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은이의 꿈 / 박선애
한 목사님은 내가 고향에서 살 때 우리 교회에 계셨던 분이다. 작은 농촌 교회라 몇 명 안 되는 성도는 대부분 할머니들이었다. 나는 젊다는 이유로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한 채 교회 학교 교사, 구역 예배 인도자, 회계 등 여러 일을 맡아서 했다. 목사님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작은 교회에서 희생, 헌신하는 것을 보며 존경하고 짠하게 여기다가도, 가까이에서는 보이는 작은 흠에 실망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그런 사이였다.
내가 먼저 고향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그 후에 사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중3부터 네 살 막내까지 여섯 딸과 목사님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웠다. 산 사람은 살아진다는 말은 맞았다. 목사님은 목회를 이어가고 선교사 훈련도 받으셨다. 몇 년이 지나 캄보디아 선교사로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헤어진 지 7년이 지났다. 연락할 때마다 목사님은 한번 놀러 오라고 했지만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려니 하고 넘겼다. 또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신경 쓰느라 일에 지장이 있으면 누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사님 일하는 현장도 보고, 아이들도 만나고 또 1년 동안 혼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남편도 위로할 겸 가기로 결정했다.
선교지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파스와 안약을 말했다. 많이 가지고 가고 싶은데, 혼자서 다 장만하기는 부담스러워 가까운 사람들에게 소문을 냈다. 생각지도 않았던 소화제, 진통제, 소독약, 근육 이완제, 밴드 등의 약품과 학용품이 많이 모아졌다. 이상하게 안약과 파스는 내 몫으로 남았다. 안약은 약국에서 종류별로 몇 개씩 사고, 파스는 인터넷 판매점에 주문했다. 거기에 목사님 가족에게 줄 식료품, 선물까지 거실에 쌓아놓고 짐을 싸려니 이것저것 걱정이 많았다. 허용된 무게를 넘지는 않을까, 입출국할 때 약 장사로 오해받아 걸리지는 않으려나. 조카가 레고 쌓듯이 빈틈없이 쌌는데, 혹시 검사하자고 풀라고 하면 다시 담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나.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대학에 다니는 첫째, 거기에서 직장에 다니는 둘째를 대신해 셋째 명은이 중심으로 자매들이 역할을 나눠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내가 가져간 짐도 명은이가 나서서 제자리 찾아 넣는다. 약품을 상자에 찾기 편하게 정리해 놓고는 아주 만족스러워한다. 목사님이 사역하는 교회 중 하나는 고무나무 노동자들이 다니는 곳이라고 한다. 그들은 늘 근육통에 시달려서 파스를 기다린다. 또 어디나 흙먼지로 눈병이 많아 안약을 가져가면 좋아한다. 두통을 호소하는데 약이 없어서 물파스를 이마에 발라 줬더니 시원하게 다 나았다며, 배도 아프다고 옷을 올리고 내밀더라는 일화를 목사님께 들으며 웃는데도 눈물이 나왔다.
목사님이 돌보는 교회는 네 개나 된다. 현지인 목회자가 드물기도 하지만 교인들이 한국인 선교사가 오는 것을 좋아한다. 가난한 그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목사님은 토요일 오후, 일요일 오전 9시, 11시, 오후 3시에 각각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신다. 명은이와 자매들은 교회에 온 아이들을 가르친다. 우리는 교회 가는 날은 아니지만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교회 세 곳을 찾아가 보았다. 한 교회는 인가와 떨어져 있어서 조용히 다녀왔다. 다른 두 곳은 목사님이 온 것을 알고 여기저기서 나와서 순식간에 어른, 아이 30여 명이 모여 반가워하니 놀랍다. 아이들에게는 과자나 학용품을, 어른들에게는 파스 두 장씩을 나눠준다. 눈이 빨갛거나 아프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안약을 손수 넣어 준다. 안약을 병째 주었더니 내다 파는 것을 본 후로 그렇게 한다. 소화제, 진통제 등은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필요한 사람이 달라고 한다. 명은이가 목사님과 함께 이 일을 한다. 내가 가져간 약들이 잘 쓰이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명은이에게 들은 이곳의 의료 수준은 우리의 70년대 시골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한 것 같다. 어렸을 때 우리도 낫으로 손을 베어 피가 나면 풀잎을 비벼서 붙이거나 숯가루를 뿌렸다. 내 친구는 돌에 맞아 머리가 터졌는데 엄마가 된장을 발라 줬다. 그래도 더 심하게 다치거나 아프면 약방이나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명은이가 교회에서 만난 아이는 뼈가 부러졌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천으로 감고 왔더라고 한다. 풀어 보니 생강을 찧은 것을 붙였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명은이는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 줄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의사가 되어 의료 선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9년도쯤, 이기환의 《성산 장기려》를 감동적으로 읽었던 경험이 있다. 책에서 만난 그분에게 깊이 빠졌다. 1911년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중학교 때 진로를 고민하다가 아파도 병원 한 번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중에 부산으로 내려와 무료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해서, 평생 동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럴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지만 손가락에 박힌 가시도 못 파는 사람이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만약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더라면 이런 멋진 의사를 꿈꿔 봤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자주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이런 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권했다. 전에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 중에 그 동기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겠다거나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것이라는 아이도 꽤 있었다. 지키지 못할지라도 그 나이에는 순수하고 숭고한 꿈이라도 꿀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 그 시대 정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돈 많이 벌잖아요. 안정적으로 잘 살 수 있잖아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의대 지망생이 대부분이다.
명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의 감동이 살아났다. 명은이는 최고의 수능 점수를 받아야 하는 우리나라는 어려울 것 같아 외국의 의대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정규 과정을 밟지도 못하고 홈스쿨링으로 스스로 공부했다. 다행히 국제 학교를 운영하는 한국인 부부가 1주일에 한 번씩 무료로 개인교수를 해 줬다. 남편은 수학, 부인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많이 부족해서 걱정이지만 9월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명은이가 꼭 꿈을 이뤄서 캄보디아의 장기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댓글 명은이가 그 꿈을 이뤄 멋진 의사가 되길 바랍니다.
좋은 의사가 많아지는 그날도 오기를 함께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얼마전 이태석 신부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서 의대 공부를 끝낸 두 명의 청년이 곧 수단에 돌아가 의료봉사를 하게될 것이라는 기사가 생각납니다. 명은이도 꼭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겠다거나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것이라는 아이도 꽤 있었다. 지키지 못할지라도 그 나이에는 순수하고 숭고한 꿈이라도 꿀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 맞아요. 명은이를 응원하게 되네요.
명은이를 위해 기도해야겠네요.
마음이 따뜻해져서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돈만 쫓는 아이들을 탓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사회가, 기성세대가 그렇게 만들고 있어요.
캄보디아까지 가셨네요. 명은이가 꼭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명은이가 캄보디아의 장기려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의사는 상위 20% 아이(너무 미련하면 그 많은 의학서적을 외우기 힘들겠지요? 하하) 중 손재주 좋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하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상위 1%의 아이들이 적성과 흥미, 특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의사 집단으로 몰리는 건 분명 문제가 많습니다.
자존감 높고, 사회 경험 부족하고 오직 책만 판 아이들이 그 집단의 대다수거든요.
명은이는 좋은 의사가 될 싹이 충분하네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저도 기도하게 되네요.
명은이가 날마다 꿈에 가까워지기를, 가난하고 약한자들이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명은이를 응원합니다.
꼭 그 꿈을 이루리라 믿구요. 언젠가 그 소식도 들을 수 있을련지.
어린이들에게 줄 과자, 학용품에다 약까지 선교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많이도 준비 하셨네요.
현지에 도착할때까지 이동하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응답해준다'고 하잖아요.
선생님의 기도 응답주리라 믿습니다.
명은이의 꿈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