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건설·지구해양 분과 류재근
함께 소통하며 공존해 살아가는 가치가 우선되는 현대에서,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미덕은 모두에게 꼭 필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학문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지혜를 아낌없이 남들과 나누어 쓰는 현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행하면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개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로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에 따른 각종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윤리적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와 권력, 명성을 얻었다면 그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과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특권계층에 대한 우월성을 나타내며 높은 위치에서 선을 행하여 아래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그런 행동 규범이었다면, 오늘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나눔의 미덕이 여러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본인이 쌓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지식 나눔이 사회봉사의 한 형태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이자 저명한 과학기술인이라면 당연히 후대 사람들에게, 그리고 요구되는 모든 곳에서 자신이 습득한 지식이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중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 역시 본인이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가야금 연주 실력을 아낌없이 배우려 하는 후학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인은 과연 어떻게 정년을 맞이하고 자리를 떠나고 있을까?
교수로서, 그리고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재직 이후 떠난 자리는 클지 모르지만, 떠난 후의 모습은 빛바랜 장신구보다 못한 모습으로 전문지식이 사멸되고 없어져 가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인들에게는 은퇴가 없다!”
현대는 치열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다. 각 나라가 정보전쟁과 기술 경쟁으로 한 치의 양보를 모르는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사는 가운데, 과학기술인의 역할은 세대를 발전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톱니바퀴 역할을 수행하는 밑거름 역할을 해야 한다.
이에 과학기술인들에게 있어 나눔, 쌓은 지식에 대한 공유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의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나눔은 그 뿌리에서 나오는 줄기와 가지다. 그러므로 비움이 “체(體)”라면 나눔은 “용(用)”이다. 뿌리와 가지의 관계처럼 밀접한 비움과 나눔의 정신은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사물의 본질이 연결성(連結性, connectedness)에 있다’고 한 말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너 없는 나, 그것 없는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自然)이 자연일 수 있는 까닭도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타자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만일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하고 묻자 공자는 “어찌 어진 사람일 뿐이겠는가? 반드시 성인(聖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何事於仁 必也聖 乎)”라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단어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는 단어다.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라는 이 뜻은 어진 행실뿐만 아니라, 가히 성인의 경지라고 할만하다는 공자의 극찬을 생각해 볼 때, ‘베풂’ 곧 ‘나눔(봉사)’과 구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널리 베푸는 정신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존중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공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서게 하며,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먼저 통달하게 한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했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던 황금율(黃金律)의 격언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모든 성인들이 이르는 나눔 정신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질적 나눔 역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식의 나눔이다. 공자 스스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誨人不倦)’처럼 ‘배움’을 서로 나누고 벗과 그 기쁨을 함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절약하면서도 남을 사랑하는 것(節用而愛人) 또한 나눔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눔은 이처럼 물질적 베풂뿐 아니라, 학문을 배워서 가르쳐주거나 벗과의 교제를 나누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汎愛衆)과 효도와 형제 우애에 입각한 정사를 도모하는 것까지 넓은 의미의 나눔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움에 기초하여 타자를 돕고 기쁨을 주며, 유익하게 하는 모든 행위는 나눔의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눔은 상생(相生)과 공존(共存)의 윤리에 기초한다. 인(仁)에 기초한 공자의 도(道)가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고, 예수나 석가의 가르침도 예외가 아니다. 나눔(봉사)의 정신에 근거하여 살게 되면, 분쟁의 소지가 없게 된다.
오늘날 모든 과학기술인이 “난 많은 연구를 통해 세상에 일익을 담당했으니 쉴 때도 됐다”라고 자조 섞인 말은 혼자만의 허영이며 자기만족이니 과학기술인의 입에서는 은퇴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터득한 지식을 전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끊임없는 소통과 나눔을 통해 세상의 한 축에서 과학기술인들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이다.
지식을 창조하는 과학기술인에게는 정년이 없다. 학자에게서 정년은 창조적 사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년을 풀이했다. 젊은 세대가 창조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학자가 있다면 바로 퇴직한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이다.
연구하겠다는 의욕이 있고 왕성한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있는 경력이 있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연구하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오늘날 노벨상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58세이고 최고 고령자는 89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학교 교수나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자기 일을 하면서 노벨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해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열심히 연구하는 과학기술인이 정년 후에도 그 전공을 계속하여 연구할 때 우리나라에서도 노벨과학상인 화학, 물리, 생리학·의학상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학문의 끝은 황혼이 없다.
60대 정년을 맞이하는 젊은 시니어 과학기술인이여 계속해서 공부하라, 독서하라, 봉사하라! 이것을 잘 지킨다면 여러분은 100세까지 건강하고 기운찬 삶을 살 것이다.
필자소개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 이사
한국환경영향평가협회 고문
(전)국립환경과학원 원장
(전)총리실 기초과학기술위원회 평가위원
(전)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6, 7대
황조근정훈장·국제환경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