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도장
막도장 하나 내게 있다
아무 때나 도장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몸을 내주는 도장
치장을 모르는 장식 하나 없는 맨몸으로
부를 때마다 끄덕끄덕 기꺼워하는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몸
남 보기 부끄러울 만도 한데
다 덕분이라며 정이 빛 나는 거란다
몸이 유독 바쁜 날에도
불평 없이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헐벗었어도 당당하게 제 할 일을 해낸다
어느 날
제 이름 석 자 기억 못 하기에 돌아보니
닳고 닳은 속 붉은 인주 고름으로 가득 찼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집안일에 언제든 앞장서던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막도장 우리 언니,
죽
구순 어머니의 은근한 자랑은 치아입니다
동네 친목회 날 너도나도 자식 자랑 돈 자랑이 한창일 때
느닷없이 사과를 한 개 집어 와삭! 깨물어 아삭아삭 소리 내어 드십니다
입안에 진득하니 자리한 한 개도 빠지지 않은 누렁니는
내세울 것 없는 어머니의 자존심이지요
밥상의 어머니 음식 씹는 소리는 식구를 즐겁게 합니다
사각사각, 오드득오도득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머니 입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김치도 우물우물 꿀꺽, 뭐든지 슬쩍 넘기십니다
칠순의 아들은
오늘 아침 밥상에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자신이 틀니를 만들기 위해 아랫니를 몽땅 뽑은 그 날부터라는 것을
늙은 아들의 입에서 멀건 죽이 후루룩 흐느끼는 아침입니다
<약력> 정경해
1995년 『인천문단』, 2005년 『문학나무』 등단, 2016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신발」 당선.
시집 『술항아리』, 『가난한 아침』, 『미추홀 연가』, 『선로 위 라이브 가수』. 시 산문집 『하고 싶은 그 말』 등이 있음. 제27회 인천문학상 수상.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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