnt vice president)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붙여주기도 한다. 물론 대중목욕탕의 때밀이를 세신사라고 부르듯이 보통 사람들이 기피하고 ‘천하다’고 생각하는 직종에서 차별과 편견을 제거하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사용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담론들은 현실의 모순을 덮어 감추거나 본질을 흐리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해고를 의미하는 구조조정, 가격인상을 의미하는 가격현실화, 임금동결 때로는 삭감을 의미하는 경영합리화……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경제’에 기여한 바를 참작하여(심지어는 경제를 살리라는 의미에서) 실정법을 위반했지만 사면받는 재벌 총수들의 판결문에서 말하는 경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저 특권층이라서 사면받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근거이자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둔사(遁辭)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누가 이익을 볼까
할리우드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던 표현 중에 ‘콜래터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보통 ‘부수적 피해’라고 옮긴다. 전쟁 중에 발생하는 민간인 살상을 나타내는 군사 용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전쟁이 일어나면 실제로 전쟁을 결정하고 사회 전체를 광기로 몰아넣은 지배자보다, 누가 정권을 잡건 어느 나라가 이기건 팍팍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민간인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를 가리키는 표현이 부수적 피해다.
이로써 전쟁의 참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민족해방’,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핵심적’ 목표에 가려진다. 민간인이 입은 피해를 ‘양민학살’로 바꿔서 표현해보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피해를 일으킨 주체가 누군지 설명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주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어법은 일반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거짓말할 때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엄마가 외출한 사이 놀다가 유리창을 깨트린 아이는 엄마가 돌아오자 울면서 말한다. “유리창이 깨졌어요.”
“내가 장난치다 유리창을 깨트렸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유리창이 깨졌니?”라고 엄마가 추궁하면 아이는 대답한다. “혼자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깨졌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부수적 피해’는 미군이 일으킨 것일 수도 있고 오사마 빈 라덴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개념 또한 이 ‘부수적 피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면 시장의 조정 과정을 통해 균형이 회복된다”와 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회복의 주체는 ‘균형’이다. 이렇게 서술하는 까닭은 경제학이 과학이려면 실증적인 명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증적’이라는 것은 ‘세상은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세상은 이러하다’라고 설명하는 것이고, 더욱 이 경험적 증거로 맞고 틀리고를 검증할 수 있는 주장을 의미한다. 문제는 ‘세상은 이래야 하다’라는 선입견으로부터 ‘세상은 이러하다’라는 판단이 과연 자유롭게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더구나 그 세상이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감안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시장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구매자와 판매자들이 모여서 거래하는 장소다. 물론 시장이 개개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균형으로의 조정 과정’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균형은 무엇인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처럼 묘사된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과정임이 강조된다. 그런데 균형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 경제학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19세기 이후 경제학이 물리학을 닮으려고 무진 노력했다는 과학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물리학자는 연구를 하면서 빠른 속도로 서로 충돌하는 원자들의 ‘고통’을 염두하지 않는다. 그러나 케임브리지의 여성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이 말했던 것처럼 ‘경제학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인간이 수행하는 학문’이므로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학 용어가 현실을 감추는 건 아닐까
주체를 모호하게 얼버무리면서 중립적인 단어로 현상을 묘사하는 담론 전략은 의도했든 안 했든 경제학 교과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며, 다시 경제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전략이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분야가 바로 ‘노동’과 관련된 분야라는 사실이다.
‘노동 유연성’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는 ‘노동 숙련의 유연화’라든가 ‘노동력 재생산의 유연화’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경영자 단체나 경제신문 등에서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만 의미한다. ‘유연하다(Flexible)’라는 말은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에 뻣뻣하게 경직돼서 좋은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몸도 생각도 유연하면 좋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결국 채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의미한다. 더 현실적으로는 ‘노동자를 쉽게 자를 수 있는 자유’라는 의미다. 당연히 해고라는 행위의 주체인 자본은 숨고 해고 대상인 ‘노동’이 유연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양민학살’이라는 말을 ‘양민의 유연화’라고 표현하는 것과도 같다.
새로 부임한 경영자가 말한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겠습니다.” 종업원의 머릿속에서 이 말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 중 누군가를 자르겠다는 말이구나.” 경영자의 말에서 지극히 중립적인 어감인 ‘구조’라는 명사는 ‘노동자’와 같은 말이고, ‘조정’이라는 동사적 의미를 담은 명사는 ‘해고’와 같은 말이다. 일본인들은 직장에서 ‘잘렸다’라는 말을 ‘리스토라당했다’라고 말한다. 아마도 ‘Restructuring’에서 유래했을 표현이다. 일본인은 본인의 해고를 말 그대로 ‘구조조정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동조합의 구호에는 편향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반면 그에 못지않게 편향된 ‘구조조정’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당연히 이 세상 그 무엇도 비효율적이기보다는 효율적인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경영의 효율성 제고’라는 말은 압도적으로 임금 삭감, 사실상의 근무 시간 연장 등을 가리킨다. 오너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려고 저지르는 갖가지 편법과 불법 같은 ‘비효율적’ 행위는 경영 효율성 제고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통상 자본 측과 맞서고 있는 전투적 노동조합이나 진보적 언론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시하거나 심지어 약간 과장하는 담론 전략으로 맞선다. ‘족벌 경영’이라든가 ‘해고는 살인이다’ 같은 말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발상을 뒤집어 자본에 대해 중립적인 어감인 용어들을 전략적으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재벌 2세에게 경영권을 억지로 물려주는 경우에 이를 ‘편법 상속’이라고 부르는 대신, 물려주지 않는 경우를 ‘능력본위 경영’이나 ‘경영 구조 합리화’라고 부르면 어떨까? 비리를 저지르고 사면 받은 재벌 오너가 ‘사재 출연’을 한다고 말하지 않고 ‘재산 구조조정’이라 말하는 것은 또 어떨까? 억지스럽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말을 이렇게 바꿔보면 평소 노동에 관한 용어가 얼마나 사용됐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서글픈 것은 내가 주장한 용어법이 확산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 구조 자체가 그렇게 형성돼 있지 않다. 어떤 사회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구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 안에 있는 다양한 세력 사이의 힘을 반영하여 형성되고 보급된다. 대항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갖은 압력이 가해진다. 그러므로 적어도 지금 한국 사회를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로 나눠 보면 노동을 배제하는 이데올로기, 그 담론 구조가 정착돼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한국 사회의 특수한 사정 때문만은 아니며 경제학 교과서 자체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 탓이기도 하다.52-59
표면적 언어 | 실제 뜻 |
노동 유연화 | 더 쉽게 해고하겠다 |
구조조정 | 단체로 해고하겠다 |
효율성 제고 | 임금을 삭감하겠다 |
자발적 실업 | 그 돈 주고는 고용하지 않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