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 여행기 (2)
도 정 기
오늘(4월 4일)은 다낭 여행의 2일차다. 오늘의 여행지는 후에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으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된 이후부터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왕도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 일행 12명만을 태운 25인승 미니버스는 다낭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거리의 고대 수도로 향했다.
다낭에서 후예까지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자동차로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후에로 가는 중간위치에 베트남에서 가장 길다는 6km의 하이반터널이 있었다. 터널은 왕복 2차선이다.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경제가 발전함으로 교통 수요가 늘어나 또 다른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이 지점이 통일되기 전 월남과 월맹의 경계선이었던 17도선 부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38선이라고 할 수 있다.
호텔에서 10시에 출발하였기 때문에 후에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도착하여 바로 점심을 먹었다.
후에에서 처음 들린 곳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위에 있는 티엔무 사원이다. 티엔무 사원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파고다란 높이 21m의 8각의 7층탑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19세기에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각층마다 금동불상이 안치되었으나 도난당했다고 한다. 다시 계단을 오르니 티엔무 사원의 본 절이 있었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찰의 느낌이 물씬풍긴다. 순수한 불교들의 수도 생활을 하는 대표적인 사원이라고 한다. 틱광득스님이 1963년 독재정권의 불교 탄압에 맞서기 위해 사이공까지 가서 시위를 벌렸어나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자리에서 분신했다고 한다. 그 후 유명해진 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가이드는 후에 관광지에는 들어갈 수 없어 현지 가이드가 인솔했다. 현지 가이드는 우리말이 서투르 설명을 하지못하고 인솔만 했다. 도착하기 전 버스에서 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떠올리며 눈으로만 관람했다. 아마 자기 나라 국민들의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 일 것 같았다. 주차장 주변에는 우리나라의 여느 관광지처럼 기념품 가게가 줄비하게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세계 어디를 가나 별반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코스는 구엔왕조 왕궁과 7명의 군주가 묻혀있는 왕릉이다.
구엔 왕조는 13대에 걸쳐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졌다.
구엔 왕 때 건축된 궁전, 사찰, 성곽, 제단 등이 향강 (Song Huong Perfume River)을 따라서 건축되었다. 향강 남쪽 둑 언덕 중앙에는 구엔 왕조 시대의 황제들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강의 북쪽 둑에는 11km 길이의 방어를 쌓은 성벽으로 건축된 궁전들의 유적이 있다. 이 건축물은 구엔 (Nguyen) 왕조 시대의 황제와 관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100여 개의 건축물로 자연 풍경과 잘 어울려져 있다. 후에는 베트남의 경주라 할 만큼 베트남의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문화유산들을 보존하고 있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최대 격전지로 문화재들이 파괴되는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중부 베트남의 관광 명소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들린 곳이 구엔 왕조 황제들의 왕릉이다. 왕릉이라고 하기에 우리나라의 왕릉처럼 무덤이 있는 줄 알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왕릉은 보이지 않고 건축물들만 있었다. 알고 보니 왕릉은 모두 건축물로 만들어젔다.
뜨둑 황제 왕릉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구엔왕조의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50개의 건축물로 구성된 225헉타르에 펼쳐져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을 복구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카이딘 왕릉은 고딕양식과 인도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실물크기의 말과 코끼리들의 다양한 조각상이 있있다. 11년에 걸쳐 건축되었다는데 건물의 규모가 웅장했다. 특이한 것은 바닦에서 천장까지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와 유리조각으로 모자이크 장식을 해 서양 건물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1톤 무게의 카이딘 황제상이 있고, 그 밑에 황제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왕릉들은 무덤이라기보다 궁궐이라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왕위에 오르면 살아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릉을 구경하고 찾아간 후에 황궁은 안내서에 의하면 1804년(Gia Long 왕 )부터 1832년 (Minh Mang 왕)까지 향강의 북쪽 5.2km 지점에 건설되었다. 청조의 자금성을 모델로 만들어져 왕과 그의 가족, 측근들 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하였다. 100 개가 넘는 기념탑과 왕궁, 타워, 호수, 사원 등의 건축물들이 빈틈없이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황궁은 외성(Kinh Thanh)과 내성인(Dai Noi)으로 나누어져 있다. 황궁에는 오문 (Cua Ngo Mon) 태화전(Dien Thai Hoa) 현임각(Hien Lam cot) 그리고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Tu Cam Thanh)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변길이는 10km. 왕궁의 성벽은 19세기 초에 수만명의 노역자들이 2m 두께의 프랑스식 벽돌로 쌓았으며 왕궁의 기본적인 구조는 중국의 자금성과 거의 같다. 왕궁 주위는 향강과 인공 수로로 둘러싸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요새로 되어있다.
황궁 주차장에 도착하니 황제를 맞이하듯 차 문이 없는 개방형인 고풍의 멋진 BMW의 이동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카를 타고 황제가 된듯한 기분으로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 안을 구경할 때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유창하게 말하는 40세 초반으로 보이는 현지인인 여자 해설가의 안내를 받았다. 해설 도중에 유쾌한 농담도 섞어가며 마치 녹음기를 틀듯 거침없이 설명했다. 말이 너무 빨라 반박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모이라고 하는 말이 “이리와 봐라”였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리 와봐라”가 아니라 “이리 오느라”라고 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다음 부터는 해설을 할 때마다 “이리 오느라”하고 불렀다. 한 곳을 구경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마다 황궁 내에서만 운행하는 6명 정도 타는 전동카를 타고 다녔다. 황궁을 구경하고 나서 후에 시가지를 구경했다. 시가지는 중국식, 일본식, 프랑스식 건물들이 구역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친 영향이다. 후에는 물가가 저렴하고 깨끗하며 문화유적들이 많아 베트남의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를 하고 다낭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숙소인양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적잖은 나이에 무더위 속에서 온종일 구경하느라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첫댓글 2 년전 친구들과 다녀온 베트남 여행이 추억처럼 떠오르게 하는 여행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너무나 자세하고 심플한 해설까지 곁들이니 다시 한번 베트남 여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자세한 설명에 내가 베트남을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가보고 싶습니다. 베트남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은 나라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배트남 역사의 현장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최근의 경제 성장으로 배트남의 여러곳이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또 가고 싶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베트남을 몇 해 전에 다녀 왔는데 선생님의 기행문을 읽으며 다시 기억을 떠올립니다. 자세한 설명과 묘사가 기억되살리기에 도움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선생님처럼 기행문을 적으면 여행의 마무리가 제대로 될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베트남 여행 다시 갔다녀온 느낌이 들 정도로 깨알 같은 내용들 잘 읽었습니다
평화의 도시 '후에'가 베트남의 경주 쯤 되는가 봅니다. 사원, 왕릉, 황궁 등 역사적 명소를 돌아보시고 글로 남겨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트남에 꼭 가고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써주신 역사현장의 글을 읽고 가게되면 많은 도움이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점점 여행이 멀어져간다는 나이를 생각을하니 더 가고싶습니다. 골목골목을 상상하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