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양진金楊震(1467~1536)|
유명 조선국 가선대부 공조 참판 김 공의 묘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嘉善大夫工曹參判金公墓碑銘 幷序] _ 정사룡鄭士龍∙
공의 관향은 안동부 풍산현豐山縣에서 나왔는데, 시조 이후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고조부 안정安鼎은 고려 말에 벼슬하여 관직이 삼사좌윤에 이르렀고, 증조부 자순子純은
군기시 직장으로 좌통례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종석從石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병
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손徽孫은 진산 군수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
며, 돈령부 동지사 민효열閔孝悅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이 맏아들이다. 증조부에
서 아버지까지 추증의 은전이 내려진 것은 모두 공이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의 이름은 양진楊震이고, 자는 백기伯起이다. 아홉 살에 능히 글을 지어 사가四佳
문충공文忠公 서거정徐居正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 골상骨相이 끝내는 재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 들어가서 이름난 선비들과 어울렸는데,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과 교리를 지낸 권달수權達手 등이 모두 당시에
가장 저명한 사람이었다.
기예를 이루고 행실이 빼어났는데, 기유년(1489) 진사시에 4등으로 합격하고, 정사년
(1497)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주서로 옮겼는데, 당시 외종
형 홍한洪翰이 승지였기 때문에 친척이라고 피혐避嫌하여 상의원 직장에 옮겨 제수되었다
경신년(1500)에 부친상을 당하여 계해년(1503) 가을에 삼년상을 마치자 홍문관 부수찬
에 제수되었다. 이때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尹氏에게 묘호廟號∙1를 추숭追崇∙2하려
고 하자 온 조정이 들고 일어났지만 바로잡지 못했는데, 공도 논의에 참여하면서 유독
힘써 간쟁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렀다. 결국 이 사건에 연좌되어 감금되었고 함께 논의하던
13인도 모두 감옥에 갇혔는데, 공은 온갖 매질을 당했으나 끝까지 말을 굽히지 않았다.
하루는 바깥에서 알려오기를, 갇힌 사람을 모두 곧 사형에 처하기로 하여 이미 형거刑車
14대가 도착했다고 하자 같이 들은 사람들 중에 더러는 얼굴빛이 변하여 눈물을 흘렸
고, 모두 술을 실컷 마시고 인사불성인 채로 명령을 기다렸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하며 웃는 것이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
조금 뒤에 주동자들은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멀리 귀양을 보내어 공도 경상도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고을 사람과 함께 장기를 두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금오랑金吾
郞(의금부 도사)이 급전急傳을 가지고 왔다고 부르짖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공은 평온하게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는데, 두려워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착수하여 승부를 결정지었다. 잠시 후에 들으니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하였는데, 용재容齋 이행李荇은 일찍이 공은 철석간장鐵石肝腸을 가
졌다고 칭송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익명匿名의 글을 창덕궁 후원에 던진 자가 있었는데, 연산군이 귀양 간 집에서
원한을 품고 자신의 허물을 지적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전부 잡아들여 옥에 가두고 혹독하게 심문하였으나, 끝내 증거를 잡을 수 없었고, 공은
경주慶州로 이배되었다. 중종반정 뒤에 조정에서 불러서 형조 좌랑에 임명하였고,
얼마 뒤에 병조로 옮겼다. 정묘년(1507)에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에 제수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들어와서 사옹원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했다.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들어와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임신년(1512)에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가
의정부 검상이 되었는데, 공이 평소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함
께 경연관을 겸직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였다.
계유년(1513)에 의정부 사인에 올랐고, 겨울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사건에 연
루되어 서반西班으로 옮겨져 호군에 서용敍用∙3되었으며, 승문원 참교와 훈련원과 장악
원의 첨정과 내자시와 사복시의 부정을 역임하였다.
을해년(1515)에 제용감 정에 올랐고, 병자년(1516)에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으며, 가을에 체직되어 성균관 사예와 통례원
상례와 사재감 정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사헌부의 직임을 겸하여 나가서 호남의 옥사
獄事를 다스렸다. 정축년(1517)에 홍문관 직제학에 올랐다가 곧바로 부제학에 발탁되었으며, 얼마 안 되
어 사간원 대사간과 형조 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연이어 옮겨졌다. 공이 사간원에
있을 때 천거과薦擧科∙4의 불편을 논했는데, 이 때문에 언관言官에게 배척을 당해 해직되
었다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다시 청원하여 영해 부사에 임명되었다. 영해는 땅
이 외진 바다에 닿아 있어 비록 이름이 학적學籍∙5에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모두 활쏘기
와 사냥을 숭상하고 치고받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아전과 백성들이 괴로워하였다.
공이 처음 도착하여 맨 먼저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제생諸生에게 나아가 공부하는
방도를 힘써 깨우쳐 주어 피폐한 풍속이 변화되었다. 또 부역과 세금을 줄이고 송사訟事
를 곧바로 처리하여 인자하고 은혜롭게 백성을 인도하니 온 고을이 편안해졌다.
기묘년(1519)에 형조 참의로 부름을 받아 올라오는 도중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경진
년(1520) 여름에 중추부 첨지사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부제학에 전직되었고, 겨울에 외
직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중추부 첨지사
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522) 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서열에 따라 우승지에 올랐
는데, 뜻밖의 사건에 연좌되어 이조 참의로 옮겨졌고, 다시 첨추·부제학·대사간·이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갑신년(1524)에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
가들어 집을 크고 사치스럽게 짓자 공이 대사간에게 한도를 넘었다고 극력 주장했는
데, 희는 바로 안로安老의 아들이었고, 안로가 이 때문에 공을 미워하였다. 공이 이조 참
판이 되자 판서가 여러 번 공을 청반淸班에 의망擬望하려고 하였는데, 안로가 공을 손가
락질하며 주상께서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번번이 저지하였지만, 안로가 음사陰
邪에 연루되어 패퇴敗頹하였고, 공을 청반에 의망하려는 논의도 아울러 배척되었으니,
이는 임금을 속이고 사사로이 욕심을 채운 사건 중의 하나였다.
안로가 멀리 귀양을 가자 공도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외직을 청원하여 경주 부윤
이 되었는데, 경주는 본래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였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조세를
모두 해산물로 거두어 갑절을 관부에 바치게 하니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헤아릴 수 없
었다. 공은 거둔 물건을 모두 조정에 바치고, 또 그것을 관부의 비용으로 써서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서 항상 일정한 공물貢物 이외의 나머지는 모
두 없애니 지금도 백성들이 그 공적을 추앙하고 있다. 임기가 차기 전에 병으로 사퇴하
고 고향인 풍산의 별장으로 물러났다.
기축년(1529) 봄에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라 황해 감사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돈령부 동지사에 임명되었으며, 한 해 남짓 뒤에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
다. 계사년(1533) 가을에 충청 감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김안로가 다시 기용되어 정
권을 마음대로 하며 지난 일에 원한을 품고서 공을 배척하여 한직閑職에 두었다. 공도 질
병으로 임금을 배알하지 못한 채 4년이 지나도록 손님을 사절하고 당시의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다. 안로가 공이 병 때문에 바쁜 업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므로 외직으로 밀쳐서
중상모략을 일삼으니, 공이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부임하였고, 그해 겨울에 병으로 사
직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임명되었는데, 이로부터 한직에 있으면서 편히 쉬게 되었
공이 송도 유수로서 숙위宿衛하려고 병을 무릅쓰고 입직하였는데, 그 때문에 위독해져
집에서 돌아가셨다.
공은 성화 정해년(1467)에 태어나 가정 을미년(1536)에 세상을 떠나니 춘추 69세였고, 그
해 12월에 조령鳥嶺 바깥, 곧 예천군醴泉郡 광석산廣石山의 남향 언덕에 귀장歸葬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여 편을 가르는 마음이 없었고, 사람을 대접하고 사물에 접할 때
는 천진하게 대하여 가식이 없었다. 응수應酬하고 임기응변할 때는 사려가 극히 주밀하
여 빠뜨리는 것이 없었고, 예측하는 것이 당연하여 여러 번 적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
이 감복하였다. 학문이 박식하여 역수易數와 음양陰陽과 복서卜筮에 관한 서적까지 통
달하였다. 평생토록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고, 자형姊兄 권민수權敏手의 명망이 조정
에 드러났는데 공이 의리로써 허여하였으며, 물려받은 재산을 나눌 때도 누이에게 모
두 양보하였다. 사람과 사귈 때는 믿고 일을 맡겼으며 바뀌거나 변하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부터 권달
수權達手와 더불어 가장 친하게 사귀었다. 일찍이 함께 옥에 갇혔다가 사형을 당할 지경
이 되었을 때, 같이 갇힌 사람 중에 궁내宮內의 도움으로 화를 면한 자가 있었다. 달수
가 공에게 “아무개는 머리를 써서 죽음을 면했는데, 그것도 어찌 계책이 아니라고 하겠는
가.”라고 하니, 공이 “죽고 사는 것은 분수에 달려 있지만, 명분과 의리는 지극히 무겁
네. 남아가 어찌 부정한 방법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자 달수가 공의
말에 심복하여 바른말을 하다가 죽었다. 공이 평소에 항상 “통지通之(권달수)는 생사의 갈
림길에서도 태연자약했거늘, 어찌 내 말 때문에 그의 정견定見이 흔들렸겠는가. 그러나 당
시에 권제權制∙7를 쓰도록 권하지 못하여 좋은 벗으로 하여금 부당한 형벌을 면치 못하
게 한 것이 내 평생의 아픔이다.”라고 탄식하였다.
공은 주량이 대단하여 손님이 오면 반드시 실컷 마시면서 끝이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
지만, 피곤한 빛이 없었고 항상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사는 집이
낮고 좁아서 추위와 더위를 겨우 피할 정도였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거처하였다. 풍류와
다. 을미년(1535) 9월에 중종이 제릉齊陵∙6에 참배하려고 송도松都(개성)에 거둥하시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청빈한 것이 마치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와 같았다. 그러므로 자식들에게도 반드시 청빈한 삶을 본받도록 타일렀다. 공의 부인 허씨許氏는 장사랑 서瑞의 따님으로 양성陽城의 이름난 집안이다. 부덕婦德
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의정義貞은 종부시 첨정을 지
냈고, 둘째 순정順貞은 군기시 부정을 지냈다. 맏딸은 사옹원 봉사 이광필李光弼에게 시
집갔고, 둘째는 김윤종金胤宗에게 출가했으며, 막내는 우찬성 이준경李浚慶에게 시집갔
다. 서출庶出은 딸 여섯으로 맏딸은 전의감 봉사 문홍순文弘順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이
수李秀, 셋째는 김옥金沃, 넷째는 권세달權世達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사역원 주부 임희
동任希同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김세호金世豪에게 시집갔다.
첨정 의정은 평양부 서윤 김번金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농農
이고, 맏딸은 심수신沈守愼이게 시집갔고, 둘째는 여강 수麗江守 아무개, 셋째는 안기安祺,
넷째는 남순南峋, 막내는 정언복鄭彦福에게 시집갔다. 부정 순정은 금구 현령 김의종金意從
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진鎭은 이조 좌랑을 지냈고, 둘째 박鎛은
전생서 봉사를 지냈으며, 막내 선銑은 진사이다. 맏딸은 박계유朴繼裕, 둘째는 김위金偉에
게 출가하였다. 김윤종의 외동딸은 이진경李震慶에게 시집갔다. 우찬성 이준경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예열禮悅이고, 차남은 덕열德悅이며, 딸은 이옥李沃에게 시집갔다.
내가 공과 나이가 비슷하지 않은데도 마음을 허여한 지기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므
로 공의 대를 이은 둘째 아들 순정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명을 청하니 의리상 어
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운명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야 有運不諧
시대에 허물을 돌리겠지만 咎歸於時
쌓은 학식 있어도 못 펼친 것은 有蘊不施
다시금 누구를 탓할 것인가 又將咎誰
두터운 품성을 타고났는데 公旣稟厚
가진 것이 또한 풍성했으니 亦昌其有
지위가 어떻게 높지 않으리 位豈非顯
육조의 참판을 지내시었네 秩亞六部
장수하지 못한 게 아니었으니 壽非不遐
예순 지나 칠십에 가까웠지만 已軼古稀
조정에서 올바르게 논의한 것이 公議之屬
두 번이나 어긋나서 애석하였네∙8 猶惜兩違
마지막 직위로 미루어 보면 推其所極
지위가 덕망에 맞지 않으니 高不滿德
어째서 이렇게 되어갔던가 曷爲致此
능력이 수용되지 못하여서네 有不容力
자신에겐 넉넉하게 하지 않았고 惟不自裕
후손에게 넉넉함을 남겨 주었네 以裕于後
내가 지은 비명이 곧고 바르니 我銘貞之
뒷날까지 영원토록 증명하리라 用質悠久
有明朝鮮國嘉善大夫工曹參判金公墓碑銘 幷序
_ 鄭⼠⿓
公系出安東府豊山縣 鼻祖以降 世有聞人 高王父諱安鼎 仕麗季 官至三司左尹 諱子純
軍器寺直長 贈左通禮 諱從石早歿 贈兵曹參議 諱徽孫 官至珍山郡守 贈吏曹參判 寔
娶同知敦寧府事 閔孝悅之女 公之冑子也 通禮至參判贈典 皆以公貴也 公諱楊震 字伯
起 九歲能屬文 大爲四佳徐文忠公所賞稱 其骨法終爲宰相 及長摳衣鄭孝恒之門 所與
多知名之士 李容齋荇 鄭虛庵希良 權校理達手 此皆最著者也 藝成行邵 中己酉進士弟
四名擢 丁巳科選 補藝文館檢閱 轉承政院注書 時表兄洪翰爲承旨 以親嫌 移授尙衣直
長 庚申丁外憂 癸亥秋闕服 授弘文館副修撰 燕山欲追崇母妃陵廟之號 擧朝莫克匡救
公當屬議 獨力爭忤旨 竟坐是逮繫 共議十三人俱在獄 公備受捶楚 終無撓辭 一日外報
同繫人將幷置極刑 已具刑車十四輛而至 同輩聞者 或失色泣下 皆呼酒劇飮 泥醉俟命
公略不爲動 言笑無異平時 俄戮首議者 餘悉竄外 公亦配醴泉 嘗與鄕人圍棊 有人叫金
吾郞乘急傳以至 傍人皆失措 公徐曰 死生在天 非惴懼可免 仍下手 以決勝負 俄聞之
乃謬傳也 容齋李公嘗稱 公鐵腸石心 尋有匿名投書苑中者 燕山疑編謫之家 構怨斥其
過 復盡收繫 禁獄訊鞫甚嚴 卒無驗 移配慶州 中廟改玉 徵拜刑曹佐郎 俄遷兵曹 丁卯
外除慶尙都事 及瓜內授司饔院僉正 未幾丁內憂制除 復入爲弘文館修撰 陞校理 壬申
遷司諫院獻納 議政府檢詳 公素深於易 與慕齋金公安國 兼帶經筵進講 癸酉陞舍人 冬
拜司憲府執義 坐事西敍護軍 歷承文院參校 訓鍊掌樂僉正 內資司僕副正 乙亥陞濟用
監正 丙子復爲執義 秋遞授成均館司藝 通禮院相禮 司宰監正 仍兼臺職 出鞫湖南獄事
丁丑進弘文館直提學 旌擢副提學 尋移司諫院大司諫 刑曹參議 承政院同副承旨 公在
諫院 嘗論薦擧科不便 以故爲言者所斥 解授僉知中樞 遂丐補寧海府使 壤界僻海 雖名
在學籍者 皆尙射獵 擊斷無忌 吏民苦之 公始至 首謁文廟 進諸生 勉諭爲學之方 弊俗
爲變 且輕賦 直訟務 以慈惠導民 一境安之 己卯以刑曹參議被召 在途拜大司諫 庚辰
夏 移授僉知 轉副提學 冬出按全羅 任滿內授僉知 壬午春 拜同副承旨 序陞右承旨 坐
無妄 遷吏曹參議 復歷僉樞副提學大司諫吏曹參議 甲申拜禮曹參議 時金禧初尙主 營
第宏侈 公之長諫掖 極論踰制 禧卽安老之子也 安老用是惡公 及爲吏曹參判 冢卿累欲
擬公淸班 安老指公 上所不喜 輒沮之 及安老坐陰邪敗 公議幷斥 此爲誣上濟私之一端
也 安老竄外 公亦不自安 乞外尹慶州 其地素饒魚鹽 故以田賦 率斂海錯 倍納于官 貽
弊不貲 公以爲凡斂物 皆爲上供 而乃爲官府用費 不顧民瘼可乎 恒供外所餘 悉除之
至今民戴其賜 官未滿辭疾 退去豊山別業 己丑春 進秩嘉善 拜黃海監司 秋以病請辭
拜同知敦寧 居歲餘 拜工曹參判 癸巳秋 拜 忠淸監司 時金安老復起用 事挾前憾 擯公
置散地 公亦病不朝謁者 四閱寒暑 常謝客 不言時事 安老知公病不堪劇務 故擠之於外
以中傷之 公遂力疾赴任 其冬辭疾 還拜同知中樞 自是在閑局將息 乙未九月 中廟展謁
齊陵 幸松都 公以留都宰相 備宿衛 力疾入直 仍轉劇就第卒 公生于成化丁亥 終于嘉
靖乙未 春秋六十有九 是年十二月歸葬嶺外 郡曰醴泉 山曰廣石 原卽亥坐巳向也 公性
通儻無畦畛 待人接物 任眞不外飾 至於應酬機變 慮極周詳 不見闕遺 逆料當然 人服
屢中 於學頗博洽 洞析易數 兼陰陽卜筮之書 平生篤於孝友 姊壻權公敏手 以名望 顯
于朝著 公相許以義 屬分先業 亦皆讓妹氏 與人交 推信不渝 公自少與權達手 推分最
深 嘗同繫臨刑 同輩有緣內援免禍者 達手語公曰 某以經營得不死 豈非計乎 公曰死生
有分 名義至重 男兒豈可曲逕求活 達手心服 公言 卽置辭就死 公平居每嘆曰 通之恬
於死生之際 豈以我言 撓其定見 然在當時 不能勸成權制 使良友不得免淫刑 平生之痛
也 公酒戶甚大 客至必暢飮無算 未嘗告疲然 恒不及亂 居第湫隘 僅備寒暑 處之怡然
聲色之娛 不近於前 淸約如布衣 故戒子弟 必以此爲律 公配許氏 將仕郎諱瑞之女 陽
城世家也 有淑德早歿 凡生二男三女 男長曰義貞宗簿寺僉正 次曰順貞軍器寺副正 女
長適司饔院奉事李光弼 次適金胤宗 季適右贊成李浚慶 庶出有六 女長適典醫監奉事
文弘順 次適李秀 次適金沃 次適權世達 次適司譯院主簿任希同 次適金世豪 僉正娶平
壤庶尹金璠之女 生一男五女 男曰農 女長適沈守愼 次適驪江守 釣 次適安祺 次適南
峋 次適鄭彦福 副正娶金溝縣令金意從之女 生三男二女 男長曰鎭吏曹佐郞 次曰鎛典
牲署奉事 次曰銑進士 女長適朴繼裕 次適金偉 金胤宗生一女 適李震慶 贊成生二男一
471
女 男長曰禮悅 次曰德悅 女適李沃 余於公年輩不倫 而謬許心知 故嗣子副正 以狀問
銘 義安可辭 銘曰 有運不諧 咎歸於時 有蘊不施 又將咎誰 公旣稟厚 亦昌其有 位豈
非顯 秩亞六部 壽非不遐 已軼古稀 公議之屬 猶惜兩違 推其所極 高不滿德 曷爲致此
有不容力 惟不自裕 以裕于後 我銘貞之 用質悠久
출전:徐周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