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진해서 그리움도 크다
박현수 씨는 2018년에 방송 통신 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1반 9번으로, 나는 담임으로 입학식 날 처음 만났다. 남학생 한 명이 입학식만 하고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우리 반의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56세였지만 다른 여학생 세 명과 함께 우리 반의 막내였다.
이 학생들은 인터넷 방송으로 공부하다가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학교에 왔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그들 못지않게 등교 수업일을 기다렸다. 평생 마음에 품었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각기 사는 모양은 달라도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금방 가까워졌다. 서로 간식을 챙겨 와서 함께 먹고 농사지은 고추, 상추 등을 가져와 나누었다. 손재주 좋은 현수 씨는 호두로 열쇠고리를 만들어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선물했다. 뭔 말인지 모르겠다, 금방 잊어버린다 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즐거워하니 가르치는 교사들까지도 행복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를 받았다.
다음 해 그 학교를 떠나야 해서 아쉽게도 그들과 헤어졌다. 가끔씩 연락하다가 차츰 끊어진 사람들과 달리 박현수 씨는 꾸준히 소식을 전했다. 여름에 강원도에 가서 일했다며 옥수수를 한 포대 사다 주기도 하고, 경북에서 사과 농사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고 사과를 보내기도 했다.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간청해서 남편과 함께 갔다. 학교 오기 1년 전에 어머니를 위해서 손수 지었다는 집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고 가서 들녘이 끝나는 산 아래 닦아 놓은 땅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 축사를 지어 소를 키울 거라는 계획과 살아온 이야기 등을 했다. 1학년 때 글쓰기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그 후로도 짤막한 글을 써서 카톡으로 보냈다. 출퇴근길에 자연을 보고 느낀 것, 일하면서 떠오른 생각 등을 솔직하게 쓴 글은 매끈하진 않아도 마음에 와닿았다.
2학년이 되면서 1학년 때 2반이었던 동갑내기 두 명까지 더해 여섯 명이 토끼띠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여름에 박현수 씨 마을 냇가에서 물놀이를 한다고 나와 남편을 초대했다. 박현수 씨와 동네 형님은 평상에서 고기를 굽고 여학생 다섯 명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현수야.”라고 거침없이 부르며 진짜 중학생들처럼 놀았다. 박현수 씨는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고 “어이, ㅇㅇ” 이렇게 불렀다. 그들은 때때로 부산, 지리산, 진도 등으로 여행을 갔다. 진도로 갈 때는 나도 불렀지만 가지는 않았다.
어느 해는 진도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리 마을과 가까운 곳이라고 했더니 일 마치고 오는 길에 찾아갔다. 물어서 찾은 우리 집과 큰샘과 동네 앞 팽나무 등을 찍어서 보냈다. 또 어느 날은 화덕을 만들었으니 진도 집에 실어다 놓겠다고 했다. 우리 집보다 가까운 동생네 집에 갖다주라고 했다. 트럭 바퀴 쇠 두 개를 붙여서 만든 화덕은 남자 어른도 혼자는 못 들 만큼 무거웠다. 얼마나 튼튼한지 아마도 나보다 더 오래 이 땅에 남아 있을 것 같다. 불을 넣는 입구 위에 솥이 그을리지 않게 만든 챙에는 ‘인연’이라고 새겨 놓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2학년이 되어 부회장이 되었다고, 3학년 때는 회장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2023년 5월 15일에는 “선생님, 잘 계시죠?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세상을 살아가며 잊지 못할 스승 한 분만 기억하고 산다면 행복한 인생이라는데 선생님이 계시기에 제 인생도 행복한 인생인 것 같습니다. (중략) 선생님의 나이 먹은 제자 박현수입니다.”라는 카톡을 보냈다.
작년 8월 15일 무렵에 진도에서 자매들 모임을 했다. 해가 지는 바다 풍경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박현수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당히 상기된 목소리로 “선생님, 오늘 ㅅ대학 교수님 만나서 거기로 진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열여섯 살 때부터 용접을 했는데 이것을 이제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대학에 다니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제 기술을 나누며 살렵니다.” 라고 말한다. 평소 나누고 돕는 그의 성품에 딱 맞는 포부로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이 전해진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 줬지만 주변이 어수선해서 그 소식만 듣고 끊었다.
8월 27일 일요일 오후에 부고 문자가 왔다. 글씨를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됐다. 현수 씨 어머니인가? 분명 현수 씨 이름 앞에 고(故)가 붙어 있는데 뭔가 잘못된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다른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그렇게 우리끼리 떨면서 확인을 했다. 다음날 보성의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봐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미리 와서 상가를 지키던 토끼띠 친구 순이 씨는 나를 보더니 ”현수야, 니가 좋아하는 박선애 선생님 오셨다.“ 라고 통곡을 했다. 내가 왔다고 알리는 말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품의 반에도 못 차는 빼빼 마른 여든여덟 살 어머니가 불쌍해서, 어머니는 "고생만 하다 간 아들이 불쌍해서 어쩔꺼나"고 함께 울었다.
평소에 소원했던 사람들도 추석이라고 카톡으로 인사를 전한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 고맙다. 추석이 가까이 온 탓인지, 날씨는 한여름인데 마음은 가을이 온 것마냥 며칠 전부터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 시절 같이 놀던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고 아버지도 그립다. 박현수 씨가 금방이라도 카톡을 보낼 것 같다. 이제는 이름 대신 ‘알 수 없음’으로 나오는 지난 카톡 글을 읽다가 호두 열쇠고리를 가만히 쥐어 본다.
첫댓글 현수 씨가 무슨 사고를 당했을까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승을 떠나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늙은 어머니는 어쩌라고.
눈물이...
모르는 사람이어도 눈물이 나네요.
에고, 본인 부고만큼 가슴을 치는 일도 없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깝습니다. 나도 눈물이 납니다.
삶과 죽음이 너무 가까워서, 귀한 인연이 하나둘씩 사라져서 아쉽고 슬퍼요.
얼마나 아프게 이 글을 썼을지, 박 샘 마음에 스며듭니다.
감명 깊게 읽어 내려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어쩌다가…. 노모는 어쩌라고,
선생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안타깝고 슬픕니다.
먹먹해집니다. 슬픔이 오래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선생님,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의 제자를 잘 키우셨는데, 먼저 가고 말았네요. 이렇게 눈부신 가을 앚에 눈물이 웬말일까마는 흐르는 걸
막을 재간이 없네요. 현수씨는 가고 화덕만 남았군요. 뜨거운 제자 사랑이 불을 지피 때마다 타오르겠습니다.
허다한 날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