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1:1~8 영원히 주의 장막에 2021. 7. 21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1)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7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표제어를 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입니다. 다윗의 시편이라고 하는데 배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시의 배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시의 내용을 보면 그 배경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약해진 자가 땅끝에서부터 간구합니다. 간구의 내용은 서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서원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서원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서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서원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기를 원하는 겁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주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기 전에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는 누구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습니까? 어느 가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 년 살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백 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좀 좁혀서 우리 교회 교인들과 영원히 함께 그것도 한방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벌써 계산기가 돌아갈 겁니다. 누구는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고 누구는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함께 있기는 하지만 멀찍이 또는 가까이도 계산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내 중심의 선악 판단이기에 죄라는 말입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선악 판단이 무너져야 함께 살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가 무언지 알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자기 죄가 더 커 보이기에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기억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겁니다. 잊어야 할 일들은 기억이 나고, 기억해야 일들은 너무 잘 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기억조차 사실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재편집되어 기억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경치를 보아도 기억은 다르게 저장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도 서로 기억이 달라서 말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장막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이사야 65:17~19절입니다.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의 기억도 종말이 있습니다. 이런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여기서 맛을 본 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영원한 기쁨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 마음이 약해질 때, 땅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는 상황입니다. 적에게 쫓기든지 아니면 아들의 반역으로 쫓기든지 마음이 약해질 때로 약해진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땅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에 나갈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이럴 때 자기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 바위 위는 안전한 곳이지만 그런 바위에 올라갈 힘이 없기에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만약에 다윗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면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 바위를 야곱의 사닥다리로 말하기도 합니다(창28:12). 야곱이 형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자는 중에 꿈에서 본 사닥다리입니다. 땅과 하늘로 연결된 그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영원히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닥다리에 우리가 올라갈 힘이나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닥다리가 우리에게로 내려와서 우리를 이끌어 올리셔야 됩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야곱이 본 그 사닥다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1). 그러므로 오늘날도 택하심을 입어 주께 부르짖는 자들은 이 세상의 피난처가 아닌 영원한 피난처, 곧 십자가를 찾게 되는 자들입니다.
본문 3~4절도 위의 번역을 봅니다. “3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4 내가 영원토록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습니다. (셀라)” 나의 피할 바위, 피난처, 견고한 망대는 다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 피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거처가 든든하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으면 세상에서 원수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함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 피하여 들어갑니다.
주께 피하여 들어가서 잠시만 그곳에 머물다가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나오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피하여 들어간 주의 장막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합니다. 주의 장막을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여 들어간다고 합니다. 주의 날개란 이미 앞에서도 본 내용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온 일을 보아스는 주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룻2:12). 룻이 모압 땅에서 잘 먹고 잘살았다면 그곳에 머물러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시집온 집안이 완전히 망하는 일을 보고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믿고 나오미를 따라온 것은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모습이 어떤지 보여줍니다.
시편 84:1~4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의 장막에 거주하기를 너무 사모하여 쇠약하여진다고 합니다. 사모하며 쇠약하면 상사병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깃들여 사는 참새와 제비가 부럽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님께서 나의 서원을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다윗의 서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는 서원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약하여지고 땅끝까지 도망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일시적인 피난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다고 합니다. 주께서 주신 기업을 이미 받았다고 합니다. 그 기업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함께 살아주시는 것이 영원한 기업입니다.
창세기 15: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방패이며 영원한 상급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보호자가 되시고 영원한 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상을 받는다는 말은 영원한 하나님을 받는 겁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커다란 장막을 만드신 겁니다. 그 장막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며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버지가 있는 이 관계 속에 자기 백성들도 함께 참여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업을 다윗은 이미 다윗 언약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도 완료형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7:27~29절입니다.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 언약의 결론 부분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목동에서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궤는 휘장 가운데 있기에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 내 집을 지으라고 한 적이 있느냐고 하시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고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전하자 다윗이 한 말이 위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준다는 말씀은 다윗의 왕조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조도 바벨론에 의하여 끊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신실하시기에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십니다. 그 왕위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가지는 왕의 체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말 구유에 태어나시는 방식으로 왕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고 야곱의 집을 다스리게 하실 것인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겠다고 서원하고 응답받은 내용도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6~8절입니다.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말은 단지 자신의 장수를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 내용은 이어지는 말씀에 나옵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겠다는 겁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다윗의 능력이나 자격이 아닙니다. 주께서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여 보호하여 주심으로 가능합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언약 적인 사랑이며 진리란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말합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합니다. 그 서원이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장막에 영원히 거하게 되면 영원히 주를 찬양하는 겁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상황은 마음이 약하질 때입니다. 그 상태를 지리적인 표현으로 땅끝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더는 땅에 희망이 없을 때, 아무도 없는 고독한 지경이 마음이 약하고 땅끝이라는 표현입니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함께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럴 때 주께 부르짖어 나보다 높은 바위에 인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견고한 망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시편에서 주님이 눈에 보이는 피난처와 망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의 장막과 주의 날개라고 하는 것은 광야든, 산이든, 동굴이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그런 사람을 보면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치 룻과 같은 모습입니다.
본문 5~8절입니다. “봉독” 겉으로 보면 아무런 기업도 없어 보이는데 이미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다고 합니다. 시편에서 자주 본대로 분위기가 급전된 내용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쫓겨 다니는 중인데도 자신은 영원한 기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기에 이런 선물을 받은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이 임하여 한 믿음을 고백하게 되면 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소망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보이는 견고한 망대와 피난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여 주시는 겁니다. 주의 인자함,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신실한 그 사랑을 받는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찬송함이 서원을 이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자들은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재산이나 건강입니까? 친정이나 시댁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런 것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합니다(삼하7:14). 그리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그때 나오는 찬송이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는 찬송입니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11~14절입니다.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3)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4)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기업이란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업이 주님이라면 주님의 기업도 우리가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골로새서 1:12~17절입니다.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모든 만물을 주님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만물 중에 심히 타락한 우리가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아 그의 기업이 되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다윗도 받았기에 영원히 주의 장막에서 주를 찬송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와 진리를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며 그들이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주를 찬송하는 자들이 주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어도 주님이 나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기에 찬송할 수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영원히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