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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번호
2625
제목
주석에서 인물 설명이 잘못되었습니다.
신고자
박수준
신고일자
2018-11-05
아이템명
고전번역서
오류유형
주석오류
DCI
ITKC_BT_0337A_0360_010_0190_2017_006_XML
처리상태
오류내용
[주-D007] 봉화군(奉化君) :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낸 박수소(朴守素)로, 박이서의 손자이며, 박노의 7남 2녀 가운데 장남이다. 《승정원일기》 효종 원년 1월 3일 기사에 박수소를 봉화 현감에 임명하는 기록이 보인다.
--->봉화군(奉化君) : 박이서의 손자이며, 박로의 3남인 박수현(朴守玄)이다. 자는 태현(太玄), 호는 초정(草亭)이다. 소북 팔문장(小北八文章)의 한 분으로 시와 거문고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불분권 5책)가 있다. '奉化'는 '奉敎化'의 약자로 '임금의 교화를 받들다'는 뜻으로 '지방 현감'을 통칭하는 용어이고, '君'은 손아래 사람을 친근히 부르는 호칭이다. 수명정기를 쓴 1654년 당시 박수현이 연평현령직에서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 본가로 돌아와서 이민구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글이다. 두 집안은 선대로부터 통내외를 한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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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수명정기>에 표기된 '奉化君'은 박수소(朴守素)가 아닌 3남 박수현(朴守玄)입니다.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전에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라는 주제로, 거문고 악보인 '한금신보' 관련 연구도서로 본 도서가 채택되어 인물 연구가 병행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奉化君은 '박수현'으로 밝혀졌습니다. 연구서에서 '奉化'의 의미가 '奉敎化'의 약자로 '임금의 교화를 받들다'는 뜻으로 '지방 현감'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한금신보' 관련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국악과 최선아 교수도 본인이 발표한 논문의 오류를 인정하셨습니다. (최선아 교수는 봉화군을 '朴緻(박치)'로 잘못 특정하였음). 본 사이트에선 박수소로 특정하였는데, 봉화읍지를 보면 1661년 부임하여 2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옵니다. 본 수명정기는 1654년(효종 5)에 쓴 글로 박수소가 봉화현감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연대가 맞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박수소는 장남이지만 지방으로 이주하여 본가의 후사를 이은 인물이 아닙니다. 밀양박씨 비천공파 문중에서 본 연구에 동참하여 집안 내력을 각종 문헌으로 대조한 결과, 집안 후사는 박이서-박로-박수현-박신-박윤동('한금신보' 저자)으로 5대에 걸쳐 본가와 수명정을 이어 받았으며 아울러 한양사대부의 대표적 거문고를 애호한 집안으로 연구되었습니다. 본 게시판에 첨부파일로 연구 전문을 올릴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연구서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배포된 한국관 저널(한글판,독일어판,영어판)에도 자세하게 실려 발표 되었습니다. 010-4210-6797(박수준)로 전화주시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연구논문의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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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수명정은 광해군때 密陽朴氏 중 ‘비천공’과 ‘대호공’이란 분이 있는 집안이다. 살펴보니 고려말 大提學 朴允文(박윤문)의 후손으로서 조선 中宗朝부터 朝廷에 진출하여 명문가를 이룬 遯溪(돈계) 朴栗(박률)의 아들과 손자의 號(호)이다.
그림
<밀양박씨 돈계 박률 가계도>
1616년(광해군 8) 이조참판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가 처음 짓고, 그 아들 병조참판 大瓠(대호) 朴𥶇(박로)가 증축하고 그 손자 奉化君(봉화군)에 이르렀으니 3세대 39년이 되었다. 記文을 쓴 년도는 1654년(효종 5)이다. 여기서 ‘봉화군’이란 인물에 논란이 있다. 2013년 최선아 교수가 쓴 ‘『한금신보』(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이란 논문에서 봉화군을 박이서의 손자가 아닌 증손자 ‘朴緻(박치)’로 특정하여 연구서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착오가 있어 바로 잡고자 한다.
첫째, 박치가 奉化縣監(봉화현감)을 지낸 경력을 들어 박치를 봉화군으로 단정한 것이 잘못되었다.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를 보면 朴緻(박치)는 1697년에 부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記文을 쓴 년도와 43년의 차이가 난다.
그림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
朴守素 順治十八年莅縣器度宏偉政尙寬弘 1661년(현종 2) 부임
…<중략>…18人 +36년(18x2) *수령임기 2년
朴緻 1697년(숙종 23)
…<중략>…3人 +6년(3x2)
朴泰迪 康熙 癸未莅縣… 1703년(숙종 29) 부임
둘째, <수명정기>에는 분명 3세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박치는 4세 증손자이며, 박치의 선친인 朴守玄(박수현)이 향 70세로 1674년까지 살았는데, 이유없이 아버지를 건너뛰어 세대를 분석한 것이 잘못되었다.
셋째,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와 家業을 이었다’는 부분에서 박치와 그 후손은 가문에서 가업을 이은 支孫이 아니다.
‘1654년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온 사람’을 밀양박씨 선조들의 詩文을 기술해 놓은 ≪術先錄≫과 다수의 ≪家藏紀史≫를 찾아보니 박수현의 비문에 그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림
≪術先錄≫
通訓大夫 成均館司藝 朴守玄 短碣文
庚寅 拜永平縣令 奉板輿榮養
甲午 遞還 邑人立碑頌德…
경인년(1650) 永平縣令을 제수하여 板輿로 어머니를 모셔다가 榮養하였다.
갑오년(1654) 遞職하고 돌아오니 고을 사람들이 頌德碑를 세워 칭송했다.
‘영평현령직에서 교체되어 갑오년(1654)에 돌아오다’. 기문에 나온 년도와 내용이 일치한다. 곧 ‘박이서→박로→박수현’으로 이어지는 3세 39년이 가업의 계보를 있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해이다. 아울러 기문에 사용된 관직명에는 전통적인 용례가 적용되고 있다. ‘吏部左侍郞’는 고려조때의 명칭으로 이조 참판을 말하고, ‘兵部左侍郞’은 병조 참판을 말한다. 그 맥락에서 奉化君에서 ‘奉化’는 ‘奉敎化’의 준말로 ‘백성을 교화하는 임금의 명을 받든다’는 뜻으로 곧 ‘지방수령’을 통칭하여 표현한 말이고, ‘君’은 ‘김군’, ‘박군’ 부르듯이 손아래 사람을 친근히 부르는 말씨이다. 기문을 쓴 이민구는 박이서의 친구 芝峯 李睟光(이수광)의 둘째 아들로서 박이서의 아들 박로의 친구이다. 이민구가 친구의 아들 박수현에게 친근히 써준 글이다.
위 전승 계보를 확증해줄 자료가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대호 박로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시강원의 세자빈객으로 보필하던 시절의 일이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 도성에 왔을 때 ‘박로의 자식을 뵙고 싶다’고 하자 조정에서 부른 사람이 바로 박수현이다.
그림
≪承政院日記≫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李弘望以迎接都監言啓曰, 勅使分付, 招朴𥶇之子, 欲爲相見云, 故敢啓。傳曰, 使之入見。
이홍망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칙사의 분부에, 朴𥶇(박로)의 아들을 불러서 만나 보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들어가 만나 보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金尙以迎接都監言啓曰, 朴𥶇子社稷參奉守玄, 入見英使, 則使鄭命守傳致平安信, 仍示顔厚之色, 歸時當付答書云矣。敢啓。傳曰, 知道
김상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朴𥶇(박로)의 아들인 社稷署參奉 朴守玄(박수현)이 들어가 사신 영아아대를 만나니, 정명수로 하여금 평안하다는 서신을 전해 주게 하고 이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고 돌아갈 때 답서를 부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承政院日記≫
아래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草亭 朴守玄(박수현)은 小北을 대표하는 八文章의 한 분으로 科擧에서 장원급제 하였고 그의 ‘詩’에 대한 對策[과거답안지]은 모음집 ≪執策(집책)≫[미국 버클리대학교 소장]에 실려 있다. 또한 그의 시문집인 ≪草亭先生遺稿(초정선생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박수현은 집안뿐만 아니라 소북을 대표하는 인물로 명망이 높았던 분이다.
다시 정리하면 수명정 1대 창립자는 비천 박이서, 2대 승계자는 대호 박로, 3대 승계자는 초정 박수현이다.
4대 승계자는 박수현의 아들 중 넷째 桃谷 朴紳(박신)이다. 그는 1638년(仁祖 16)부터 1715년(肅宗 41)까지 살았던 분으로 일찍이 대과급제하여 西浦 金萬重(김만중), 畏齋 李端夏(이단하) 등과 함께 성균관 徑書校正官(경서교정관) 직임을 시작으로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승정원 좌승지, 충청 감사, 안동 부사 등 조정의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려말 박윤문에서 이어져온 밀양박씨 가문의 족보를 최초로 발간한 사람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있는 先塋(선영)의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실된 비석을 다시 세우는 등 집안의 대소사를 전담한 분이다. 그 때 지었던 시가 전해진다.
宗族契會 桃谷
종족의 모임 도곡
城南佳會屬今年 성남의 아름다운 모임 금년에 있으니
正値榴花五月天 바로 석류꽃 피는 오월의 날씨를 만났네
爲語宗中諸少長 종중의 여러 젊은이와 어른들에게 말하노니
惇親厚義後孫延 친족의 정의 도타이 하여 후손에게까지 뻗어가세
≪術先錄≫
여기서 말한 城南은 숭례문 밖 桃楮洞(도저동) 本家를 말하는데, 비천 박이서 때부터 世居를 한 곳이다. 박신은 집안의 가업을 이은 後嗣였다는 것이다.
5대 승계자는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이다. 우리가 찾던 ≪한금신보≫의 편저자가 되는 분이다. 1673년(顯宗 14)에서 1734년(英祖 10)까지 살았던 분으로 앞에서 살펴본 ≪한금신보≫의 서문에 나오는 단서가 모두 맞아 들어가는 인물이면서 당시 가문의 종사를 도맡아 했던 분이다. 박윤동은 경종때 대과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분으로 그의 行狀에 거문고 연주에 대한 내용이 있다.
掌令 朴胤東 行狀
癸未。四拙公感風痹。公日夜扶護。嘗藥供旨。克殫誠敬。日邀親戚長老。琴歌侑歡。適意養志。人皆稱孝。
장령 박윤동 행장
계미년(1703)에 사졸공[박신]께서 風病이 나자 공이 밤낮으로 扶護(부호)하면서 약을 맛보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날마다 친척과 長老들을 초청하여 거문고를 타며 음식을 권해 즐겁게 보내면서 뜻을 기르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術先錄≫
이 거문고 美談은 부친 박신의 신도비명에도 나온다.
忠淸道觀察使 朴紳 神道碑銘
癸未感風痹。杜門屛居。醫治數歲益厭苦口盡去刀圭。語人曰。吾今老矣。何用藥爲。起居飮食。唯當適吾意洞開窓牖。或引盃酌。日與親戚娛樂。又約數三同志倣耆英會。蒼顔華髮掩映罇俎。花朝月夕。輒肩輿相訪。子弟列侍。或以琴歌侑勸。或以詩酒暢淮。暮境淸福寡貳。
계미년 風病에 걸려 문을 닫고 조용히 생활하며… 또 몇 명의 뜻이 맞은 친구들과 耆英會를 조직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고 花朝月夕이면 肩輿를 타고 서로를 방문하면 자제들이 늘어서서 모시며 거문고를 권하기도 하고 혹은 詩酒로 질탕하게 즐겨서 이보다 더한 늘그막의 淸福이 없었다.
≪術先錄≫
박신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가족들의 생몰년을 살펴보자.
성명 생년 몰년 1724년 생존
朴紳(父) 1638 1715 x
配 慶州崔氏 미상 1706 x
朴祖東 1657 1711 x
配 坡平尹氏 미상 1698 x
配 廣州李氏 미상 1700 x
朴宗東 1664 172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34 x
朴胤東 1673 173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40 x
≪한금신보≫가 작성된 1724년 생존했던 아들은 둘째 박종동과 셋째 박윤동 두 분이다. 둘째 박종동은 1715년 부친 박신의 喪을 당하자 묘가 있는 양주로 이주했다. 이후 제삿날에만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서울집은 박윤동이 이어받아 祠堂(사당)과 함께 忌祭祀(기제사)를 주관했다.
通德郞 朴宗東 墓誌
丙戌丁崔夫人憂。乙未觀察公捐館挈家眷。移居于觀察公墓下。値喪餘之日。每至京第參祀。翌日卽還。不以他事。復作京洛之行矣
통덕랑 박종동 묘지
병술년(1706)에 崔夫人의 喪을 당하고 을미년(1715)에는 觀察公께서 세상을 버리자 가족을 이끌고 관찰공 묘소 아래로 이사하여 살면서 제삿날을 당하면 서울로 가 제사에 참석하고 이튿날이면 즉시 돌아와 다른 일로는 더는 서울을 왕래하지 않았다.
≪術先錄≫
결론은 내면, 규재 박윤동이 26세 중년의 나이인 1698년부터 큰 형수 坡平尹氏를 시작으로 연이어 상을 당하고, 부친 박신의 장례를 치룬 이후엔 둘째 형마저 선영이 있는 양주로 이주하였으니 서울의 본가는 박윤동이 이어받아 가업을 이어갔다는 것이 명확해 진다. 아울러 박종동은 후사가 없어 박윤동의 長子인 朴澂(박징)이 繼子로 들어가 代를 이어갔다.
박윤동이 가업을 이어 종사를 맡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는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諡號가 당쟁에 밀려 사후 159년인 1793년(정조 17)에 내려지는데, 그 시호를 받는 延諡(연시) 행사를 박윤동의 실제 장손이 되는 朴道翔(박도상)의 집에서 행해진다. 위와 같은 가문의 학맥과 가업을 일목연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萬姓譜’와 ‘號譜’가 그런 책인데, 그 중 ≪姓號譜彙(성호보휘)≫ ‘朴氏’편을 보면 자세하다.
그림
≪姓號譜彙≫
朴栗-朴彛叙-朴𥶇-朴守玄-朴紳○子 胤東….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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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주소는 당시 전시된 도서를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참조바랍니다.
동주선생집(東州先生集)[이민구,박수현,수명정기]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494&xcode=019&mcode=001&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박이서]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226&xcode=018&mcode=002&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박로]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300&xcode=018&mcode=002&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박수현]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286&xcode=018&mcode=002&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북보(北譜)[밀양박씨 소장본]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227&xcode=018&mcode=002&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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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에서 인물 설명이 잘못되었습니다.(다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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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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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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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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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KC_BT_0337A_0360_010_0190_2017_006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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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내용
[주-D007] 봉화군(奉化君) :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낸 박수소(朴守素)로, 박이서의 손자이며, 박노의 7남 2녀 가운데 장남이다. 《승정원일기》 효종 원년 1월 3일 기사에 박수소를 봉화 현감에 임명하는 기록이 보인다.<---- 잘못된 자료
수정요구 --->봉화군(奉化君) : 박이서의 손자이며, 박로의 3남인 박수현(朴守玄)이다. 자는 태현(太玄), 호는 초정(草亭)이다. 그는 박로의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형제들 중에는 유일하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안의 가업을 이었으며 청현(淸顯)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특히 소북 팔문장(小北八文章)의 한 분으로 유명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불분권 5책)가 있다. '奉化'는 '奉敎化'의 약자로 '임금의 교화를 받들다'는 뜻으로 '지방 현감'을 통칭하는 용어이고, '君'은 손아래 사람을 친근히 부르는 호칭이다. 수명정기를 쓴 1654년 당시 박수현이 4년간의 연평현령직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 본가로 돌아와서 이민구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글이다. 두 집안은 선대로부터 통내외를 했던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박수현의 손자인 규재(奎齋) 박윤동(朴胤東, 1673~1734)이 수명정에서 쓴 ≪한금신보(韓琴新譜)≫ 거문고 악보가 전해지고 있는데, 17세기 한양 사대부의 거문고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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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수명정기>에 표기된 '奉化君'은 박수소(朴守素)가 아닌 3남 박수현(朴守玄)입니다.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전에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라는 주제로, 거문고 악보인 '한금신보' 관련 연구도서로 본 도서가 채택되어 인물 연구가 병행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연구 결과, 奉化君은 '박수현'으로 밝혀졌습니다. 연구서에서 '奉化'의 의미가 '奉敎化'의 약자로 '임금의 교화를 받들다'는 뜻으로 '지방 현감'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한금신보' 관련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국악과 최선아 교수도 본인이 발표한 논문의 오류를 인정하셨습니다. (최선아 교수는 봉화군을 '朴緻(박치)'로 잘못 특정하였음). 본 사이트에선 박수소로 특정하였는데, 봉화읍지를 보면 1661년 부임하여 2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옵니다. 본 수명정기는 1654년(효종 5)에 쓴 글로 박수소가 봉화현감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연대가 맞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박수소는 장남이지만 지방으로 이주하여 본가의 후사를 이은 인물이 아닙니다. 밀양박씨 비천공파 문중에서 본 연구에 동참하여 집안 내력을 각종 문헌으로 대조한 결과, 집안 후사는 박이서-박로-박수현-박신-박윤동('한금신보' 저자)으로 5대에 걸쳐 본가와 수명정을 이어 받았으며 아울러 한양사대부의 대표적 거문고를 애호한 집안으로 연구되었습니다. 본 게시판에 첨부파일로 연구 전문을 올릴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연구서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울러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배포된 한국관 저널(한글판,독일어판,영어판)에도 자세하게 실려 발표 되었습니다. 010-4210-6797(박수준)로 전화주시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연구논문의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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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수명정은 광해군때 密陽朴氏 중 ‘비천공’과 ‘대호공’이란 분이 있는 집안이다. 살펴보니 고려말 大提學 朴允文(박윤문)의 후손으로서 조선 中宗朝부터 朝廷에 진출하여 명문가를 이룬 遯溪(돈계) 朴栗(박률)의 아들과 손자의 號(호)이다.
그림
<밀양박씨 돈계 박률 가계도>
1616년(광해군 8) 이조참판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가 처음 짓고, 그 아들 병조참판 大瓠(대호) 朴𥶇(박로)가 증축하고 그 손자 奉化君(봉화군)에 이르렀으니 3세대 39년이 되었다. 記文을 쓴 년도는 1654년(효종 5)이다. 여기서 ‘봉화군’이란 인물에 논란이 있다. 2013년 최선아 교수가 쓴 ‘『한금신보』(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이란 논문에서 봉화군을 박이서의 손자가 아닌 증손자 ‘朴緻(박치)’로 특정하여 연구서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착오가 있어 바로 잡고자 한다.
첫째, 박치가 奉化縣監(봉화현감)을 지낸 경력을 들어 박치를 봉화군으로 단정한 것이 잘못되었다.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를 보면 朴緻(박치)는 1697년에 부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記文을 쓴 년도와 43년의 차이가 난다.
그림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
朴守素 順治十八年莅縣器度宏偉政尙寬弘 1661년(현종 2) 부임
…<중략>…18人 +36년(18x2) *수령임기 2년
朴緻 1697년(숙종 23)
…<중략>…3人 +6년(3x2)
朴泰迪 康熙 癸未莅縣… 1703년(숙종 29) 부임
둘째, <수명정기>에는 분명 3세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박치는 4세 증손자이며, 박치의 선친인 朴守玄(박수현)이 향 70세로 1674년까지 살았는데, 이유없이 아버지를 건너뛰어 세대를 분석한 것이 잘못되었다.
셋째,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와 家業을 이었다’는 부분에서 박치와 그 후손은 가문에서 가업을 이은 支孫이 아니다.
‘1654년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온 사람’을 밀양박씨 선조들의 詩文을 기술해 놓은 ≪術先錄≫과 다수의 ≪家藏紀史≫를 찾아보니 박수현의 비문에 그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림
≪術先錄≫
通訓大夫 成均館司藝 朴守玄 短碣文
庚寅 拜永平縣令 奉板輿榮養
甲午 遞還 邑人立碑頌德…
경인년(1650) 永平縣令을 제수하여 板輿로 어머니를 모셔다가 榮養하였다.
갑오년(1654) 遞職하고 돌아오니 고을 사람들이 頌德碑를 세워 칭송했다.
‘영평현령직에서 교체되어 갑오년(1654)에 돌아오다’. 기문에 나온 년도와 내용이 일치한다. 곧 ‘박이서→박로→박수현’으로 이어지는 3세 39년이 가업의 계보를 있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해이다. 아울러 기문에 사용된 관직명에는 전통적인 용례가 적용되고 있다. ‘吏部左侍郞’는 고려조때의 명칭으로 이조 참판을 말하고, ‘兵部左侍郞’은 병조 참판을 말한다. 그 맥락에서 奉化君에서 ‘奉化’는 ‘奉敎化’의 준말로 ‘백성을 교화하는 임금의 명을 받든다’는 뜻으로 곧 ‘지방수령’을 통칭하여 표현한 말이고, ‘君’은 ‘김군’, ‘박군’ 부르듯이 손아래 사람을 친근히 부르는 말씨이다. 기문을 쓴 이민구는 박이서의 친구 芝峯 李睟光(이수광)의 둘째 아들로서 박이서의 아들 박로의 친구이다. 이민구가 친구의 아들 박수현에게 친근히 써준 글이다.
위 전승 계보를 확증해줄 자료가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대호 박로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시강원의 세자빈객으로 보필하던 시절의 일이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 도성에 왔을 때 ‘박로의 자식을 뵙고 싶다’고 하자 조정에서 부른 사람이 바로 박수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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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李弘望以迎接都監言啓曰, 勅使分付, 招朴𥶇之子, 欲爲相見云, 故敢啓。傳曰, 使之入見。
이홍망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칙사의 분부에, 朴𥶇(박로)의 아들을 불러서 만나 보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들어가 만나 보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金尙以迎接都監言啓曰, 朴𥶇子社稷參奉守玄, 入見英使, 則使鄭命守傳致平安信, 仍示顔厚之色, 歸時當付答書云矣。敢啓。傳曰, 知道
김상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朴𥶇(박로)의 아들인 社稷署參奉 朴守玄(박수현)이 들어가 사신 영아아대를 만나니, 정명수로 하여금 평안하다는 서신을 전해 주게 하고 이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고 돌아갈 때 답서를 부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承政院日記≫
아래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草亭 朴守玄(박수현)은 小北을 대표하는 八文章의 한 분으로 科擧에서 장원급제 하였고 그의 ‘詩’에 대한 對策[과거답안지]은 모음집 ≪執策(집책)≫[미국 버클리대학교 소장]에 실려 있다. 또한 그의 시문집인 ≪草亭先生遺稿(초정선생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박수현은 집안뿐만 아니라 소북을 대표하는 인물로 명망이 높았던 분이다.
다시 정리하면 수명정 1대 창립자는 비천 박이서, 2대 승계자는 대호 박로, 3대 승계자는 초정 박수현이다.
4대 승계자는 박수현의 아들 중 넷째 桃谷 朴紳(박신)이다. 그는 1638년(仁祖 16)부터 1715년(肅宗 41)까지 살았던 분으로 일찍이 대과급제하여 西浦 金萬重(김만중), 畏齋 李端夏(이단하) 등과 함께 성균관 徑書校正官(경서교정관) 직임을 시작으로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승정원 좌승지, 충청 감사, 안동 부사 등 조정의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려말 박윤문에서 이어져온 밀양박씨 가문의 족보를 최초로 발간한 사람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있는 先塋(선영)의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실된 비석을 다시 세우는 등 집안의 대소사를 전담한 분이다. 그 때 지었던 시가 전해진다.
宗族契會 桃谷
종족의 모임 도곡
城南佳會屬今年 성남의 아름다운 모임 금년에 있으니
正値榴花五月天 바로 석류꽃 피는 오월의 날씨를 만났네
爲語宗中諸少長 종중의 여러 젊은이와 어른들에게 말하노니
惇親厚義後孫延 친족의 정의 도타이 하여 후손에게까지 뻗어가세
≪術先錄≫
여기서 말한 城南은 숭례문 밖 桃楮洞(도저동) 本家를 말하는데, 비천 박이서 때부터 世居를 한 곳이다. 박신은 집안의 가업을 이은 後嗣였다는 것이다.
5대 승계자는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이다. 우리가 찾던 ≪한금신보≫의 편저자가 되는 분이다. 1673년(顯宗 14)에서 1734년(英祖 10)까지 살았던 분으로 앞에서 살펴본 ≪한금신보≫의 서문에 나오는 단서가 모두 맞아 들어가는 인물이면서 당시 가문의 종사를 도맡아 했던 분이다. 박윤동은 경종때 대과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분으로 그의 行狀에 거문고 연주에 대한 내용이 있다.
掌令 朴胤東 行狀
癸未。四拙公感風痹。公日夜扶護。嘗藥供旨。克殫誠敬。日邀親戚長老。琴歌侑歡。適意養志。人皆稱孝。
장령 박윤동 행장
계미년(1703)에 사졸공[박신]께서 風病이 나자 공이 밤낮으로 扶護(부호)하면서 약을 맛보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날마다 친척과 長老들을 초청하여 거문고를 타며 음식을 권해 즐겁게 보내면서 뜻을 기르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術先錄≫
이 거문고 美談은 부친 박신의 신도비명에도 나온다.
忠淸道觀察使 朴紳 神道碑銘
癸未感風痹。杜門屛居。醫治數歲益厭苦口盡去刀圭。語人曰。吾今老矣。何用藥爲。起居飮食。唯當適吾意洞開窓牖。或引盃酌。日與親戚娛樂。又約數三同志倣耆英會。蒼顔華髮掩映罇俎。花朝月夕。輒肩輿相訪。子弟列侍。或以琴歌侑勸。或以詩酒暢淮。暮境淸福寡貳。
계미년 風病에 걸려 문을 닫고 조용히 생활하며… 또 몇 명의 뜻이 맞은 친구들과 耆英會를 조직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고 花朝月夕이면 肩輿를 타고 서로를 방문하면 자제들이 늘어서서 모시며 거문고를 권하기도 하고 혹은 詩酒로 질탕하게 즐겨서 이보다 더한 늘그막의 淸福이 없었다.
≪術先錄≫
박신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가족들의 생몰년을 살펴보자.
성명 생년 몰년 1724년 생존
朴紳(父) 1638 1715 x
配 慶州崔氏 미상 1706 x
朴祖東 1657 1711 x
配 坡平尹氏 미상 1698 x
配 廣州李氏 미상 1700 x
朴宗東 1664 172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34 x
朴胤東 1673 173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40 x
≪한금신보≫가 작성된 1724년 생존했던 아들은 둘째 박종동과 셋째 박윤동 두 분이다. 둘째 박종동은 1715년 부친 박신의 喪을 당하자 묘가 있는 양주로 이주했다. 이후 제삿날에만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서울집은 박윤동이 이어받아 祠堂(사당)과 함께 忌祭祀(기제사)를 주관했다.
通德郞 朴宗東 墓誌
丙戌丁崔夫人憂。乙未觀察公捐館挈家眷。移居于觀察公墓下。値喪餘之日。每至京第參祀。翌日卽還。不以他事。復作京洛之行矣
통덕랑 박종동 묘지
병술년(1706)에 崔夫人의 喪을 당하고 을미년(1715)에는 觀察公께서 세상을 버리자 가족을 이끌고 관찰공 묘소 아래로 이사하여 살면서 제삿날을 당하면 서울로 가 제사에 참석하고 이튿날이면 즉시 돌아와 다른 일로는 더는 서울을 왕래하지 않았다.
≪術先錄≫
결론은 내면, 규재 박윤동이 26세 중년의 나이인 1698년부터 큰 형수 坡平尹氏를 시작으로 연이어 상을 당하고, 부친 박신의 장례를 치룬 이후엔 둘째 형마저 선영이 있는 양주로 이주하였으니 서울의 본가는 박윤동이 이어받아 가업을 이어갔다는 것이 명확해 진다. 아울러 박종동은 후사가 없어 박윤동의 長子인 朴澂(박징)이 繼子로 들어가 代를 이어갔다.
박윤동이 가업을 이어 종사를 맡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는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諡號가 당쟁에 밀려 사후 159년인 1793년(정조 17)에 내려지는데, 그 시호를 받는 延諡(연시) 행사를 박윤동의 실제 장손이 되는 朴道翔(박도상)의 집에서 행해진다. 위와 같은 가문의 학맥과 가업을 일목연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萬姓譜’와 ‘號譜’가 그런 책인데, 그 중 ≪姓號譜彙(성호보휘)≫ ‘朴氏’편을 보면 자세하다.
그림
≪姓號譜彙≫
朴栗-朴彛叙-朴𥶇-朴守玄-朴紳○子 胤東….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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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주소는 당시 전시된 도서를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참조바랍니다.
동주선생집(東州先生集)[이민구,박수현,수명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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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박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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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박로]
http://www.haksunje.com/shop/shopdetail.html?branduid=93300&xcode=018&mcode=002&scode=&type=X&search=&sort=brandname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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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보(北譜)[밀양박씨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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