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亦將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正.
(아주 먼 옛날) 도道는 늘 그러하게 무위했다. 따라서 (천하는 늘 그러하게 무위를) 일삼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은 따라서 (이 도道를 오롯하게) 지켰고, 천하는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교화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교화한다. 이른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으로 하여금 본래 무위한 자신의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아) 떨치게 하고 꽃피우게 하며 일삼게 하고 일으키게 하고자 한다. 나는 따라서 그것을 내리누른다.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통나무(樸; 性·命·自然·無爲·道·德)로써. (비유컨대,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는 통나무였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 (이른바, 나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에 대해) 조용해지게 하는데, 천하는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본래 무위한 자신의 성性·명命에 대해) 참되어지게 된다.
天, 何言哉. 四時, 行焉. 百物, 生焉. 道之, 無爲. 而無不爲也. 不動. 而敬. 不言. 而信. 篤恭. 而天下, 平. 侯王之, 守此道. 而萬物, 自化也.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양화陽貨」에서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 하늘이 무슨 말을 했던가? (하늘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계절은 (저절로 그러하게) 돌고 돌았다. (따라서) 만물은 (저절로 그러하게 생겨나고) 살아갔다.” (아주 먼 옛날) 도道는 무위無爲했다. 따라서 (천하는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를) 일삼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서 (천하는 저절로 그러하게 도道를) 받들었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천하는 저절로 그러하게 도道를) 믿었다. (도道는 허리를 곧게 편 채) 두 손을 모아 잡는 바를 도탑게 했다. 따라서 천하는 (저절로 그러하게) 가지런해졌다. (따라서) 제후와 임금은 이 도道를 지켰다. 따라서 천하는 저절로 그러하게 교화되었다.
作者, 奮發興起之謂也.
“작作”은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아) 떨치게 하고, 꽃피우게 하며, 일삼게 하고, 일으키게 한다는 말이다.
道, 唯無爲. 故無不善. 作. 則必有爲. 有爲, 則有善. 斯, 亦有不善矣. 且奮發興起, 於聖人之化非, 不善也.
도道는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그러하게) 무위無爲한다. 따라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무위無爲를 일삼기를) 잘하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를) 없애야 한다. (이른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작作”한다. 이른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유위有爲한다. (이른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유위有爲하는데, 따라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유위有爲를 일삼기를) 잘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 그들은 이른바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그 도道를 지키기를) 잘하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 요컨대, (지금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아) 떨치게 하고, 꽃피우게 하며, 일삼게 하고,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성인이 일삼은 (백성에 대한) 교화가 아닌 바로서, (백성에 대한 교화를 일삼기를) 잘하지 못하는 바이다.
興起者, 必有矜心. 有矜心斯, 有爭心. 有矜有爭斯, 騖於名, 而忘其天矣.
(백성으로 하여금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아 떨치게 하고, 꽃피우게 하며) 일삼게 하고, 일으키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다.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다. (그 마음이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불쌍히 여기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고,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몸이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에게 (일부러 일삼아) 달려가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과 몸은 그 하늘(이 자신에게 건네준 본래 무위無爲한 바가 참된 바性·道)을 잊어버리게 된다.
是以聖人之, 爲天下也, 使民, 內全其天, 得之眞, 而外泯其人, 爲之名.
따라서 (아주 먼 옛날) 성인은 천하를 일삼는 데 있어서 (그) 백성이 안으로 그 하늘이 얻게 한 (본래 무위無爲한 바가) 참된 바(眞; 性·德)를 오롯하게 지키게 하고, 밖으로 그 백성이 (그 일부러 일삼은) 이름을 일삼는 바를 (오롯하게) 어그러뜨리게 했다.
民, 於是乎. 唯皥皥然. 日遷于善. 而莫知其所以然.
(아주 먼 옛날) 백성은 따라서 이러했다! 이른바,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에 대해) 밝고 밝았다. 나날이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을 일삼기를) 잘하는 바로 옮아갔다. 그러나 그러한 까닭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尙何興起之有哉. 故曰, 鎭之以無名之樸.
따라서 (아주 먼 옛날, 제후와 임금에게) 어찌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을 다투는 마음, 이름으로 달려가는 바를 일부러 일삼아 떨치고 꽃피우며) 일삼고 일으키는 바가 있었겠는가?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나는 따라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마음,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에게 일부러 일삼아 달려가는 바를 떨치고 꽃피우며 일삼고 일으키고자 하는 바) 그것을 내리누른다.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통나무(樸; 性·命·自然·無爲·道·德)로써.”
夫所謂無名之樸者, 內, 全乎天, 而外, 忘乎名也. 內, 全乎天, 而外, 忘乎名者, 必將自然, 而然不自知其所以然.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무명지박無名之樸은 안(內; 마음)이 하늘(이 건네주고 얻게 한 본래 무위無爲한 백성의 성性·명命을) 오롯하게 지키는 모습이고, 밖(外; 몸)이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잊어버리는 모습이다. (요컨대) 안이 하늘(이 건네주고 얻게 한 본래 무위無爲한 백성의 성性·명命을) 오롯하게 지키고, 밖이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잊어버렸던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은 반드시 저절로 그러했는데, 이른바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그 (자신이 구제되는) 까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以無名之樸爲可欲, 則是, 猶有欲也. 猶有欲焉, 亦必將有名. 是豈能全其爲無名之樸也哉. 故曰, 無名之樸, 亦將不欲.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무명지박無名之樸”으로써,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옳은 바로 삼는 사람, 이른바 그는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본래 무위無爲한 그들의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지금의) 제후나 임금과 (더불어) 같은 사람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면, 이른바 반드시 따라서 (일부러 일삼은) 이름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어찌 그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무명지박無名之樸”을 일삼기를 오롯하게 잘한 것이겠는가?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비유컨대,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은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는 통나무였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
夫幷與無名之樸而不欲者, 其, 無欲可知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통나무”와 어우러지면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 바”와 아우러지는 사람, 그는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통나무”나,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를 옳은 바로 여기를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內, 無欲, 則外, 不妄動.
(이른바, 나의) 안이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통나무”나,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를 옳은 바로 여기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면, (나의) 밖은 망령되게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지 않게 된다. 〔옮긴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홍석주의 논의는 중국 당唐나라 때 성현영成玄英이 논의한 중현(重玄; 유위有爲에서도 벗어나고, 무위無爲에서도 벗어난 모습)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홍석주의 논의가 단편적이기에 보다 양자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夫能使天下之民, 皆無欲, 夫能使天下之民, 皆不妄動. 如是, 而天下, 不正者, 未之有也.
따라서 천하의 백성이 모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게 되고, 천하의 백성이 모두 망령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일삼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른바, 나의 안이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백성을 구제하는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었던 통나무”나,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를 옳은 바로 여기는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나의 밖이 망령되게 지금의 제후와 임금을 교화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지 않게 되는 바) 이것과 더불어 같이 하게 되면, 천하가 (모두 본래 무위無爲한 자신의 성性·명命에 대해) 참되지 않은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曰自正, 曰自化者, 我, 無所容心之辭也.
이른바, “자정自正”과 “자화自化”, (지금의) 천하는 (유위有爲를) 품어 안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아주 먼 옛날의) 천하는 유위有爲를 품어 안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었다는 뜻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제37장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일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