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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 시 47:1-9, 요 9:26-41
예수님께서 행사신 이적은 대단히 많다.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적사건을 조사해도 약 40가지나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7가지만 소개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이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요 9장의 내용은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눈을 예수님께서 뜨게한 사건으로 쉽게 생각하면 하나의 구제요 용서요 치유이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보면 그것만을 말하고자 하는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이적의 사건 뒤에는 깊은 세가지의 이미가 있다.
첫째, 이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대표적인 의미로써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 고치시고 누구에게나 이같은 긍휼을 베푸신다는 의미로써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사건이다.
둘째, 상징적 의미가 있다.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영적인 안목을 함께 설명하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맹인이 된 사람들의 눈을 뜨게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이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로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한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9장 끝에 보면 예수닙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 영적인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도 물질적인 세계를 보면서 그 속에서 말해주는 상징적 의미, 곧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를 볼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다. 오늘 맹인이 눈을 떴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맹인 한 사람이 그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가려진 가운데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눈을 뜨게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이 사건은 고난의 문제를 설명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이상으로 이 사건은, 대표적인 이미, 상징적인 의미,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가 맹인이 되었고, 또 맹인이기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으니,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큰 진리를 말해주는 설교 말씀이다. 하나의 말씀의 계시가 이 사건에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적이요 신학적이고 대표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상기할 것은 선한 일에 시비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100만원을 가지고 고아원을 반문했다고 하면, 주변에서 여러가지로 말이 많을 것이다. ‘저 사람이 의원에 출마할 생각이 있나보다.’ 또는 ‘자기 주변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돕겠다고 나서는가’ 하며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성서에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비록 비난이 있고 시비가 있어도 낙심할 필요는 없다. 선한 일이기에 더욱 비난이 따르는 것임을 알고 자기 소신대로 나아갈 것이다. 또한 비판이 따른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예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이 있는 것이다. 내 의견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견을 내게다 맞추려고 하니 잘했다, 잘못했다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소위 자기만의 어떤 규정의 틀이 있어 그 틀에다가 꼭 맞추려고 생각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 보통 크기의 사람이 있는데, 작은 사람만 보던 사람은 그가 크다고 말할 것이고, 큰 사람만 보던 사람은 그가 작다고 말할 것이다. 크다 작다의 기준이 어디에 있나? 자기 눈에 기준이 있다. 오늘 유대인들도 자기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귀한 사건을 놓고 비난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지켜오는 안식일에 대한 규범, 규율에 맞지 않는다고 야단인 것이다. 또한 그 비난 속에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책잡아 죽이려는 못된 생각이 있었다. 많은 인기와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을 보고 당시의 지도자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여 주님을 잡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트집을 잡으려고 기회를 보다가 드디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으니 당신은 죄인이라고 비난을 하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오늘날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도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고, 이런 비난을 극복해야만 선한 일을 할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사건을 먼저 생각해어야 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먼저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건은 언제나 침묵이다. 언제나 사건부터 먼저 생각을 해서 ‘맹인이 나았다. 감사하다’ 곧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부터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부터 생각한 것이다. 가끔 우리들은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니다. 좋지 않았다 하고 서로 말다툼을 하지만, 사실은 이미 따먹었다. 따먹은 것을 가지고 만일에... 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 내가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생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사건은 사건대로 지나갔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맹인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많은 박해 속에서도 점점 성장하는 그의 믿음의 과정을 살펴 보겠다.
1. 바른 응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실로암까지는 5리나 되는 길인데,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반드시 눈을 뜰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간 것 같지는 않다. 죄우간 가서 눈을 뜨게 되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뜨지 못한다면 오늘 일진이 나쁘구나라고 생각하고 갔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실로암까지 가는 것이다. 그가 가지 않았다면, 아마 눈을 뜨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순종은 은사에 대한 반응으로 이것이 믿음이다.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 하신 그 말씀에 바른 응답을 가지고 순종함으로써 눈을 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바른 응답이다. 바른 응답에는 의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순종으로 하는 응답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대해, 혹시 다른 방법은 없느냐라고 묻지 않고 묵묵히 순종만 했다.
2. 체험적인 신앙이다.
그가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시비를 걸며 ‘너를 눈뜨게 한 사람은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이니 죄인이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아느냐?’ 등 여러 가지로 물어왔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은 한가지 뿐이다.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다.’라고 자기 체험을 분명하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가 체험한 것은 분명하기에 자신있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믿음이다. 가령 내가 중한 병을 앓다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병이 나앗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죽을뻔 했다가 나앗다는 것이다. 단순하며 소박한 믿음이다.
오래된 이야기이다. 임진강 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밤중에 우리 국군 세 명 이 철조망을 감시하며 지나가다 맨 앞의 군인이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것을 주으려고 잠간 멈추며 몸을 굽히자 뒤따르던 군인들은 앞질러 갔다. 바로 그때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지뢰가 터져 두 사람은 죽고, 무엇인가 줍기 위해 잠깐 멈추었던 사람은 살았다. 그가 반짝거리는 것을 줍고 보니 그것은 조그마한 십자가였다. 자, 이 사건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재수가 좋았다고 일축해 버리겠나? 남들은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본인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다. 하필이면 달빛에 그 십자가가 비쳤음이 신통하고 놀라워 십자가를 고이 간직하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십자가를 못보게 하셨느냐라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래서 예화가 어렵다. 살아난 본인은 귀하게 간증을 하겠지만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맹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는 것은 한가지뿐, 내가 체험한 사실로써 나만이 갖는 체험을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죄를 사하셨다는 깨끗하고 단순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으로는 좀 어렵다.
3. 그는 경건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니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 하며 계속해서 여러가지를 묻자,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인을 통해서 이같이 나면서부터 맹인인 자를 눈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라고 상당히 발전적인 자세로 대답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죄인이지만 나의 병을 고쳐준 그 분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으로 압니다’라고 경건의 뜻을 강조했다. 경건이란 바리새주의나 제사장 같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경건이지 하나님이 모르는 경건은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40일 100일을 기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한 마디의 기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자기 독백이요 몸부림이지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것이 참 경건으로, 경건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시비를 해도 내가 믿기는 그분은 경건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압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이 정도로 그의 믿음이 자랐다.
4. 그는 간증하기를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십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절망 놀라운 신앙이다. 신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카리스마적 존재는 뜻이다. 내가 눈을 뜬 것은 그분의 능력이 많아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로서 하나님이 그 분을 통해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었고, 하나님의 전능이 여기에 계시는 줄을 믿었다. 처음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실 때에 예수님은 다른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고 나서 생각하니 하나님이 저 분을 통해서 내 눈을 뜨게 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인가?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목사님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을 때에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하면 설교가 은혜가 안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그 역사가 여기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참 믿는 자이다. 그러므로 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만나더라도 상대방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비록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의 역사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런 손해를 주셨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약의 욥은 많은 재산을 이방 사람들에게 빼앗기고도 이방 사람들은 원망하지 않았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욥의 재산을 가져가셨나? 아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갔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 어디가서 기분 나쁜 말을 들었나? 마주서서 욕하거나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자. 유명한 다윗의 고백이 있다. 압살롬의 반란 때 피난을 가는데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의 옆에 있던 장군이 칼을 뽑아서 시므이를 치려하자 다윗이 말린다. ‘참아라. 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셔서 하는 것이니 내버려두라’ 하며 저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통해서 말씀하시므로 대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맹인은 지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한 사람의 역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내게 역사하신 것이다. 곧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라고 믿고 있다.
5. 그는 좀 더 믿고 싶고, 좀 더 알고 싶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지금도 믿고 있고, 병고쳐주신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제 구체적으로 깨닫기를 바라고, 믿는 마바 알고 싶었다. 딤후 1:12절을 보면 ‘내가 의뢰한 자를 알고’라는 말씀이 있다. 내가 믿었으면, 이제 그 믿는 자를 알아야겠다는 말이다. 맹인은 자기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분이 구체적로 누구신지, 왜 내 병을 고쳤는지, 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상으로 맹인이 눈을 뜸으로써 그에게 일어난 신앙의 단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지적 신앙으로 모르고 순종한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의지요, 둘째는 체험하고 감격하는 것이며, 셋째는 지적인 것으로 확실하게 알고 따라가는 것이다. 순종은 같은 순종이지만, 모르고 따라가면 답답하지만 알고 따라가면 자신이 있고 힘이 있다. 이렇게 신앙은 완전하고 종합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병을 고쳤으면 ‘하나님, 감사하니다’라고 인사로 끝내고 자기 길로 간다. 그러나 이 맹인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를 원했다. 나의 어떤 욕망을 중심으로 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시작은 그랬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문에서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곧 좀더 알고 싶고 확실하게 믿고 싶다고 주님께 부탁하고 있다.
이제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맹인을 만나주신다. 그가 지금 출교를 당해서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아시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내용으로 그를 만나주신다. 출교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회당 명부에서 제명되며 때려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 맹인의 부모까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누구도 그를 도울 사람이 없다. 차라리 눈을 감았을 때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았는데, 눈을 뜨고 나니 박해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이 어려운 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다. 이것이 은총이다. 내가 진실하려고 애쓰면 하나님께서 그를 진실하도록 힘을 주시고 진실의 은혜를 주신다. 내가 충성하려고 애쓰면 충성되게 하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다. 그래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건강도 주시고, 필요하다면 물질도 주시고, 또 필요하다면 친구도 주시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도울 자도 허락해 주신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건강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충성뿐이므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충성을 다하면 주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신다. 그리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신다.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내용으로 만나주신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앞에 있는 순교의 무서운 환난을 잘 이기고 믿음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을 주셨다. 이렇게 필요한대로 채워주신다. 오늘 출교당한 이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온전하게 된다.
요 9장 전체를 좀더 관심있게 보면, 맹인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의 발전을 엿볼 수가 있다. 먼저 11절에 보면 ‘예수라는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했다’고 예수님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본다. 다음 17절에 보면 사람들이 묻기를 ‘너는 그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음 33절에서는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다’라고 상당히 발전을 했고, 마지막으로 35절에 보면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 유도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가 인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한다. 이 고백이 있기까지는 예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다. 그는 인자의 뜻을 다 알지 못하고, 메시야의 의미를 알지는 못하지만, 주께서 유도하셔서 그와 같은 높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가 그리스도를 인자로 고백하는 순간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것으로 그는 완전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3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눈 뜬 사람을 눈 감게 만들고, 눈 감은 사람들은 눈 뜨게 만든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들어야 한다. 오늘도 어떤 사람은 본다고 하기 때문에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다고 겸손하기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안다고 하기 때문에 사실은 무지 중에 자기 무식을 폭로한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된다. 모르고도 아는 척하거나,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쌍한 사람들이다.
헬라 사람들의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어느 깜깜한 밤에 맹인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간다. 자기는 맹인이라 등불이 필요없지만,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괴로우니 등불을 켜고 길을 가는 것이다. 이 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여기 불이 간다라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를 원해서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그만 부딪히고 말았다. 이때 맹인은 자신있게 한마디 한다. ‘이 사람아, 눈이 없나?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이쪽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은 꺼진지 오래 됐소“라고 말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꺼진 등불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나? 등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 맹인이다. 우리들은 최소한도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안다고 했고, 가졌다고 했고, 유식하다고 한 것에 대해 이제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오셨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것을 깨닫게 하려고 오셨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차라리 맹인되었다면 이 사람처럼 겸손하게 믿음을 가지고 ‘주여, 볼 수가 없습니다. 보게 해 주옵소서’라고 나왔을 텐데, 조금 보는 것 때문에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몰랐고, 믿어야 할 진리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신령한 맹인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맹인의 믿음처럼 박해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을 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온전해질 때까지 성장해 나가야겠다. 성장해 가는 도중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주께서 은혜를 더하시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실 것이다.
(1997-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